2023년 3월, 회사에서 글로벌 컨설팅펌과의 협업이 시작되었다.
컨설턴트는 첫 미팅부터 분위기가 달랐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자료입니다.”
화면에 펼쳐진 슬라이드는 완벽했다. 디자인은 세련됐고, 구조는 논리적이었으며, 흐름은 설득력이 넘쳤다. 우리가 평소에 만들던 자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말.
“이 발표 스크립트는 ChatGPT Plus로 작성했습니다. 시간도 절약되고 퀄리티도 훨씬 좋아요.”
순간 회의실 공기가 싸늘해졌다.
컨설턴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마스터플랜 홍보 영상 대본도 GPT로 만들었어요. 한국어, 영어, 중국어 버전을 한 번에 뽑았죠.
물론 Plus 버전은 회사에서 지원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AI 사용을 숨기느라 눈치를 보던 입장이었는데,
그는 당당하게 “GPT Plus 결제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태도마저도 달랐다.
마치 “엑셀 썼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속으로 움찔했다. “내 노트북 안에도 GPT 창이 켜져 있는데… 나는 늘 몰래 숨겼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당당할까?”
회의실 반응은 순식간에 갈라졌다.
당황파: “아… 그래요? 근데 우리 회사 정책은…” “창의적 업무는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호기심파: “프롬프트는 어떻게 쓰셨어요?” “Plus 버전은 뭐가 다른가요?”
침묵파: 말은 없었지만 눈빛이 달라졌다. 아마 이미 몰래 쓰고 있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호기심과 침묵 사이에 있었다. 그저 조용히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컨설턴트는 우리의 머뭇거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해외에서는 이미 생성형 AI를 업무에 적극 활용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Copilot을 전 직원에게 배포했고, 구글은 Bard를 사내 도구에 통합했어요. AI 활용 능력이 승진 평가 항목에 포함된 회사도 많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리가 ‘써도 되나?’를 고민하는 동안,
세계는 이미 ‘안 쓰면 뒤처진다’로 넘어가 있었다는 것을.
그날, 내 마음속 죄책감이 흔들렸다.
“아, 숨길 게 아니구나. 이건 글로벌 흐름이구나.”
그동안 나는 GPT를 쓰면서도 늘 찜찜했다. 마치 컨닝을 하는 기분. 그런데 그들의 태도는 달랐다. AI는 부정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표준이었다.
그 회의 이후 회사 안에도 변화가 생겼다.
몇몇 팀장들은 “AI 활용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IT 부서에서 ChatGPT Plus 도입 가능성을 타진했다.
젊은 직원들이 모여 ‘AI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식 입장은 여전히 애매했다.
“쓸 수는 있지만… 너무 티 내지 말자.”
“외부는 몰라도 우리 내부는 우리 방식이 있잖아.”
“AI에 너무 의존하면 위험해.”
같은 회의실 안에서, 전혀 다른 문화가 부딪쳤다.
전통적 업무 문화: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는 신념. AI는 보조 도구일 뿐.
글로벌 업무 문화: AI는 당연한 도구. 효율성과 결과가 중요. AI 활용 능력이 곧 경쟁력.
나는 같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지만, 마치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컨설턴트의 프로세스였다.
브레인스토밍: GPT와 아이디어 발산
초안 작성: AI가 구조를 짜줌
전문성 추가: 본인 경험과 인사이트 결합
현지화: 한국 시장에 맞게 조정
검증: 오류와 사실관계 확인
“AI가 80%를 해주고, 나머지 20%에서 전문성이 나온다.”
그의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결과물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인식도 바뀌었다.
이전: 숨기며 사용, 죄책감, “이게 내 것일까?”라는 의심
이후: 당당히 언급, 효율적 도구, “어떻게 더 잘 쓸까?”라는 고민
AI는 나를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증폭시키는 도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회의실에선 새로운 암묵적 규칙이 생겼다.
AI 활용은 숨기지 않는다.
결과물의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
AI 도움을 받았으면 솔직히 언급한다.
“이 분석은 GPT가 정리했지만, 해석과 전략은 제가 했습니다.”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물론 모두가 같은 속도로 변한 건 아니었다.
적극 수용파 (20%): “AI 없으면 일 못 해요.”
조심스러운 활용파 (50%): “필요할 때만 가끔 쓴다.”
공개 거부파 (30%): “그래도 사람 손으로 해야죠.”
그런데 거부파 중에도 몰래 GPT를 켜는 사람들이 있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풍경이었다.
그 프로젝트를 통해 내가 얻은 결론은 명확했다.
AI 사용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다.
컨설턴트는 창의성을 대체하지 않았다. 반복적인 일을 AI에게 맡기고, 자신은 전략과 통찰에 집중했다. 그게 진짜 협업이었다.
그날 이후, 나 역시 달라졌다. 죄책감 대신 자신감을 얻었다. AI는 나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 능력을 확장하는 파트너였다.
하지만 변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AI는 회사의 회의실을 넘어,
교육과 예술, 사회 전반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며칠 뒤,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