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AI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

by 민준

AI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논문마저도

결정적으로 깨달은 건 논문을 쓸 때였다.

박사 시절엔 논문 한 편에 몇 달이 걸렸다. 문헌을 뒤지고, 구조를 잡고,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썼다. 빨간펜으로 덧칠하고, 지도교수에게 혼나고, 또 고치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내 논문이 됐다.


그런데 지금은?

"이 주제로 논문 구조 잡아줘." "관련 연구 동향 정리해줘." "서론 초안 작성해줘."

AI가 구조를 짜고, 문헌을 정리하고, 초안을 써줬다.

나는 그냥 검토하고, 살짝 손보고, 제출했다.


이게 내 논문인가?

논문이 완성됐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이름이 올라가고, 내 연구로 발표되는데, 실제로 내가 쓴 문장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더 솔직히 말하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기도 했다.

결과물이 괜찮으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논문은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니까.


ChatGPT Image 2025년 11월 29일 오후 12_18_07.png




아이디어 공모전

비슷한 시기, 회사에서 아이디어 공모전이 열렸다.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회사 서비스 개선 아이디어를 받는 행사였다.

나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됐다.


세련된 글, 비슷한 아이템

제출된 아이디어들을 하나씩 검토했다.

첫 번째 아이디어. 깔끔한 구성, 매끄러운 문장.

"오, 잘 썼네."

두 번째 아이디어. 역시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이템이 첫 번째와 너무 비슷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전부 글은 매끈한데, 제안 내용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AI의 한계

"AI 기반 고객 맞춤 서비스" "데이터 분석을 통한 수요 예측" "챗봇을 활용한 고객 응대 자동화"

표현은 달라도 본질은 같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AI에게 "좋은 아이디어 뭐가 있을까?"라고 묻는 순간, AI는 학습된 데이터 속 가장 그럴듯한 답을 꺼내놓는다.

그러니 같은 AI를 쓰면, 같은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개성의 실종

문제는 글이 AI 같다는 게 아니었다.

아이디어 자체에서 AI 냄새가 났다.

서론-본론-결론의 완벽한 삼단 구조. "첫째, 둘째, 셋째"로 정리된 논점. 매끄럽지만 어디서 본 듯한 해결책들. 빈틈없지만 익숙한 논리.

사람의 삐뚤빼뚤한 흔적이 사라졌다.

엉뚱한 발상, 예상 밖의 연결,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통찰.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AI를 거치면서, 모두가 비슷해져버렸다.


각자도생의 역설적 필요

아이러니했다.

앞에서 나는 "각자도생이 고립을 낳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공모전을 보니, 정반대 생각이 들었다.

"각자도생을 하지 않으면 개성이 사라진다."

모두가 같은 AI를 쓰면, 모두가 비슷해진다.

그렇다면 오히려,

차별화하려면 나만의 AI, 나만의 데이터가 필요한 거 아닐까?

각자도생이 고립을 낳지만, 각자도생이 없으면 획일화된다.

결국, 어느 쪽이든 문제가 있었다.


물어볼 수 없는 질문

심사위원들끼리 회의를 했다.

"이거, AI가 쓴 거 같지 않아요?"

누군가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하죠?"

잠시 침묵.

물어본들 뭐하나. 증명할 방법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사위원인 나조차도 AI를 쓰고 있었다.

심사 기준을 정할 때도, 심사평을 쓸 때도.

"참가자에게 AI 쓰지 말라고 할 자격이 나한테 있나?"

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회색지대

결국 공모전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AI 사용 여부는 묻지 않았다. 오직 아이디어의 질만 평가했다.

우리는 어느새 회색지대에 살고 있었다.

AI를 썼다고 말하지 않고, 안 썼다고 증명하지도 않으며, 모두가 알고도 모른 척하는 세상.


부정할 수 있나?

집에 돌아오는 길, 계속 생각이 맴돌았다.

"이걸 끝까지 부정해야 하나?"

AI가 쓴 게 티 나는데도? 증명은 안 되는데도?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나왔다.

"AI 썼으면 안 되는 걸까?"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다. 현실적이었고 구체적이었다.

AI가 썼든, 사람이 썼든, 결국 결과물이 좋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닐까?

"AI 썼다고 탈락시키는 게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거 아닌가?"


생각마저도

공모전 이후로, 나는 내 일상 속 AI 사용을 더 의식하게 됐다.

주식 투자? → AI한테 물어본다. 약속 장소? → AI가 추천한다. 이메일 초안? → AI가 써준다.

그리고 어느 날.

회의 중에 의견을 내야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무심결에 핸드폰을 열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의견이 좋을까?"

AI가 답을 줬다. 나는 그걸 거의 그대로 말했다.

회의실엔 고개를 끄덕이는 동료들. 그리고 돌아오는 한마디.

"좋은 의견이네요."

칭찬을 들었지만,

그게 내 생각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가 나인가?

밤늦게 혼자 남아 다시 생각했다.

AI가 쓴 논문은 내 논문인가? AI가 낸 아이디어는 내 아이디어인가? AI가 만든 생각은 내 생각인가?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서부터가 'AI'일까?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그 경계를 더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다음 이야기

AI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

논문도, 아이디어도, 생각마저도.

그리고 우리는 점점 AI가 주는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맞는지 틀린지 확인하지 않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지지 않고. 심지어 AI가 틀렸을 때조차.

할루시네이션.

AI가 만들어낸 거짓.

하지만 우리는 그것마저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현실도, 뭐가 진실인지 모르는 세상이니까.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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