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최초 독서의 기억은 예닐곱 살 때였던 것 같다. 아빠가 늦은 저녁 퇴근길에 사 오신 소공녀, 소공자, 트로이 목마.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다. 어느 겨울 안방 형광등 아래에서 선채로 작은 각봉투에서 아빠가 꺼내주셨던 기억. 사실 그 책 내용은 아직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기억해 낸 최초의 책의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아침 독서시간이었는데, 앞에 앉은 친구가 임진왜란이라는 책을 가져와서 읽고 있었다.
"야, 그거 뭐냐. 전쟁 얘기냐? 읽고 나도 빌려줘."
점심시간에 빌려 오후 수업이 시작돼서 끝날 때까지 책상 밑에 몰래 펼쳐두고 읽었다. 너무 재밌었다. 음식으로 표현하면 "너무 맛있어." 폭풍흡입. 실제 나는 임진년에 전쟁을 하고 있었다. 행복하게도 놀랍게도 이 책은 10권짜리 전집이었다. 매일 한 권씩 친구는 그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책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서점이란 곳보다는 동네 문방구에서 문구 사이에 책장 하나 놓고 몇 권 안 되는 책을 팔던 시기였다. 새 책을 사려면 용돈을 모아야 하거나 사도 몇 권 못 사므로 책에 상당히 굶주려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시내 헌책방 골목이었다. 대여섯 군데가 모여있었고 책도 꽤 많았다. 그때는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만화책이었다. 보물섬이라는 뚱뚱한 만화책이 기억난다. 아기공룡 둘리가 들어있는.
한동안은 만화책을 잔뜩 사놓고 읽었다. 다 읽으면 다시 팔아 다른 만화책을 사 왔다. 그러다 소설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만화보다 더 재밌는 것이 아닌가. 겨울밤 소설책을 읽다가 잠들면 소설의 배경이나 이야기가 꿈에 나오기도 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소설들은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다. 마종기라는 작가가 기억이 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직도 그 헌책방이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 몇십 년 만에 찾아간 그곳은 낡은 형광등 아래 같은 아저씨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되신 채로. 팔리지 않는 옛날 책들이 쌓인 채 손님이 들어와야 형광등을 켜시는 걸로 보아, 그분은 사명감으로 버티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려고. 책을 고르는 척하면서 나는 울컥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가끔 쳐다보았고, 다 안다는 듯이 그 할아버지는 미소 지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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