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편
오늘은 어떤 책을 만나게 될까?
도서관 서가를 둘러보던 중 30권짜리 전집을 발견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처럼 작은 도서관에 셰익스피어전집도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무명작가의 30권짜리 전집이라니. 전집을 낸 출판사도 그렇지만, 비좁은 공간에 전집을 들여놓은 도서관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성의한가?라고 생각 했었다. 그 책을 읽어보기 전에는.
호기심에 랜덤으로 빼어 읽어 보았던 함석헌의 글은, 그의 통찰력은 놀라웠다. 당연히 있을 자리에 자랑스럽게 놓여있어야 할 책이었다. 나는 출판사와 도서관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도서관이 다른 도서관보다 소장 도서에 특별히 신경을 쓴다는 느낌을, 아니 확신을 가지고 있다. 높은 안목을 지니신 누군가의 정성이 엿보이는 이곳에서 귀한 책의 대부분을 만났으니 말이다.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도서관 담당자분들께 감사드린다.
함석헌 전집 30권을 읽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독서력이라기보다는 그 글의 흡인력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위대한 철학자가 있었다니...
도서는 보통 베스트셀러 아니고서는 상업성이 없을 텐데, 무려 30권짜리 전집을 펴낸 출판사와 발행인이 너무 궁금했다. 한길사라는 출판사는 양질의 고전을 많이 내는 출판사로 나도 이 출판사의 좋은 책을 많이 만난 경험이 있다. 발행인 뒷조사를 시작했다. 역시나 함석헌과 인연이 있었다. 젊은 시절 함석헌의 강의를 들으러 다니던 함석헌의 열성팬. 그렇다면 이 전집이 왜 나왔고, 왜 이 도서관에서 받았고, 내가 왜 읽게 되었는지가 저절로 설명이 된다. 한길사 대표의, 높은 안목의 누군가에 의한, 나를 위한...
한 세대 전 함석헌은 나름 유명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현세대에서 이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주식으로 따지면, 초저평가된 주식이다. 얼른 싼 값에 사서 소장해야 한다. 30권 중에 꼭 사고 싶은 몇 권 정선해서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주문해서 소장 중이다.
정가보다 몇 배 비싸게 샀지만 가치를 알아주니 오히려 고맙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지만,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워 구글 AI가 정리한 그대로 여기에 소개해 본다.
함석헌(咸錫憲, 1901~1989)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사상가, 민주주의 운동가이자 종교인으로, '씨알 사상'을 통해 민중의 주체성을 일깨우고 비폭력 평화 정신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1. 주요 생애와 활동
독립운동과 민주화 투쟁: 일제강점기 3·1 운동에 참여한 이래, 해방 후에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에 맞서 평생을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총 8차례 투옥되어 '인생대학(감옥)을 다닌 지도자'로도 불립니다.
한국의 간디: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와 퀘이커교의 평화 정신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습니다.
교육과 언론:오산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활동하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1970년에는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민중 계몽과 민주화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2. 핵심 사상: 씨알 사상
개념: '씨알'은 민중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로, 역사의 주체는 소수의 권력자가 아닌 평범한 민중임을 강조합니다.
역사관: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정의하며,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과 민족의 사명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러한 사관이 집약된 대표작입니다.
종교적 배경: 개신교(장로교)에서 시작하여 무교회주의를 거쳐 퀘이커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동양 고전(노자, 장자 등)과 다른 종교의 진리를 포용하는 다원주의적 시각을 가졌습니다.
3. 주요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국 역사의 의미를 고난과 생명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명저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인간혁명』: 그의 실천적 사상과 철학이 담긴 저작물들입니다.
함석헌 선생은 1989년 2월 4일 별세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겨레의 할아버지'이자 시대의 양심을 깨우는 큰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생애와 연보는 함석헌기념사업회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조금 덧붙이자면, 함석헌은 일본 유학 중에 교회가 아닌 성경을 통해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는 무교회주의를 접하고 같은 학교 같은 무교회주의 신자인 한국인 유학생 김교신이라는 친구를 두었으며, 한국에서는 유영모 선생을 스승으로 두고 있었다. 유영모 선생이 나이를 날짜로 계산하는 것에 감응을 얻어 함석헌도 나이를 날로 계산했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려는 의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카르페 디엠이다.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해방 후 독재정권의 탄압 등 현대사의 고난을 온몸으로 받으며 고생만 하시다가 좋은 시절의 입구에서 돌아가셨다.
그는 잠깐의 교사 생활을 제외하고는 평생 직업을 가져보지 않았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생활을 하였던 듯하다. 다행히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의 도움이 컸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 중에 청장(해오라기) 이덕무라는 지독한 책벌레가 있다. 그의 유명한 친구인 연암 박지원은 이덕무에게 해오라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새는 달리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 수고로움 대신 자신의 앞에 지나는 먹이만 먹었다는 이야기. 이덕무의 욕심 없는 절제된 삶이 그의 호에 잘 드러난다.
“청장(靑莊)은 해오라기의 별명이다. 이 새는 강이나 호수에 살면서, 수고롭게 먹이를 뒤쫓지 않고 제 앞을 지나가는 물고기만 쪼아 먹는다. 그래서 신천옹(信天翁)이라고 부른다. 이덕무가 ‘청장’을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다.” <청장관전서>
가난한 유학자였던 이덕무는 가난을 벗기 위해 여기저기 쏘다니는 생활 대신 이 새를 본받아,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선비에게 생계를 위한 직업은 "군자는 그릇 되어 쓰이지 않는다."(君子不器)라는 원칙과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강연은 인기가 좋아 문 밖에까지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아무도 두려워 말하지 못했던 독재정권의 폐해를 거침없이 말하는 그에게 강연이 있는 날이면 늘 형사들이 따라붙곤 했다.
"선생님 오늘은 좀 살살하시지요..."라는 말과 함께 집 밖에 대기하기도, 강연을 못 가게 막기도 하면서.
함석헌의 사상은 공자, 맹자, 중용, 노자, 장자 등의 중국철학과 인도철학, 서양철학, 불교 등 고전의 융합을 바탕으로 가장 높은 곳에 종교를 위치시킴으로써 사랑과 화해 하나됨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고 실천하는 데 전혀 두려움이 없었던 멋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전집 30권을 엄선해서 반 권 분량의 독서 노트를 작성하였고, 그것에서 다시 엄선하고 엄선한 것을 여기에 소개하기로 한다.
그가 당시 얼마나 유명했고 영향력 있는 시대의 스승이었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요새는 남에게 자리를 사양받는 일이 많습니다. 차는 늘 좁은데 이 백발이 돼버린 머리와 수염이 말을 해서 누군가가 자리를 내주곤 합니다. 그래 미안해서 될수록 앉은 앞에 가 서기를 피하지만 그래도 따라와서 끌어다 앉혀주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니 그날 아침이라고 이상할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손목을 잡히는 그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을 피긋 보면서 거기 뭔지 좀 다른 것이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은 아니 하지만 나를 잘 알고 있노라는 태도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느낄 뿐 말을 아니했고 그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가 아마 다음 정류장에 내리나보다 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얼마 동안을 가다가 그는 옆에 놨던 커다란 짐짝을 들고 내리려 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비는 제가 냈습니다” 했습니다. 그러고는 내려서 쑥쑥 가버렸습니다.
나는 전신에 가을바람처럼 핑 도는 무엇을 느꼈습니다. 나는 자연히 나도 모르게 운전대 앞 유리창을 통해 어디라 할 수 없는 먼 하늘을 내다보게 됐고 손을 옆집에 넣어 수건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는 보통 그런 때 사람들이 하는 대로 어디서 나를 봤다, 언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의 무슨 책을 봤다,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이름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무슨 부탁을 한 것도, 사람들이 잘하는 그 양으로,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인사를 한 것도 없습니다. 그저 차에서 내려서 몇 발걸음을 가다가 잠깐 돌이켜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잠깐 빙긋이 웃고는 허리를 꾸부려 짐을 지고 갔습니다. 그는 행상이었습니다.
이름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뒤흔들었습니다. 구태여 형용한다면 그저 뭔지 모르게 슬프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뭐냐? 내가 그에게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이름도 모릅니다. 언제 무슨 신세지운 것도 없습니다. 긴 말을 나눠본 일도 없습니다. 그가 내게 무슨 기대가 있을 리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뭔가? 그가 누군가?
기억은 잠자던 어린 아기처럼 일어났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급해서 공항까지 택시를 탔던 일이 있었습니다. 다 가서 요금을 내려니 아니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낸다고 했더니 하는 말이 “선생님은 저를 물론 모르시지요. 그러나 저는 선생님을 잘 압니다. 제가 어찌 선생님께 택시 값을 받을 수 있습니까?” 했습니다.
그런 일이 그것만 아니고 몇 번 있었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 내 가슴속에서 내 자리를 피해 비켜섰습니다. 그것이 나보고 하는 절이 아닌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때마다 일본 도지사에게서 천황의 교육칙어를 받아오다가 전송하는 관리가 칙어 보고 하는 절을 자기 보고 인사하는 줄 착각하고 고개를 굽실했다가 “이 자식아, 너보고 한 줄 알아?” 하고 책망하는 말을 들었던 내 친구의 지난날 얘기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럼 그들은 누구의 차 삯을 문 것인가? 누구보고 고마워한 것인가? 그들은 누군가? 그 이름 모를 사람들.
나는 아침에 책상 위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란 구절을 읽으며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던 그 뜻이 좀 알려진 것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며칠 두고 쓰려해도 써지지 않던 글이 어쩌면 써질 것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의 문이 좀 열린 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6월의 푸른 동산 속에 거닐고 있는 것을 첨으로 느꼈습니다.
오늘은 6·25 날이라고 전에 없이 야단입니다. 부르짖는 확성기 소리가 봄철 밤에 우는 승냥이 울음 같습니다. 정말로 6·25의 참혹한 전쟁에서 이 나라를 건진 것은 누굴까요? “차비는 제가 냈습니다” 하고는 말도 않고 짐을 지고 헐떡헐떡 길을 가던, 그러면서도 한 웃음 빙긋하고 가던 그 이름도 없는 사람들 아닐까?
대적을 물리쳤노라 번쩍번쩍 가슴에 훈장을 달던 사람들, 나는..........
나라를 건진 사람은 사람 죽인 사람이 아니라 그 시체를 치우고 또 씨를 뿌리고 또 갈고 말이 없는 그들, 이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의 모든 짐을 다 지면서도 이름도, 양털도, 자랑도 없는 이름 모를 사람들입니다."
함석헌 저,《함석헌 저작집 세트》, 한길사, 2009.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