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편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근심과 갈등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은 아직 선악과를 따기 이전의 모습으로 에덴동산에 머물고 있다. 인생은 동심으로 시작해서 다시 동심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아이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성경 이야기나 아이야말로 선에 가깝다는 노자 도덕경의 이야기들, 함석헌이 말하는 씨알 사상은 모두 인간의 본심은 동심에 있다는 것일 것이다.
"어린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성경 마태복음 18장 3절은 많은 동화 시인들이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던 문장이기도 하다. '어린이의 순수함과 겸손함'을 천국의 열쇠로 비유하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나마 어린이다운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고 또 그러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지상에서는 바보새요, 하늘에서는 알바트로스를 꿈꾼다. 인상적인 것은 많은 시인들이 시와 더불어 동화나 동화적인 시를 많이 창작했다는 것이다.
백석, 오장환, 윤동주, 헤르만 헤세, 오스카 와일드...
노자는 『도덕경(道德經)』 제55장에서 어린아이의 상태를 '덕(德)이 두터운 상태(含德之厚)'에 비유하며, 인위적인 악에 물들지 않은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습으로 제시한다.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의 해석에 따르면, 이는 도(道)와 하나 된 무위자연의 상태를 의미한다.
노자가 말한 '어린아이'의 경지
함덕지후(含德之厚): "덕을 두텁게 품은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다." 아이는 욕심이 없고 유연하며, 인위적인 도덕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기에 자연의 섭리(선)에 가장 가깝다. -네이버 지식백과 - 도덕경 제55장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強): 갓난아이의 몸은 부드럽고 약하지만, 그 생명력은 무엇보다 강함. 노자는 이 '부드러움'이 곧 도의 본질이며, 뻣뻣하게 굳은 '강함'보다 선에 가깝다고 가르침.
복귀어영아(復歸於嬰兒): 성인이 지향해야 할 종착지를 '갓난아이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봄. 이는 지식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심과 욕망을 버린 순수한 본성을 회복하라는 의미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성경의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는 가르침과 노자의 "아이로 돌아가라"는 철학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 '순수함이 곧 진리'라는 공통된 깨달음을 전하고 있다.
다음은 함석헌이 말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선생이 살았던 골목길의 아이들. 그는 그 아이들의 모습에서 씨알의 본모습을 본다.
씨알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의 심정을 알고 아이들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어른 정치가 아닌, 아이 정치가를, 천하를 둬 둘 줄 아는 정치가를 좀 보내주시구려!
모산의 아이들은 아이들 중에서도 아이들입니다. 집이 가난합니다. 씻어놓은 조약돌같이 반들반들한 도시의 어른의 축소판 아이들이 아닙니다. 방금 캐놓은 고구마 같은 흙 냄새 나는 흙 냄새 나기 때문에 하늘 냄새 나는 아이들입니다. 내가 아이들이 좋다는 것은 그들이 내 마음의 동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갈수록 쓸쓸합니다. 반드시 하는 일이 뜻 같지 않아서만 아닙니다. 둔한 내 마음에도 앞이 차차 엷어져서 조금 뚫어보기 시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내 마음에 호수처럼 되어주는 것은 골목의 아이들입니다. 나 혼자는 모퉁이마다에서 울다가도, 그들 사이에 들어서면 마치 호수에 든 시냇물같이 그저 고요요, 편안입니다. 무슨 말 하나 아니 해도 좋습니다. 지나가면서 흙 장난에 취하는 그 머리를 한번 가볍게 툭 쳐만 봐도 됩니다. 수평아리처럼 분통을 들먹거리며 마주 서는 둘 사이에 턱 들어서면서 “이놈 그러지마, 그럼 안 돼” 하며 후들후들하는 뺨을 한 번씩 만져만 줘도 됩니다. 그러면 “할아버지, 산타 할아버지” 하고 따라옵니다. 어떤 놈은 아주 “함석헌 할아버지” 하기도 하고 문간에 와서 할아버지의 친구가 왔다고 전갈을 놓는 놈까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모든 슬픔이 다 사라집니다. 어느 개선장군도 부럽지 않습니다. “내가 이겼다!” 합니다.
근래는 날마다 죽는 공부를 합니다. “머지않아서 죽는 날이 올 터인데” 하고 자주자주 생각합니다. 별로 싫은 생각도 무서운 생각도 아직은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별로 애끓는 느낌도 아니지만, 반드시 생각나는 것이 그들입니다. “이 골목에서 내가 슬쩍 없어지는 날, 그들은 어쩔까? 별로 놀라지도 않을 것이요, 곧 잊어버리겠지” 자문자답을 하며 아침에 골목길을 나가고 저녁에 또 그 길을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잊어도 나는 그들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함석헌 저,《함석헌 저작집 세트》, 한길사, 2009.
-「모산야우」(제8권『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