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편
윌리엄 셰익스피어 희곡 '리처드 2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현명한 사람은 세상 눈(snow) 가는 모든 곳에서 행복할 수 있다."
가진 것도 지킬 것도 없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비어있기 때문에 두루 사용할 수 있고, 사심 없이 담겨지고 또 비워지기 때문이다. 그릇은 비워져야 쓸모가 있다. 어느 곳인들 자기 자리 아닌 곳이 있겠는가.
함석헌은 이것을 씨알의 둥근 형태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동그랗기 때문에 씨알은 한 점으로 섭니다. 보통은 넓적하고 땅에 닿는 면적이 넓어야 안전할 것 같은데 씨알은 넓은 대지 위에 설 자리가 오직 한 점, 엄정한 의미에서 기하학적인 한 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씨알은 사실은 어디 가도 설 곳이 있습니다. 불안정이 안정이 됐고 가난함이 도리어 넉넉함이 됐습니다. 한 점으로 서는 씨알은 간 곳마다 설 자리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 가도 제 자리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정말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 씨알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디 가서도 설 자리를 요구하는 씨알이 아닙니다. 떠밀면 얼마든지 밀려갑니다. 내 자리라 주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대신 어디 가도 반드시 한 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설 자리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씨알에는 뺏을 수 없는 자리가 있습니다. 한 점만큼이라도 제자리를 요구하는 순간 벌써 씨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버리고 무욕의 씨알에 돌아갈 때 정말 사람 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지구와 겨자씨 알이 한 점에서 입을 맞추는 순간 새 생명이 일어나듯이 씨알이 나라와 한 점에서 만나는 자리에서 역사적 창조가 생겨납니다.
함석헌 저,《함석헌 저작집 세트》, 한길사, 2009.
-「씨알의 설 자리」(제2권 『인간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