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양자택일의 연속
[주의] 90년대생 30대 미혼 여성이 주변 유부녀들을 보면서 느낀 주관입니다. 본인의 선택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계신 분들은 이 창을 닫아주세요. 기혼자로서 불쾌할 여지가 다분합니다.
최근 우연히 내 눈에 띈 '세대별 결혼 소멸' 통계 지표 값은 꽤나 서늘했다. 1988년생 남성의 미혼율이 이미 52.6%를 기록했다는 수치는, 이제 비혼이 소수의 유난스러운 선택이 아닌 거대한 시대적 표준(Normal)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서른 후반 남자 두 명 중 한 명은 나와 같은 '미혼'인 셈이다. 데이터는 분명 내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이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내 현실의 좌표는 온통 '유부'들의 영토에 포위되어 있다.
유부녀 회사 동료들은 자기 아이의 영상을 보여 주고는 하는데, 아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보고 있으면 참 사랑스럽고 귀엽다. 보면서 미소를 지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선 자꾸만 차가운 질문이 고개를 든다. 그녀들은 저 아이를 얻고, 무엇을 기꺼이 내어주었는가.
오랜만에 만난 지인의 얼굴에서 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충격을 받았다. 내가 기억하던 그녀는 필드에서 누구보다 날카로운 감각을 뽐내던, 생기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앞에 앉은 그녀는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푸석함을 입고 있었다.
빛을 잃은 눈가, 생존을 위해 대충 질러 묶은 머리카락, 그리고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특유의 피로감. 그것은 며칠 밤을 새운 직장인의 일시적인 피로와는 결이 달랐다. 세포 하나하나가 양육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갈려 나간 듯한, 이른바 '생물학적 소멸'의 흔적이었다.
과학적으로도 아이를 낳은 여성의 텔로미어(세포 수명을 결정하는 부위)는 미혼 여성보다 훨씬 짧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수치상으로는 무려 11년의 노화와 맞먹는 대가다. 그녀들은 자신의 젊음을 쪼개 아이라는 존재를 연장시키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누군가는 이를 숭고한 희생이라 칭송하겠지만, 자기애가 확실하고 스트레스에 민감한 내 시선에는 그것이 '나'라는 유일무이한 가치를 팔아 불확실한 미래에 올인하는 고위험 투자처럼 보였다.
나를 더 망설이게 만드는 건 이 거대한 헌신의 보상이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기혼 남성 두 명 중 한 명은 평생 한 번 이상의 외도를 경험한다고 한다. 아내가 자신의 젊음과 미모, 그리고 개인의 자아를 포기하며 가정을 지키는 그 숭고한 시간 동안, 어떤 남편들은 그 헌신 때문에 '여자'로서의 매력을 잃어버린 아내를 뒤로하고 바깥의 생기를 찾아 눈을 돌린다.
나쁜 생각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비극적인 메커니즘을 투명하게 관찰해버렸다. 아내의 사랑은 가족을 향한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변해가는데 남편은 여전히 남녀 간의 짜릿한 긴장감을 그리워할 때 발생하는 그 치명적인 비대칭.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과는 배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리스크. 50%의 확률로 내 인생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도박에 나는 차마 내 젊음과 멘탈을 베팅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애는 낳더라도 내가 직접 키워야 한다면 못 할 것 같다"는 나의 솔직한 심경은 이기심보다는 '자기객관화'에 가깝다. 나는 새벽의 작은 소음에도 잠에서 깨는 예민한 사람이고, 시원한 음료 한 잔을 마시며 나만의 세계에 침잠해야 비로소 숨을 쉬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나를 지우고 타인의 삶을 위해 24시간 대기조로 산다는 것, 그것은 나라는 우주의 멸망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를 '젊은 고독'이라 부르며 나중에 후회할 거라 겁을 주지만,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 "나를 잃어가며 얻는 든든함이, 정말 내 젊음보다 가치 있는가? 그 든든함은 과연 영원한가?"라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비혼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유부녀 지인들은 행복해 보이기도 하니까. 아이의 웃음소리 하나에 그 모든 고생을 잊는다는 그들의 말이 거짓은 아닐 테니까. 나 또한 지독하게 외로운 어느 밤에는, 젊음을 조금 잃더라도 내 편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유혹에 흔들리기도 한다.
다만, 지금 내 눈에 비친 세상은 '젊음을 지키는 고독'이 '나를 잃어버리는 헌신'보다 훨씬 더 안전한 투자처처럼 보일 뿐이다. 누군가는 내 글을 보고 차갑다거나 인생을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공정 거래에 섣불리 서명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생기 있는 내 피부와,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나'로서의 자아를 지키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10년 뒤의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가 나 자신을 배신할 확률이 0%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시원한 커피 한 잔의 주권을 누리고 싶다. 정답이 없는 이 길 위에서 나는 그저 오늘 하루의 나를 부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