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전지로 움직이는 존재의 비애

by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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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먼저 읽는다. 정확히는 내 안의 세로토닌 수치가 기상청 일조량 데이터와 동기화되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이것은 마케터로서 가지는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실제 내 신체가 매년 겨울마다 겪어내는 지독한 ‘성능 저하’와 ‘데이터 오류’의 기록이기도 하다.


햇볕이 쨍쨍한 여름의 나는 과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친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지는 게 괴롭지 않고, 퇴근 후에도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의욕이 충분하다. 아이디어가 샘솟고 사람들과 섞여 에너지를 발산하는 일이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그때 나는 그게 내 고유의 능력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 내면의 힘이라기보다 여름에 태어난 내가 외부의 태양으로부터 무상으로 공급받던 과분한 ‘에너지 보조금’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겨울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겨울이 오고 해가 짧아지자마자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지능이나 업무 능력의 문제는 아니다. 여전히 내 머리는 빨리 돌아가고, 맡은 일은 열심히 처리한다. 지표를 분석하고 다음 분기 캠페인을 기획하는 동안 나는 충분히 유능한 사회인이다. 다만 정서적인 에너지의 근원인 ‘연료’가 바닥을 드러낼 뿐이다. 머리는 고사양인데 배터리는 저사양인 하드웨어적 불일치. 여기서 나의 겨울 우울은 시작된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과학의 영역이다. 우리 뇌 속에는 '생체 시계'라 불리는 시교차 상핵(SCN)이 존재하는데, 이 장치는 망막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양에 따라 하루의 리듬을 결정한다. 겨울철 일조량이 줄어들면 뇌는 낮을 밤으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행복과 의욕을 담당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합성은 급감하고 밤의 호르몬인 '멜라토닌'은 때를 가리지 않고 분비된다. 낮에도 뇌가 밤이라고 착각하는 상태, 즉 생물학적 동면 모드에 진입하는 것이다. 일조량이 적은 북유럽 국가에서 계절성 정동장애(SAD)를 흔하게 겪는 것처럼 빛에 예민한 '태양광 로봇'인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환경적 제약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관점을 하나 더해보자면 명리학적으로도 나는 여름의 기운을 품고 태어난 존재다. 여름에 태어난 사람에게 태양의 빛과 열기는 익숙한 기본 사양이다. 하지만 겨울이라는 차갑고 축축한 기운(水)이 세상을 덮으면 여름의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 내면의 열기를 과다하게 소모하게 된다. 과학이 말하는 세로토닌의 부족은, 명리학적으로 보면 내 안의 화(火) 기운이 겨울의 냉기에 부딪혀 기화되어 버리는 과정과 닮아 있다.


오후 5시만 되어도 창밖이 어둑해지면, 본능적으로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어둠이 내린 길 위에서 나는 유독 취약해진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주차장으로 도망치듯 향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전원이 꺼지기 직전 베이스캠프를 찾아가는 태양광 로봇이 된 것만 같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환경 변수에 따라 셔터가 내려가 버리는 것이다. 머리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지만 몸은 이미 어둠을 피해 동굴로 숨어들어야 한다고 경고음을 울린다. 어둠은 나에게 단순히 밤이 아니라 내 존재를 지탱하던 시스템의 전력 차단과 같다.


이런 시기에는 사람에 대한 방어 기제도 약해지기 마련이다. 최근 3개월 정도 만난 사람과 헤어지고 2개월째 앓고 있는 것도 사실 내 기질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내 이성은 그 사람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진작에 내렸다. 심지어 사귀는 동안에도 데이터는 명확했다. "이 관계는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정서가 가장 메말라 있던 겨울의 한복판, 그가 내비친 짧은 온기는 나에게 꽤 강력한 보조 배터리였던 모양이다.


신경과학적으로 보면 세로토닌의 결핍은 감정을 조절하고 충동을 억제하는 '전두엽'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약화시킨다. 이성적인 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흐릿해지면 뇌의 공포와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가 주도권을 쥔다. 이 시기의 나는 합리적인 사회인이 아니라 오로지 온기만을 쫓는 연약한 유기체에 불과해진다. 사귀는 내내 이성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핍된 뇌는 당장의 가짜 햇살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세로토닌이 충만했다면 가볍게 넘겼을 상실이, 결핍의 계절에는 치명적인 시스템 오류로 다가온다. 이것은 미련이라기보다 빛이 부족한 계절을 지나는 생물학적, 그리고 명리학적인 후유증에 가깝다.


남들은 그 잠깐 만나고 왜 이렇게 오래 힘들어하느냐고 묻지만 나는 이제 담담하게 인정한다. 내 안에 빛이 없으니 밖에서 빌려온 아주 작은 빛조차도 너무 크게 느껴졌던 것뿐이라고. 그 인공적인 조명이 꺼진 뒤 찾아온 암흑이 유독 길고 지독한 건 내가 유난스러워서가 아니라 내 안의 화학 물질들이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명리학적으로도 차가운 겨울의 물 기운을 견디기 위해 잠시 빌려 썼던 땔감이 다 타버린 뒤의 한기일 뿐이다.


다행히 요즘은 퇴근길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 문을 나설 때 이미 완벽한 암전이었는데 이제는 차에 올라탔을 때 아직 지지 않은 해가 앞 유리에 희미하게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사소한 변화에 마음이 아주 조금 편안해진다. 눈을 통해 들어온 빛이 다시 뇌의 시교차 상핵을 자극하고 멈춰있던 세로토닌 공장이 재가동을 준비하기 시작하면 내 안의 시스템도 서서히 정상 궤도로 복구될 것이다. 5분, 10분씩 길어지는 낮의 길이를 보며 내 안의 에너지도 조금씩 복구되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여전히 일조량에 일희일비하는 연약한 존재지만 이제는 조급해하지 않으려 한다. 비타민 D를 챙겨 먹고 햇살이 좋은 점심시간엔 잠시라도 밖을 거닐며 다시 내 정수리 위로 해가 높게 솟을 날을 기다린다. 계절이 바뀌고 내 안의 세로토닌이 다시 가득 차오르면 이 지독한 이별의 잔상도 퇴근길의 막막함도 더 연하게 희석되겠지.


화학적 신호와 우주적 절기가 정서의 색깔을 결정하는 이 가혹한 알고리즘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다시 올 태양을 믿는 것뿐이다. 태양광으로 움직이는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또 한 번의 겨울을 지나가고 있다. 이제 곧 내 퇴근길은 다시 눈부시게 환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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