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의 시대를 지나, 무형으로

015B 이후 30년,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과 되찾아야 할 것들

by 불멍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잘 살아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늘어난 것은 소유였고 줄어든 것은 마음이었다. 가진 것의 목록은 많아졌지만, 정작 삶을 붙잡아줄 기반은 옅어졌다. 해마다 우울과 불면을 호소하는 사람은 늘고, 정신과 병원도 많아진다. 겉으로는 바쁘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은 점점 외로워지고 공허해진다.


1. 내 삶의 무형의 뿌리

대학교 진학으로 서울에 올라오며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에 컸던 내게 할머니는 제2의 엄마였다.엄마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결코 덜하지 않은 사랑. 돌아보면 그 사랑은 언제나 ‘정성’이라는 이름을 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새 밥을 지어주시고, 내가 돌아올 시간을 가늠해 저녁상을 준비하던 분. 기다림에 맞춰 음식을 차린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닌데도 할머니는 그 수고를 그냥 당연한 일처럼 해내셨다. 그게 얼마나 큰 노동이었는지는,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새벽마다 기도하던 낮은 목소리, 차에 치인 강아지를 데려와 회복할 때까지 돌보던 시간, 장독대 항아리에 빠진 새를 씻기고 날려보내던 손길. 살아 있는 것은 끝까지 돌봐야 한다는 태도, 조건 없이 품고, 집착 없이 보내는 마음. 그게 내가 물려받은 유산의 가장 깊은 뿌리였다.


2. 사회의 가치 이동

언제부턴가 우리는 무형의 가치보다 유형의 가치를 먼저 이야기하게 되었다. 자녀 입시에서 시작된 대화가 결혼 조건과 상속 이야기로 이어지고, 사람됨보다 집의 위치가 먼저 언급되는 시대. 사실 이런 흐름은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다. 1992년 015B의 〈수필과 자동차〉에도 이렇게 노래했다.

“이젠 그 사람의 자동차가 무엇인지, 어느 곳에 사는지가 더 궁금하고.”

감정에서 조건으로, 사람에서 배경으로. 가치는 그렇게 이동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3. “너는 다 가졌으니까 그런 말하지”

무형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이다. “너는 가진 게 많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각자 다른 조건과 출발선, 감당해온 무게가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는건 나 또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고, 단단해 보이던 것들도 한순간에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뒤에 남는 것이 결국 태도였고, 관계였고, 다시 일어서게 만든 뿌리였다. 제일 힘든 상황에서 버티게 해준 기반은 유형의 가치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준 무형의 가치였다.


4.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유형의 가치는 늘어날수록 불안을 동반한다. 잃을까 봐, 뒤처질까 봐, 비교될까 봐. 하지만 무형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누가 빼앗아갈 수 없고, 함께 늙어갈 수 있으며, 삶이 무너질 때 다시 일어설 힘이 된다. 집 한 채를 남기는 것보다 사람이 무너지지 않는 방식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게 더 중요한 유산 아닐까 한다. 문득, 할머니가 그립다. 그립다는 감정 또한 내가 물려받은 무형의 유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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