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비교하지 않고 완주하기

by 불멍

흔히 위로의 말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지금은 힘들어도 조금만 버티면 자연스럽게 좋아질 거라는 말. 그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문장이 주는 위로에는 어딘가 빠진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상처가 옅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상황이 나아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대부분은 그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했는지의 결과일 뿐이다. 시간을 흘려보냈느냐, 아니면 시간을 써냈느냐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종종 막연한 기대에 머문다. 가만히 두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겠지.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다. 공부든 일이든, 관계든 삶의 방향이든, 움직이지 않는 선택지는 결국 선택되지 않는다. 학생 시절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절대적인 학업량이 필요하다. 이해가 되든 안 되든, 머리에 남든 남지 않든, 책상 앞에 앉아 보낸 시간이 쌓여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사회에 나와서도 다르지 않다. 사회초년생에게 필요한 것은 요령보다도 업무의 총량이다. 실수와 반복, 지루함과 좌절까지 포함한 그 시간을 견뎌낸 뒤에야 비로소 다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종종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떠올린다. 자만한 토끼가 잠든 사이, 느리지만 성실한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긴다는 이야기. 교훈은 분명하다. 꾸준함의 힘. 하지만 현실은 그 이야기만큼 단순하지 않다. 거북이가 아무리 노력해서 가장 빠른 거북이가 된다 한들, 토끼를 이기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매번 토끼가 잠이 든다는 보장도 없다.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승부의 결과가 아니라 나의 속도다. 사람마다 타고난 조건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 차이를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빠르게 달릴 수 있고, 누군가는 처음부터 속도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가 아닌 완주가 중요한 이유는, 결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끝까지 가는 사람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열심히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초반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당히 놀고, 적당히 즐기며 사는 사람과 매일 비슷한 하루를 꾸준히 쌓아가는 사람. 오히려 전자가 더 여유 있어 보이고, 삶을 잘 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때는 노력하는 쪽이 괜히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 너무 이른 성공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착각 속에 있던 시간이 있었다. 만 31세에 교수 발령을 받았을 때, 그때의 나는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사람처럼 느꼈다. 내가 바라던 자리에 너무 이르게 도착해버린 탓인지, 더 이상 이렇게까지 달려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묘한 안도감이 생겼다. 이미 얻은 것이 있으니, 굳이 속도를 유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나보다 훨씬 늦게 발령을 받았지만, 묵묵히 자기 속도로 연구하고 진료해온 친구들.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시간을 쌓아왔고, 어느 순간 그 축적은 분명한 성과의 차이로 나타났다. 출발선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얼마나 오래, 얼마나 흔들리지 않고 걸어왔는가라는 사실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아마도 끝까지 완주하는 토끼일 것이다. 빠르면서도 멈추지 않는 존재. 하지만 의외로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많은 토끼들은 중간에 지치거나 방향을 잃고, 많은 거북이들은 느리지만 끝까지 걷는다. 그래서 남이 나보다 빨리 달린다고 해서 초조할 필요는 없다. 속도는 비교의 대상이 되기 쉽지만,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다. 남의 속도를 기준으로 삼는 순간, 내 속도와 방향은 쉽게 깨진다.

흔히 말하는 ‘10만 시간의 법칙’은 숫자 자체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어떤 분야든 일정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시간의 투자와 몰입이 필요하다는 사실. 요령이나 재능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고, 깊이로 들어갈 수도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시간을 어떻게 다루어왔는가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위로의 말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거야”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야”라는 말로.

지금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없어도 괜찮다. 오늘의 노력이 내일 바로 결과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천천히 가도, 내 속도로 꾸준히 가는 사람은 결국 도착한다. 삶은 결국 가장 빠른 사람보다, 끝까지 걸어온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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