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 사이, 어른과 어른 사이

꿈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어른이 되는 것

by 불멍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셋째 아이, 막내와 처음으로 함께 술을 마셨다. 2026년 1월 1일부터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 2007년생, 민법상 성인이 되었다. 어렸을 때의 모습이 아직도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막내는 스무 살이 되었다.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은 달력보다 아이의 성장으로 가장 분명하게 실감된다. 치열했던 사춘기를 지나 스무 살까지, 큰 탈 없이 무사히 자라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앞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무엇을 해보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묘하게도 술잔을 사이에 두었을 때 훨씬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보다 어른과 어른 사이의 대화라는 생각과 함께, 어느새 아이가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생경하게 느껴졌다.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오랜 시간 유일한 목표였던 아이들은, 막상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길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전력 질주하다가, 그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 더 이상 달려갈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스스로의 지적 호기심과 내적 동기에 의해 공부해 온 학생들과, 사교육의 흐름에 떠밀리듯 공부해 온 학생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물론 모든 경우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비학군지에서 자기 힘으로 공부해 대학에 온 학생들이 대학에 와서도 스스로 길을 찾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정시는 가장 공정한 제도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수시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적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태도, 호기심, 성장의 방향성이 실제 대학 생활에서는 훨씬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사실 진짜 공부는 대학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까지의 공부가 ‘수학할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공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면, 대학에서의 공부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스스로 고민해 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사실 10대의 나이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명확히 아는 일은 쉽지 않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기록되는 장래 희망 역시 아이 자신의 희망이라기보다 부모의 기대가 반영된 경우가 더 많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한 의대 교수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는 나이에 “의사가 되고 싶다”는 판단을 내리고 의대에 지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미국에서는 의대가 대학원 과정이기 때문에, 충분한 고민과 진로 탐색을 거친 뒤에야 결정을 내린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 말을 들으며 우리 사회는 어쩌면 ‘꿈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경험하고 부딪히며 진로를 찾아가기 전부터, 너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미리 명확히 정해두어야만 올바른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꿈과 진로는 대부분 살아보는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에서 자율전공이 점점 늘어나는 흐름은 반길 만한 변화다. 다만 그 자율전공 안에서도 선택이 불가능한 전문직 직업군을 굳이 학부 과정에 고정시켜 두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한 번쯤 더 고민해볼 문제로 보인다.


아이와의 대화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작해, 결국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목표를 중심으로 살아온 나와, 관계와 주변을 더 의식하는 아이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나의 말이 내 가치관을 주입하는 조언으로 들리지 않도록, 아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두려 애쓴다. 이제는 이 아이의 삶이, 나의 기대보다 아이 자신의 속도로 설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릴 때는 바로 옆에서 돌보는 일이 부모의 역할이었다면, 자라면서부터는 서서히 관계를 놓아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성인이 되면 독립할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서는 연습. 부모가 되는 일 역시, 끝없이 연습이 필요한 일임을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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