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삶
대치동의 시간은 아이들의 시험 일정과 함께 움직인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수시와 논술, 정시 지원까지. 1년의 일정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일정에 맞춰 아이들과 부모의 일상도 함께 조정된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대입을 향한 준비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밤 10시가 되면 학원가 앞 도로는 차들로 빽빽해지고, 건물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이 거리를 메운다. 이곳에서 많은 아이들의 목표는 비교적 단순하다. 좋은 대학, 좋은 학벌. 그 목표를 위해 부모의 시간과 돈, 정성이 고스란히 투입된다. 운 좋게 부모와 아이의 이인삼각이 잘 맞아떨어져 한 번에 원하는 대학에 진학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재수와 N수는 자연스럽게 다음 선택지로 이어진다. 어릴 때부터 학벌을 주입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목표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다시 수험생이 되는 삶을 스스로 감내한다.
“살다 보면 그깟 1~2년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이 문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40대 이후의 1~2년은 삶 전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무 살의 1년은 다르다. 하루하루 새로운 감각과 사고, 세계관이 형성되는 시기의 시간은 이후의 시간과 같은 무게로 환산될 수 없다. 아이가 스스로 원해서 다시 도전하는 재수와 삼수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남들이 다 하니까, 학벌이 중요하니까라는 이유만으로 반복되는 수험생활이라면, 그 시간은 과연 아이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남길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시험 중심의 선발 구조에 오래 익숙해져 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 역시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제도’였다. 시험은 능력을 가르는 가장 공정한 도구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신분 이동의 통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미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조차 이 제도의 병폐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과거제도가 학문과 인재를 왜곡한다고 반복해서 지적했다. 그는 시험이 사람의 됨됨이나 실제 역량을 온전히 평가하지 못하고, 암기와 문장 솜씨만을 강화한다고 보았다. 학문은 본래 삶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과거는 시험에 적합한 글쓰기 기술만을 양산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정약용의 이러한 비판은 오늘날의 입시를 떠올리게 한다. 시험은 공정한 제도처럼 보이지만,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시험이 목표가 되는 순간, 배움은 수단이 되고 삶은 뒤로 밀린다. 이미 200여 년 전에도 그는 시험이 인재를 기르는 제도가 아니라, 시험에 맞는 인간을 양산할 위험이 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의대 열풍은 좀처럼 식을 기미가 없다. 의대에 합격만 하면 큰 이변이 없는 한 의사면허를 취득하게 되고, 면허를 갖는 순간 비교적 배타적인 전문 권리가 주어진다. 해외 유학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추가로 큰 비용이 들 가능성도 적다. 위험 대비 수익을 따지면, 이보다 안정적인 선택은 드물다. 이 선택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 ‘합리성’이 거의 유일한 가치처럼 작동하는 구조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개인의 성향과 흥미, 적성은 쉽게 뒤로 밀린다. 눈앞에 보이는 안정된 길 앞에서, 자아실현은 종종 사치처럼 취급된다.
결국 이는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고 있는가의 문제다. 경제적 안정인가, 자아실현인가. 현실을 생각하면 경제적 안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아이에게 같은 답을 요구하는 사회는 건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과거제의 병폐를 이미 인식하고도 쉽게 고치지 못했던 조선처럼, 우리는 입시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구조 안에 머물러 있다. 시험은 필요하다. 그러나 시험이 삶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입시는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어야 하고, 대학은 인생의 결승선이 아니라 하나의 통과 지점이어야 한다.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피를 말리는 입시의 시대에서, 조선시대 과거제부터 반복되어 온 같은 질문이, AI 시대로 접어든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은 씁쓸하다. 제도는 여러 번 모습을 바꾸었지만, 시험 한 번으로 삶의 가치를 재단하려는 사고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백 년 동안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해온 구조를 떠올리면, 우리 사회의 입시 제도가 가까운 미래에 획기적으로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부모의 자리이다.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지만, 시험이 아이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한 걸음 물러서 지켜보는 선택. 어쩌면 그것이 지금 이 시대의 부모에게 허락된 가장 현실적인 책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