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음과 생존 사이
병원의 계절은 참 빨리 바뀐다. 일상이 멈춰버린 환자들의 사이를 비집고 계절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창밖의 나무는 어느새 잎을 틔우고, 다시 떨어뜨리기를 반복하지만, 병실 안의 시간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 누워 같은 천장을 바라보는 사이, 달력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한방병원에는 유독 오래된 시간이 머무는 환자들이 많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다. 더 이상 선택할 치료가 없어서, 혹은 급한 병은 지나갔지만 남은 증상들이 삶을 잠식하고 있어서다. 급성의 병이 아니라, 만성의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고령의 환자, 장기 환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안에는 각기 다른 인생의 무게가 겹겹이 쌓여 있다.
평균수명은 분명 늘어났다. 통계는 매년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건강수명은 그만큼 늘어났을까. 우리는 얼마나 오래 걷고,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인생 전체에서 침대에 누워 지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병실의 침대, 요양원의 침대, 집 안 거실에 놓인 간이 침대 위에서 보내는 그 시간들을 과연 ‘산다’고 부를 수 있을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의미의 무게가 점점 ‘생각하고 움직이는 상태’를 전제로 한 개념이라는 쪽에 기울게 된다. 생각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최소한 오늘을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삶을 살아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의식은 있지만 선택할 수 없고, 깨어 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시간은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생존과 삶의 경계는 어디쯤에 놓여 있을까.
“인생의 마지막은 누구나 장애인이 된다.”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다만 문제는 그 ‘마지막’이 언제 시작되느냐, 그리고 얼마나 길게 이어지느냐에 있다. 수명이 늘어난 사회에서는 그 마지막 구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치료는 생명을 연장했지만, 삶의 질까지 함께 끌어올렸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병실 곁에는 가족의 시간이 함께 놓여 있다. 과거에는 가족이 곁을 지키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레지던트때만 하더라도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간병을 하는 모습은 너무도 흔한 모습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자식들은 각자의 삶으로 흩어져 있고, 병실을 지키는 이들은 대부분 간병인이다. 누군가의 삶을 이어주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의 노동과 시간이 투입된다. 가족의 희생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희생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최근 들어 연명치료 거부 등록을 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다. 무조건적인 연장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끝을 원한다는 선택이다. 예전에는 생명을 붙드는 것이 최선의 효도이자 의료의 목표였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함께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선택 앞에서 의료진 역시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치료하고 있는가.
한방병원에 오는 많은 환자들은 완치를 기대하지 않는다.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덜 불편하고, 하루를 스스로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작은 바람 속에는 삶의 존엄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담겨 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스스로의 삶을 유지하는 시간. 누워 있는 시간이 아니라, 깨어 있는 시간에 대한 간절함이다.
어쩌면 의료의 역할은 더 오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절이 바뀌는 속도에 완전히 뒤처지지 않도록,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지켜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은 오늘도 병실을 오가는 나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