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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기술

반응하지 않는 용기

by 불멍

침묵은 흔히 약자의 선택으로 오해된다. 말하지 못해서, 대응할 힘이 없어서, 혹은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서 선택한 소극적 태도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지천명의 나이를 지나다보니 침묵은 오히려 가장 고난도의 기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손자병법은 흔히 싸움의 기술로 읽히지만, 정작 그 핵심에는 싸우지 않는 법이 놓여 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은 최상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다(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전쟁의 전략서에서조차 가장 높은 경지는 충돌을 피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는 사실은 오래 생각해볼 만하다. 충돌은 언제나 비용이 크고, 감정이 개입된 싸움은 대개 불필요한 소모로 끝나기 때문이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전쟁이 아닌 전투 속에 놓인다. 회의실에서, 조직 안에서, 인간관계의 틈에서 누군가의 말이 나를 겨냥한다. 공격인지 오해인지 애매한 말 한마디, 의도를 알 수 없는 시선, 불공정하게 느껴지는 결정들. 그 순간 질문은 늘 같다.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물러설 것인가.


젊은 시절의 나는 싸우는 쪽에 가까웠다. 부당하다고 느끼면 즉각 반응했고, 논쟁했다. 그것이 옳은 태도라고 믿었다. 침묵은 패배처럼 느껴졌고, 물러남은 자기부정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나는 알게 되었다. 모든 반응이 용기는 아니며, 모든 침묵이 패배는 아니라는 것을.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싸우지 않음은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도, 스스로를 낮추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상황을 읽고, 힘의 흐름을 계산하고, 감정의 소모를 줄이는 고도의 선택이다.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감정을 접고, 판 전체를 보는 능력에 가깝다.


사회생활에서의 분쟁도 다르지 않다. 갈등의 상당수는 사실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에서 시작된다. 누가 옳은지보다, 누가 밀렸는지가 중요해지는 순간 싸움은 커진다. 이때 맞서 싸우는 것은 순간의 통쾌함을 줄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피로만 남긴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내 인생에 무엇을 남기는가?” “지금의 반응이 나를 지키는가, 아니면 소모시키는가?” 이 질문 앞에서 많은 싸움은 스스로 힘을 잃는다.


침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말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능력에 가깝다. 지금의 말이 관계를 회복시키는지, 아니면 감정의 불씨만 키우는지를 가늠한 뒤 의도적으로 한 박자를 늦추는 일이다.


손자는 지형을 읽고, 상대를 알고, 때를 기다리라고 했다. 현대의 삶에서는 그것이 곧 관계의 거리 조절, 말의 선택, 침묵의 활용으로 바뀐다. 지금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유리해지는 순간, 지금은 한 발 물러섬으로써 판을 유지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침묵의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우리는 모든 싸움에 참여할 만큼의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하루의 체력은 한정되어 있고, 감정의 회복력 또한 나이가 들수록 줄어든다. 중요하지 않은 말다툼에 힘을 쓰다 보면 정작 지켜야 할 일, 집중해야 할 순간을 놓치게 된다. 놀랍게도 많은 갈등은 내가 침묵을 선택하는 순간 힘을 잃는다. 상대의 공격은 반응을 먹고 자라지만, 반응이 없을 때 스스로 방향을 잃는다.


물론 침묵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말해야 할 때가 있고,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할 순간도 있다. 그러나 그 말 역시 감정의 즉흥성이 아니라 판단의 결과일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침묵은 물러섬이 아니라 거리 조절이다.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아직 이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켜낸 오늘, 싸우지 않음으로써 남겨둔 에너지. 그 축적이 결국 나를 더 오래, 더 단단하게 버틸수 있게 만들어준다.


결국, 침묵의 기술은 상대를 이기는 법이 아니라 나 자신을 소모시키지 않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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