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시간
아빠가 근면과 성실의 표본이었다면, 엄마는 자유분방함의 표본이었다. 1940년대에 태어나 그 시절 드물게 대학교육을 받고 교단에 서셨던 엄마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다. 사고는 늘 열려 있었고, 99년생 손녀와도 막힘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매 순간 유연했다. 세대를 건너뛰는 그 자유로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학교에 빠짐없이 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던 내게, 엄마는 가끔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오늘 하루쯤 학교 쉬고, 엄마랑 시장 가서 놀까?”
그때의 나는 왜 그 제안을 잘못된 선택이라 여겼을까. 하루쯤 쉬고 하루쯤 놀아도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내게는 엄마와의 시간보다 개근이 더 중요했다.
나는 엄마에게 좋은 딸은 아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내내 공부하느라 바빴고, 전공의 시절에도 늘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의 시간을 미뤘다. 전공의를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엄마는 어린 손주 둘을 데리고 나를 따라오셨다. 서른이 넘은 딸 대신 아이를 키워주시고,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짧은 영어로 갓 돌 지난 손주를 데리고 데이케어 센터를 오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교수 발령을 받은 뒤에도 나는 늘 바빴고, 엄마는 늘 곁에서 기꺼이 나를, 그리고 손주들을 챙겨주셨다. 엄마는 단 한 번도 힘들다, 아프다는 말을 하신 적이 없었다. 늘 즐겁고, 재미있고, 내 모든 고민을 웃음으로 덜어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가 아프다고 하셨다. 동네 내과에서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고 하셨다. 처음이었다. 엄마가 아파서, 내가 있는 병원으로 가서 검사 좀 받아봐도 되겠느냐고 하신 것은. 가벼운 마음으로 입원 후 진행한 검사 결과는 간 전이가 된 대장암 4기였다. 청천벽력이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몰랐을까. 동료 소화기내과 교수는 항암치료를 권했고,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떨어지셨고, 잘 드시지도 못하셨다. 그럼에도 끝까지 유쾌함을 놓지 않으셨다. 나는 믿었다. 긍정적이고 삶의 의지가 강한 우리 엄마는 그깟 항암 정도는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해보고 싶었다.
첫 항암 후, 엄마는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곧 나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2주 뒤로 예정되어 있던 두 번째 항암을 기다려 주시지는 않았다. 엄마의 병상에서, 엄마의 숨이 끊어지던 순간. 심장이 멎는 것을 알리는 기계음이 울렸고, 그 소리와 함께 세상이 갑자기 꺼진 것처럼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감정이,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다. 친구와 웃으며 밥을 먹다가도, 혼자 운전을 하다가도 불현듯 그 순간이 떠오르면 나는 그대로 무너져버린다.
모든 선택에는 늘 후회가 남는다. 차라리 항암을 하지 않았더라면 덜 괴로워하시고 하루라도 더 함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왜 조금 더 시간을 내어 엄마 곁에 머물지 못했을까. 싫다고 하셔도, 그때마다 미리미리 검진을 받게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되돌릴 수 없는 선택들, 그때의 최선이었을 뿐인 판단들. 후회는 남지만, 그 또한 사랑이었음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도 엄마는 종종 내 꿈에 나타난다. 예전과 다르지 않게 늘 밝은 모습으로, 아니, 기억 속보다 더 젊어지신 얼굴로. 말을 하지 않아도 안다.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그냥 함께 있다는 느낌. 보이지 않을 뿐, 시간과 공간의 어딘가에서 엄마는 여전히 나와 나란히 걷고 있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
이 글을 쓰기까지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차마 꺼내 쓰지 못했던 이야기들, 말로 글로 옮기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던 기억들. 이제야 겨우, 한 발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