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음이 나를 살린다
미국에 살던 시절, 아이들과 종종 National Air and Space Museum (국립우주항공박물관) 에 가곤 했다. 우주인이 꿈이었던 막내는 그곳의 모든 것에 열광했다. 전시된 비행기와 헬멧, 사진 한 장 한 장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운이 좋은 날에는 실제 우주인이 자신이 쓴 책 앞에 앉아 사인을 해주는 행사도 열렸다. 아이는 우주인 책을 사고, 옷을 사고, 각종 체험을 하며 마치 이미 우주인이 된 사람처럼 의기양양하게 박물관을 나서곤 했다.
그 많은 전시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우주의 탄생을 다룬 영상이었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지구가 얼마나 작은 별인지, 그리고 그 작은 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또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영상. 화면 속에서 은하가 겹겹이 펼쳐질수록, 내가 붙들고 있던 많은 것들이 서서히 힘을 잃는 느낌이 들었다. 공룡이 지구의 주인이던 시절도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그에 비하면 고작 찰나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해가는 우주 속에서 우리는 잠시 들렀다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우주 전체로 보면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 잊고 살던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지금 내가 그렇게까지 집착하고 불안해하던 것들이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 거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여기 와 있는 걸까. 의외로 답은 단순할지도 모른다. 내가 점유한 이 작은 자리에서 다른 존재들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 인간이던, 아직 알지 못하는 우주의 다른 생명체던, 혹은 이 행성 자체이던. 우주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경험은 나를 무력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가볍게 한다. 내가 짊어져야 할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조금 더 편안하고 온화하게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 그 영상이 좋았던 이유는 나를 작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삶을 덜 무겁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섬유근통과 같은 만성 통증을 겪는 환자들을 보다 보면, 병 자체보다 삶을 과도하게 짊어진 상태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통증, 불면, 소화불량, 만성 피로와 같은 증상들 뒤에는 대개 ‘놓지 못함’이 있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 아직 오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믿는 역할들. 몸은 그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낸다. 회복되지 못한 몸은 통증을 기억하고, 염증 반응을 반복하며, 결국 치료해도 쉽게 호전되지 않는 만성적인 증상으로 이어진다. 몸은 늘 현재에 있지만, 마음이 과거와 미래에 붙잡혀 있을 때 그 간극은 통증이라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철학자들이 말하던 ‘무상(無常)’이나 ‘비움’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를 회복하는 방법에 가깝다. 노자는 그릇이 그릇으로 쓰일 수 있는 이유는 단단한 벽이 아니라, 그 안의 빈 공간 덕분이라고 했다. 집이 집으로 기능하는 것도 기둥과 벽이 아니라,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비어 있음’ 덕분이라는 이야기다. 삶도 다르지 않다. 일정이 가득 차 있고, 역할이 과도하게 겹쳐 있고, 감정이 쉴 틈 없이 밀려들 때, 몸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반대로 조금 비워내고, 덜 쥐고, 덜 책임지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몸은 다시 숨을 돌릴 공간을 얻는다. 우주의 시간 앞에서 인간의 삶을 상대화해보는 일, 내가 붙들고 있는 것들 가운데 무엇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다시 묻고 삶을 단순화해보는 연습. 그런 과정 속에서 몸은 조금씩 긴장을 풀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가 우주를 바라보며 느끼는 평온함은, 그 광대함 때문이 아니라 나를 절대적인 중심에서 내려놓게 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것 같은 착각, 잘못되면 모두 내 탓일 것 같은 불안에서 잠시 벗어나는 순간. 그 짧은 이완이 몸과 마음에는 생각보다 큰 회복으로 남는다. 그래서 힘들 때면 나는 광활한 우주를 떠올린다. 삶을 대충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너무 무겁게 살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우리는 모두 이 거대한 우주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통증과 불안은 조금 가벼워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