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이든다는 것
누구나 감정의 안전지대가 필요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엄마에게 짜증을 내는 이유가, 엄마가 만만해서라기 보다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미처 알지 못했다. 하루를 마치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쏟아내던 아이의 투정과 짜증을, 나는 그저 버릇없는 행동쯤으로 여기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아이는 가장 안전한 자리에서 하루 동안 참고 견뎠던 감정을 내려놓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이들의 감정을 훨씬 넉넉하게 품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인간은 위험한 곳에서는 감정을 숨기고, 안전하다고 믿는 곳에서야 비로소 무장을 푼다. 아이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은 지켜질 수 있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감정의 표현은 살아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조금 더 봐 달라”는, 가장 솔직하고 서툰 요청이었을 것이다.
감정의 안전지대가 없는 사람은 불안을 축적한다. 불안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하루를 버티며 소모한 작은 감정들이 회수되지 못한 채 쌓일 때, 불안은 성격이 아니라 구조가 된다. 어린 시절 충분한 감정의 안전지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회복까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가 울음을 삼킨 채 방문을 닫듯, 감정은 그렇게 안으로 쌓인다. 흐르지 못한 것은 막히고, 막힌 것은 결국 탈이 난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기일즉체(氣逸則滯)’라고 표현한다. 기가 한곳에 머물러 흐르지 못하면 결국 정체된다는 뜻이다. 쉬지 못한 감정은 언젠가 몸이나 행동으로 돌아오고,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이나 질병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주변을 향해 감정을 쏟아내는 어르신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누군가는 무례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피곤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장면은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울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한 사람의 초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이상 감정을 내려놓을 안전한 공간이 없고, 받아줄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서 감정은 가장 통제되지 않은 방식으로 밖으로 튀어나온다. 아이가 집에서 떼를 쓰듯, 어쩌면 그분들 역시 마지막으로 남은 공간에서 감정을 흘려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슷한 장면은 일상 곳곳에서 반복된다. 이유 없이 날 선 말을 던지고, 사소한 일에도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 그들의 행동은 분명 타인을 다치게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감정을 안전하게 내려놓을 자리를 잃은 오래된 불안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감정을 다룰 줄 모르면, 감정은 결국 타인을 향해 흩어진다. 조절되지 못한 분노와 공격성은 강함의 표현이 아니라, 감정의 피난처를 잃은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마주할 때 가능하면 반응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의 말에 즉각적으로 맞서기보다, 내 안의 중심을 먼저 지키는 쪽을 택한다. 이해한다고 해서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고, 거리를 둔다고 해서 냉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감정이 감정을 자극하는 순간, 흐르지 못한 감정은 또 다른 막힘을 만들 뿐이다. 침묵과 거리는 때로 가장 안전한 선택이다. 그것은 상대를 평가하거나 단죄하려는 방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에 가깝다.
나이가 들고 사회화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감정의 안전지대를 사람에게서 찾는 일에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부모님은 연로해지고, 가족 역시 각자의 삶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에게 무한히 내어주던 감정을,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거두어 들여야 하는 시기가 온다. 감정을 털어놓는 행위가 위로가 아니라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은, 어른이 되었다는 하나의 징표이기도 하다. 노자가 말한 “가득 채우려 하면 넘치고, 움켜쥐려 하면 잃는다”는 말처럼, 관계 역시 과하면 오히려 흐트러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에게 기대기보다 스스로 감정을 관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운동을 한다. 이 행위들은 모두 감정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말로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그 자체로 머물 수 있는 장소. 무언가를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애써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무위(無爲)’에 가까운 순간들이다. 외부 세계의 요구로부터 잠시 물러나 자기 자신과 단둘이 존재하는 시간이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만큼, 혼자 견딜 수 있는 내적 공간 역시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중요해진다는 말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자녀는 떠나고, 직장은 끝나며, 사회적 역할은 점점 줄어든다. 관계의 양이 줄어드는 대신, 관계의 질이 중요해지는 시기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고 말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시간의 결을 공유한 친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감정의 안전지대가 된다. 도가에서 말하는 “같이 있어도 소란스럽지 않은 사이”.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신뢰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스스로에게 마련해 준 안전지대일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때의 감정의 안전지대는 더욱 중요하다. 그 경험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스스로를 회복시키는 힘이 된다. 감정을 드러내는 자유와, 그 감정을 책임지는 성숙함은 함께 가야 한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감정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스스로 마련하는 일에 가깝다. 노자는 “자신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자신을 지키는 사람은 강하다”고 말했다. 감정을 다룰 줄 아는 힘은 보이지 않지만, 가장 단단한 힘이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아직 젊은 것 같은데,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어느새 중장년이 되어버렸다고. 하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연습의 문제이고, 학습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을 어디에 내려놓을지 알고, 스스로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일. 음극즉양(陰極則陽), 충분히 고요해질 수 있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가 드는 일은 자연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기술이다. 감정의 안전지대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어쩌면 그것이, 잘 나이 드는 일의 핵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