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 바깥의 배움
한의과대학에 입학하면 예과 1학년 때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과목이 있다. 원전(原典)수업이다. 수학과 과학을 공부해 이과 계열로 입학한 학생들에게는 다소 낯설고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수업이다. 한자로만 빽빽하게 쓰인 문장을 따라가며, 이미 오래전에 쓰인 사유를 이해해야 하는 시간. 요즘 학생들 중에는 이 과목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실용적이지 않다”, “임상에 바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들이 따라붙는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효율과 속도가 중시되는 시대에, 배움조차도 즉각적인 효용으로 평가받는다. 무엇을 배우느냐보다, 어디에 쓰이느냐가 먼저 생각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전을 배우고 역사를 배우는 일이 단순히 ‘쓸모 있는 지식’을 더하는 과정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배움의 방향을 정하는 일에 가깝다.
30여 년 전, 내가 갓 스무 살이었을 때도 원전 수업은 쉽지 않았다. 맹자의 문장을 통째로 외워야 했던 시험은 부담스러웠고,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양혜왕편』의 첫 문장은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왕께서 어찌하여 반드시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王曰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맹자의 시대에도 ‘리(利)’, 즉 이익은 중요한 문제였다. 진로를 선택하는 일, 삶의 방향을 정하는 일 역시 결국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지를 따지게 된다. 인간의 선택은 시대를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학부 시절, 동아리에서는 같이 소학을 읽었고 방학이면 친구들과 논어와 대학을 펼쳐 들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고, 꼭 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왠지, 그 글들을 읽어보고 싶었다. 그 공부들은 환자를 치료하는 기술과 직접 연결되지도 않았고, 당장의 성과나 보상과도 무관했다. 그럼에도 지금 돌아보면, 그때 읽었던 문장들이 이후의 진료와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진료실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병명이 아니라 사람이다. 증상은 같아 보여도, 그 증상을 안고 살아온 삶은 모두 다르다. 환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통증의 위치를 파악하거나 검사 수치를 해석하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습관을 갖고 살아왔는지를 함께 읽어내는 과정이다. 고전은 바로 그 ‘읽는 힘’을 기르는 훈련이었다.
원전을 배우는 일은 분명 느리다. 즉각적인 답을 주지 않고,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느린 읽기 속에서 우리는 사람을 단순화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인간을 효율의 단위로 쪼개지 않고,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를 익힌다. 그것은 시험 문제로 평가되기 어려운 능력이지만, 임상에서는 끝내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래서 나는 원전을 배우는 일이 비실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실용이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고전과 역사는 당장의 해답 대신, 오래 남는 질문을 준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시간이 지나, 환자 앞에 앉았을 때, 혹은 인생의 선택 앞에서 뜻밖의 방식으로 다시 작동한다.
시대는 변했고, 의료 환경과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며 흔들리는 지점, 갈등하는 이유, 이해받고 싶어 하는 마음의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고전을 배우는 일은 과거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오래된 현재형의 공부인지도 모른다. 원전 수업이 여전히 의미를 갖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