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현리 사람들
오봉수 이금열 전금산 강수근,
보통 농촌, 산촌은 토박이 중심으로 집성을 이루는데 석현리는 외지인도 많았고 각성(各性)도 많았다.
김범순과 김일문은 전라도 사람이다.
경상도 어디서 올라왔다는 깡아 아버지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장내복과 이현호는 충청도 사람이다.
물론 석현리도 집성이 있다.
작으나골 김씨와 돌고개 김씨와 고비골 이씨로 나뉘었고 리사무소가 있는 지게울에서 섞였다.
이들 문중 간에는 일정한 긴장이 있었는데 타동 사람들은 그 틈에 끼였다.
토박이들은 일도 부릴 겸 세도 늘릴 겸 이들을 품었는데 이장 뽑을 때는 배제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뺏기 싸움은 치열하다.
사람은 사람을 뜯어먹고 사는 동물이라서 그렇다.
경제학적으로는 잉여가치 때문이다.
예부터 소가 사람보다 값나갔던 건 그놈이 내는 잉여가치가 사람보다 컸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땅 많아야 부자지만 벼슬들은 백성이 많아야 부자다.
서울시장이 어깨 펴는 건 경기도지사 없을 때다.
세금 한 푼 안 낸 놈이라고 폄훼할 일 아니다.
술 먹을 때 내고, 담배 살 때 내고, 기침 한 번 하는데 백 원씩 꼬박꼬박 내는 족속들이다.
자본주의가 점점 더 발전하면
나중엔
공기의 임자가 생겨나고
난
숨 한 번 쉬는 데 백 원씩 내야 한다.
별빛도 조금 사야 하고
달빛도 조금씩 사 써야 하는데
결제는 내 고유번호에서 될 터,
바람소리 듣는 것도
월정액으로 빼갈 터인데
내가 좋아하는 가랑잎소리
값은 얼마일까?
돈의 잔량이 부족해지면
절전 모드로 전환되고
십오 프로 미만이면
백여 개 앱 중 숨구멍만 열어놓고
다
닫는다.
목숨을 중시하는 고품격 사회라서
며칠 더 살고 죽으라는 배려다
바람나서 나간 천만이 처는 아직 살았을까
그는 오이를 갖고 나가 성북역 마당에 폈다.
어떤 날은 부추를 묶어 나갔고
또 어떤 날은 총각무를 이고 나갔는데
그날은 안 왔다.
김천만은 못생길 대로 못생겼고
그의 처는 잘 생길 대로 잘생겼으니
동네 사람들은 올 것이 왔다는 듯 덤덤했다.
이름이 하예숙이다.
하태열 김생곤 강종안 이선옥,
내가 불렀던 이름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어렸을 때 알던 이름들이 사랑했던 여자 애들 이름보다 더 아리다.
시시 때때 울기를 잘하는 애는 미움받기 십상이다. 길례가 그랬다.
앞머리에 가마가 있고 눈매가 때꾼했던 그는 다른 애들보다 기억에 짙다.
그의 일자형 집도 그렇다.
방은 하나였고 울타리는 돌담이었는데
그 알돌담엔 봄이면 새가 집 졌고 여름밤이면 뱀이 돌맛을 즐겼다.
애들하고야 의당 한 방에서 잤다지만 시어미 하고 한 방에서 어떻게 애를 만들었는지 신기한 일이다.
눈먼 길례 할머니는 늘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나는 매일 길례를 때렸는데 이 할머니 역성이 심했지만 앞 못 보는 저 분이 날 어쩌겠냐는 심산으로 또 때리고 도망가곤 했다.
뙈기밭에선 목화가 폈다.
먹는 것이 아닌 작물로 유일했다.
목화는 역사상 가장 가치가 높은 비식량 작물이다.
엄마와 이것을 갖고 가 고양리 솜틀집에서 솜을 틀었는데 나는 그 아기살 같은 촉감이 좋아 몇 번이고 얼굴을 댔었다.
인간에게 먹혀 똥이 되는 밀이나 보리와 달리 옷감이면서 이불감인 목화는 한층 우아하다.
나도 죽어
목화로 피겠다.
죽도록 그리웠지만
까만 밤만 살아야 했던
그 소녀와
하얗게 하얗게 밤을 덮겠다.
길례네 집 가는 길과 개울 사이엔 찔레나무가 있었다.
내가 눈다래끼로 고생할 때 엄마가 내 눈썹을 뽑고 찔레나무 가시를 따 돌 위에 또 돌을 포개 놓았는데 하필이면 길례네 딱 한 집 다니는 그 길에 놓았는지 지금까지 의문이다.
영수가 먼저 죽을지 복자가 먼저 죽을지 촌각의 그 겨울에 복자가 먼저 해진 가마니에 둘둘 싸여 나갔다.
애들 시신은 솔가지를 쌓아 덮고 돌로 눌러 놓는다. 이른바 돌무덤이다. 멧돼지가 못 먹었다.
원뎅이 입구 박쥐굴 옆 어디 그렇게 해놨다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 애청구덩이 있을 거기쯤이 섬짓섬짓 하다.
앞개울은 변변치 않았으나 개구리가 많았다.
아버지는 춘석이를 불러 지렛대질을 시키고 튀어나오는 개구리를 잡게 했다.
전 과정 춘석이가 잡았으므로 춘석이의 것이었으나 아버지가 먼저 잡자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것이 됐다.
동네 깡패 이준식을 휘어잡은 거나
키 큰 김일문을 꺾어놓은 거나
이희준 이장되는 걸 끝까지 막아낸 거나
하여간 김덕화 어르신은 최소한 석현리에서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한인물 했을 사람이다.
길례 아버지 김범순은 후딱 하면 이분에게 불려 와 잡일을 도맡았다.
특히 그는 개 잡을 때와 돌다리 놓을 때 일가견을 발휘했다.
그가 놓은 돌다리는 예뻤다.
끙끙
지렛대로
들고
괴고
돌은
한걸음 간격으로 쪼르륵 줄 섰다.
나도
그 줄에 앉혀진 돌 하나
소학교 가는 애들 까만 고무신에
새참이고 가는 새댁 코신발에
꼭꼭 밟히는 행복.
시
고 딕 체 하 나 하 나 징 검 다 리 다.
징 검 다 리 한 자 한 자
읽히는 기쁨
어느 때부터인가 길례네 집은 생곤네 집이 됐고 김범순은 보이지 않았다.
그 미웠던 길례도 그리운 사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