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안의 생각장난 -20-

금방울 같은 은방울 같은

by 생각소년 김영안

여름은 밤이 짧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저녁이 있었다.

하늘엔 별이 있었다.

마당엔 멍석이 있었고

멍석 위엔 모깃불 연기가 있었다.


연기가 개떡 먹는 틈을 타 입안으로 들어오면

떱적한 개떡 맛보다

연기맛이 더 삼삼했다.


어둠이 내려와 얼굴을 가리면

우리는 말로써 얼굴을 대신했다.

기억해야 할 말인지

기억하지 않아도 될 말인지는 각자가 추렸다.


감자수제비 먹는 날은 좋아서

더 많은 말들을 했다.

산 입은 그렇게 행복했다.


있는 집은 흰 감자 심었고

없는 집은 자주감자 심었는데

눈이 많은 자주감자는 까기가 힘들었다.


놋숟가락으로 까고 나면

얼굴에 녹말이 튀어 깨강정이 됐다.

강정애가 그랬다.


그 까맸던 정애는

어느 이랑으로 가 흙을 덮었을까.


흰 꽃을 피워 올렸을까

자주꽃을 피워 올렸을까.



싹둑 잘리는 아픔으로

감자의 사랑은 시작됐다.


소쿠리 가득 쪽난 감자들이

봄에 판 이랑 속에

그리움으로 누웠다.


자줏빛 사랑이 그리웠던 감자는

자줏빛 꽃을 피우고

흰빛 사랑이 그리웠던 감자는

흰 꽃을 피워 올리며

나 여기 묻혀, 가슴 키우고 있음을 알렸다.


만개한 봄을 다 먹고 자란 감자가

벼농사에게 땅을 내주고 나왔다.


여름철 보리밥 주발을 채워주고

남은 감자는

긴 겨울밤을 위해

통가리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감자는 잿불에서 익어야 맛난 법.

아궁이 불빛 벌건 계절이면

감자는 벌써부터 가슴이 뜨거워졌다.


톡, 톡 던져진 감자는

잿불을 덮고 농염한 사랑으로 익었다.

포란포란 향기를 피워

농가의 마당 구석구석까지 엎드렸다.


푹, 푹, 푸욱 푹,


어느 날, 어느 세월인가부터

감자는 깊은숨을 토해냈다.

그 파실한 감자를

껍질 벗겨 먹어줄 임자가 나타나질 않아서였다.


애들과

사랑하는 사람과

여름내 마당에 그림자를 주었던 나뭇잎까지

저 알몸 절절한 감자의 염원을 접고

떠난 세월 얼마인가.


창호지 문틈 헛기침마저 말라버린 계절,

통가리 안 감자는

지나간 세월이 그리웠다.


감자도 한때

은방울 같은 새끼들을

뿌리 가득 매달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감자도 한때

금방울 같은 꿈들을

송골송골 피워 올리며 살았던 때가 있었다.


뿌리가 뿌리를 잡고 살았던

알몸이 알몸을 대고 살았던.


이제 다시는

몸 싹둑 잘리는 아픔도

이랑 깊이 묻히는 그리움도 없을 것 같아


푹, 푹,


그 뜨겁던 감자에서

김이 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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