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안의 생각장난 -23-

벼꽃

by 생각소년 김영안

논바닥 한가운데서 살아 본 적 있는가.

논바닥 한가운데 집에서 잠을 자 본 적 있는가.


그 까만 밤

밀려오는 그 무엇을

개구리울음에 섞어 본 적이 있는가.


그날 밤 나는 울었다.

나고 자란 석현리를 떠나

일영리로 이사 간 첫날밤이었다.


오월의 그믐밤

여럿이 우는 개구리울음이 수평선 같았다.


가까운 곳에서 우는 울음과

먼 곳에서 우는 울음이

내 애잔에 섞였다.


가까운 곳에서 오는 물결과

먼 곳에서 오는 물결이

내 어깨에 실렸다.


그때 이후부터 나는 알았다.

딸을 시집보낼 때 흔들리던 엄마의 어깨,


그것은 딸을 보내는 허허로움보다

딸이 맞을 오늘 밤부터의 낯섦을

대신 울어주는 것,


새로 맞는 아버지와 엄마와

새로 맞는 시동생과 누이와

새로 맞는 대문과 방의 낯섦


이 땅의 여러 딸들이

이미, 나의 오늘 밤 같은 밤을 살지 않았겠는가.


개구리 떼창 끝나는 계절이면

벼가 알을 벤다.

아버진 이때

사흘은 물을 대고 사흘은 물을 뺐다.


소나무가 유독 솔방울을 많이 열면

다음 해 죽는다.

반대로 거름기 많은 콩은 콩을 열지 않는다.


소나무는 죽기 전 정력을 다 쏟은 것이고

콩은 영원히 살 줄 알고

연애하기를 게을리한 탓이다.


아버지가 이삭 배는 중복 무렵에

사흘 물을 말리는 것도

벼에 긴장을 주기 위해서다.


먹고사는 족속들이

물 마르면 죽는 줄 알고

알을 많이 맺기 때문이다.


아버진 생태학을 안 했어도 이걸 안다.

그러나 삼경은 못 읽었어도 사서는 읽은 가부장이라서인지

한 번도 나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


아버지

물꼬 보러 가는 길


학교 가는 길


아버진

저쪽에서 열 걸음 앞에 갔고


나는

이쪽에서 열 걸음 뒤에 갔다.


아버지 어깨에 얹혀가던 괭이만

아직도 여덟 살이다.


-


한 계절

아린 밤을 먹은 벼들이 꽃을 피웠다.


-


벼꽃


화려한 색도 없고 고운 향내도 없어

언제 피었다 졌는지 아는 이 없지만

보세요, 저 옹골찬 열매 알말이 맺어 놓은 것,


벼꽃엔 나비도 날아들지 않습니다.

한 마리 꿀벌도 내려앉지 않습니다.


누구도 꽃으로 보아주지 않는

누구도 꽃으로 불러주지 않는


그렇게 피었다 지는 것이 억울해

벼꽃은

그냥 자기들끼리 살을 비볐나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빛 쌀밭 일구어 놓고도

세상에서 가장 초라히 피고 지신 당신,


당신은 꽃입니다.

꽃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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