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안의 생각장난-31-

그릇에 담긴 길

by 생각소년 김영안


학교를 줄 서서 갔다.

김영욱이 석현리라고 쓴 깃발을 들고

애들을 밧줄처럼 끌고 갔다.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줄이 많아졌다.


좌측통행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우측통행이 됐다.


좌측통행은 일제의 잔재라는 것이다.

기차도 일본에서 왔고 지적도도 일본에서 왔다고 따졌더니

사람들이 오른손잡이라서 가방도 오른쪽에 메기 때문이란다.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만 오른손잡이도 아닐뿐더러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오른손을 쓰기 위해 가방은 왼쪽에 멘다.


차와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가야 한다.

방어 운전, 방어 보행을 위해서다.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는 길에서

우측으로 걷는다는 건

내 등을 타자에게 맡기는 일이다.

그가 만약 휴대폰에 눈 팔고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치여 죽는 것이다.


몸의 기억은 말보다 오래간다.


백 년 동안 몸이 외운 방향을

어느 날 갑자기 바꾼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성공이 실패의 어머니일 때도 많다.

사람은 성공했을 때 조심해야 한다.


점포형 식당 하나 성공했다고

기업형 식당 냈다가 망한 자가 수두룩하다.


특히 도박이 그렇다. 이중덕이 그랬다.

그는 장흥관광지에서 백숙집이 잘 돼 만 원짜리 지전을 세다가 잠들기 일쑤였는데 그 많던 돈을 의기양양하게 찜질방 냈다가 날렸고 수십억 받고 판 식당을 강원랜드 다니며 날렸다.

전자는 백숙집 성공이 낳은 실패였고

후자는 슬롯머신 성공이 불러온 실패였다.

첫날 지전을 쑤셔 넣었을 때 새가 됐으면 족했을 걸 잭팟이 터진 게 화근이었다.


우측통행도 버스전용차선 성공이 낳은 재앙이다.

청계천 복원의 성공이 사대강 보 무리를 낳았고 천추의 흉물 아라뱃길을 만들었다.


경인 아라뱃길은 한강과 인천 앞바다를 잇기 위해 강제로 파낸 물길이다.


쓰임은 없다.


강물은 함부로 파서도 안 되지만 막아서도 안 된다.


설날을 양력으로 막으려 했지만 못 막았다.

평을 제곱미터로 바꿨지만 실패했다.

도로명 주소도 그럴 것이다.


강물은 변하지 않는 구간을 갈 때는 답답할 만치 느리다.

그러나 변해야 할 때를 만나면 폭포처럼 빠르다.

유행을 보라.

나팔바지가 청바지 되고 쫄바지가 통바지 되는 것은 빛의 속도다.

우주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오는데도 그랬고

종이에 쓰던 편지가 액정으로 옮겨가는 데도 그랬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급변해도

그 대부분은 디지털이거나 AI거나

그에 기댄 것들이다.


비행기는 내가 삼십 년 전 타고 다니던 것 그대로다.

고도도 그렇고

속도도 그렇고

안전도 그렇다.


반세기 전 달에 사람을 보냈지만 지금도 달에 사람이 가기란 여전히 어렵다.

사천 년 전의 수메르 점토판에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라고 쓰여있다.

그리스 고전 일리아드에도 "요즘 것들은 나약하다"는 탄식이 있다.


개인도 그렇다.

세 살 버릇 여든 안에 고치기란 여든 살 어른이 세 살 어린애 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열다섯 살 때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사람은 평생 그걸 부르다 죽을 확률이 높다.


단숨에 변할 때가 있다.

죽을병을 진단받거나 신앙을 만났을 때다.

백팔십 도 변하는데 하루면 족하다.

철근 덩어리만큼 강한 사람의 습성을 한순간 흐물흐물하게 만드는 괴력에 나는 놀랍고 두렵다.

신과 내 목숨이 동급임을 증명하는 바다.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그릇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릇만큼 산다.

로또 당첨자들 대부분 오 년 후 도로 묵이 된다.

일산 신도시 때 수만 평 논 보상받고 몇 년에 탕진한 분들 많다.

일정한 부자가 결정적 악재에 양은솥까지 날렸어도 몇 해 지나면 또 사장이 돼 있다.

물은 그릇만큼 차게 돼 있기 때문이다.


그릇은 큰데 물이 덜 담길 순 있지만

작은 그릇에 큰 물이 담길 순 없다.

그릇 하면 노자(老子)다.

빌수록 담을 수 있으니 그렇단다(當基無有器)


땅 사고 집 살 때 수십 억 지르면서

길바닥에서 파는 산나물값 지랄같이 깎는 자도 있다.

절골 성진수 마누라다.

그는 탈루 세금 수십억 원 맞았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들이 백만 원 술값 긁은 걸 갖고 까무러친 자다.

억 단위는 헤아려지지 않는 남의 수이고

백 단위는 헤아려지는 자기의 수이기 때문이다.


간장 종지도 있다.

이놈 의정부 제일시장 가서 들나물 파는 할머니에게 추근대곤 했다.

돌나물 한 바구니와

달래 한 바구니와

쑥 한 바구니

몰아서 오천 원에 팔고 있는데


쑥 빼면 얼마냐고

쑥 넣으면 얼마냐고

물었다.


쑥 넣으면 얼마냐고

쑥 빼면 얼마냐고

또 물었다.


쑥 뺐다 쑥 넣고

쑥 넣었다 쑥 빼고

묻고

또 물으니


할망구

슬슬 얼굴 빨개지더니

"이늠아 그만해라, 물 나온다"라고 했다.


쑥 넣고 사든

쑥 빼고 사든

얘 평생 잘 살긴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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