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 이야기_하나님의 축복을 받다

이부작의 여행기

by 이부작

[카그베니에서 무스탕을 꿈꾸다]


이곳은 카그베니(kagbeni, 2800미터)의 한 롯지이다. 꺼멀과 함께 그늘에 앉아서 환타와 콜라를 마시며 쉬고 있는 중이었다. 묵티나트에서 오전 7시 40분에 출발해서 이곳에 9시 50분에 도착했다.

묵티나트에서 카그베니 가는 길은 짙은 회색 사진처럼 매혹적이었다. 너무나도 적막한 대초원을 2시간이여 동안 말없이 걸어왔다.


걸어오는 동안 저 멀리 까마득한 점처럼 등위에 커다란 문짝 하나를 들고 걸어오는 포터를 빼고는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리 찌는 태양에 무거운 문짝이 십자가처럼 느껴졌고, 그 늙은 포터가 고행 길을 떠나는 예수님처럼 보였다. 주위에 있는 건 오직 모레 섞인 바람과 이름 모를 잡초와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중간에 수백여 마리의 흑염소 떼를 만났다. 길은 좁았고 오른쪽엔 강물이 흐르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앞쪽의 염소 떼들 뿔이 단단해 보였고 한 번 부딪히기라도 하면 몇 미터는 날아갈 것 같았다.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죽은 나무처럼 서있는데 염소 떼들이 나에겐 아무 관심 없는 듯 내 옆을 훅훅 지나갔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다 지나가고 나서야 긴 숨을 쉬고 다시 카그베니로 향했다.


카그베니는 무스탕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카그베니 위쪽의 무스탕 지역은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네팔 땅으로 대부분 티베트 민족이 살고 있으며 중국과 국경을 나누고 있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무스탕은 수십 년 동안 여행이 제한되어 있고 특별 허가증(1인당 몇 백 달러 비용)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어서 지구상 가장 오래된 은둔의 땅 중 하나이다.


그런데 요 근래에 한국의 트레커들이나 사진작가들이 무스탕 지역을 트레킹 한 여행기가 심심치 않게 책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러한 무스탕 관련 여행기와 책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나도 무스탕 지역을 꼭 여행해 보리라 꿈을 꾸었다. 그리고 꿈을 계속 꾸면 이루어지 듯이 가까운 미래에 무스탕을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 여행객들이 늘어나면 쓰레기가 늘어나 무스탕의 자연경관이 훼손되고 그곳의 순수한 사람들도 상업적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무스탕을 트레킹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순간 저 멀리 지프차 한 대가 다가왔다. 지프차가 서자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그런데 그 일행 중에 어제 좋은 인연으로 만났던 마이클 배 선교사님 일행도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선교사님"

"아 안녕하세요, 여기서 다시 만나네요, 걸어오셨어요?"

선교사님도 무척 반가워하셨다.


"네 열심히 걸어왔습니다."

"몇 시에 출발했는데요?"

"7시 40분쯤에 출발했습니다"

"아 정말 빨리 오셨네요.. 저희는 차로 9시 넘어서 출발했는데요"

"그런데 어떤 일로 차에서 내리셨어요? 좀슴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을 텐데요"

"지프차 안이 답답하기도 하고 길이 울퉁불퉁해 속도 안 좋아 여기서부터 좀슴까지는 걸어서 갈려고요" 선교사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다음 날 이렇게 바로 만나게 되다니 참 신기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선교사님과 함께 걸어가도 될까요?"

"아, 그럼요, 같이 말동무를 하고 가면 좋죠. 그런데 내가 발 걸음이 늦어서…"

"정말 이곳 카그베니에서 다시 뵙게 될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나와 마이클 배 선교사님은 카그베니에서 좀슴까지 동행이 되었다.


[좀슴(jomosom, 2720미터)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다]


선교사님의 트레킹 속도는 나보다 훨씬 느렸지만 최대한 선교사님의 발걸음에 내 발걸음을 맞췄다. 나에겐 1분 1초가 아쉬웠지만 처음으로 한국말을 하며 누군가와 함께 트레킹을 한다는 생각에 작은 행복감마저 들었다.


선교사님은 젊었을 때 해외에서 일을 하시다가 1985년부터 하와이에 정착해서 살고 있고 지금은 하와이에서 유학생들이나 여행자들에게 방을 렌트해 주고 월세를 받고 생활하고 계신다고 했다.

말씀하시는 것을 짐작해 보건대 하와이 집도 넓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삶을 사시는 것 같았다.

나중에 하와이를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꼭 선교사님을 찾아가 신세를 져봐야겠다.


한 시간여를 동행하면서 한국의 정치 경제 이야기를 나누고 소소한 개인사들을 이야기하였다.

선교사님께서는 서울의 집값을 물어보며 더 나이가 들면 하와이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의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하셨다. 선교사님께서 말씀은 안 하시지만 한국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저 앞에 좀 숨이 보였다. 좀슴은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의 마을 중에서 가장 큰 곳이었다.

좀슴은 풀은 적고 강풍이 자주 불어 환경은 척박하지만 예전부터 상품 교역이 활발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부자들 또한 많은 곳이었다.


상업이 발달해 있고 부자들도 많으니 네팔에서 보기 드물게 7성급 호텔이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곳 숙박비가 하루에 1천 불도 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도와 네팔의 부자들이 방문한다고 했다. 인도나 네팔의 부자들은 여행 코스처럼 이곳 좀슴의 호텔로 헬기를 타고 이동해서 수영도 하고 여가를 즐기며 며칠 편안하게 쉬다가 다시 헬기를 타고 묵티나트 사원으로 순례를 떠난다고 한다.


잠시 이 호텔에 부자가 된 후 가족들과 함께 1박을 하는 상상을 하다가 강풍이 세게 불어 정신을 차렸다. 불어오는 강풍을 뚫고 마을 중심부까지 들어왔다. 나는 체크포인트에서 신고를 하고 선교사님은 옆에 동료분이 내일 떠나기 때문에 비행기 시간표를 알아보러 가셨다.


선교사님은 그분이 떠나더라도 12월까지는 네팔에 남아 의료활동 및 선교활동을 더 하신다고 했다. 선교사님께서 시간이 되면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셨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고 있었지만 흔쾌히 좋다고 하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우리는 선교사님이 머물고 있는 롯지로 들어갔다.


롯지 안 식당은 어둑했지만 아늑했다. 우리는 각자 음식을 주문하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선교사님께서는 잠시 은행에 다녀오겠다며 나가셨다.

'이곳 좀슴은 은행도 있구나' 이곳에도 은행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음식 나오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이제까지 본의 아니게 전화를 못 드렸던 어머니께 전화를 걸려고 롯지 주인을 찾았다. 롯지 주인 또한 한국에서 몇 년간 노동자로 일을 해서인지 한국말을 조금은 알아들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서 말은 잘 못했다.


먼저 가격을 알아보니 1분에 100루피 정도로 고산지대보다 훨씬 저렴하였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자 다행스럽게도 어머니의 통화 연결음 신호가 들렸다. 잠시 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롯지 주인은 자신이 들고 있는 타이머로 초를 재기 시작했다. 시간을 절묘하게 맞혀서 정확히 59초 만에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께 건강하게 여행 잘하고 있고 추석을 함께 못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는 처음엔 걱정을 많이 하시는 목소리셨지만 아들 목소리가 밝아서 한결 안심이 되시는 것 같았다.

남은 기간 동안 항상 차 조심하고 잘 돌아오라고 하셨다. 전화를 끊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롯지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자 “엄마?”라고 물었다.

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식당으로 다시 들어갔다. 조금 더 기다리자 음식이 나왔다.

나와 꺼멀, 선교사님과 일본계 미국인 의사분, 그리고 네팔인 선교사 2분, 가이드 1분이 식탁으로 모였다. 선교사님께서 식사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걸 나에게 양해를 구하셨다.


"종교가 없으신데 식사를 하기 전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되겠어요?"

"아, 예 당연히 좋습니다.”

선교사님과 다른 분들 모두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으셨다.


나도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선교사님께서 한국말로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에게 이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며......"

내용을 다 몰랐지만 갑자기 선교사님의 마지막 말씀이 천둥처럼 들렸다.


"한국에서 온 이 청년이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살펴주시고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 말씀을 듣자 이 순간이 세례를 받는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시간으로 느껴졌고, 기도문처럼 하나님께서 진짜로 남은 일정뿐 아니라 내 인생 전반에 걸쳐서 나를 항상 보살펴 주시고 축복해 주실 거란 믿음이 들었다. 히말라야의 외딴 좀슴에서 들었던 기도문이 내 마음속에 마지막까지 숨어있던 분노나 응어리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감사합니다. 선교사님, 히말라야에서 우연히 만난 저를 축복해 주셔서 다시 진심으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작년엔 abc에서 윤서 스님과 다른 비구니 스님들께서 진심으로 기도를 해주셨는데요...... 네팔에 올 때마다 신의 축복을 받게 되네요. 전 참 행운아입니다.'


선교사님께 감사의 눈인사를 드렸다. 선교사님께서도 자상한 눈빛을 보내주셨다.

말없이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자 선교사님께서 내가 먹은 점심값을 계산하려고 하셨다.

화들짝 놀라며 내가 먼저 계산을 하였다. 그런데 꺼멀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고 있었다.


꺼멀에게 물어보니 별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알고 보니 이쪽은 북쪽 지역이어서 남쪽과는 달리 포터나 가이드에게 잠자는 자리만 무료이고 이들이 먹는 식사 비용은 다 받는다는 것이었다.

좀슴 지역의 포터에 대한 대우가 너무 상업적이지 않나 싶었다. 꺼멀에게 돈을 지불하지 말라고 말하고 점심값을 대신 주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정말 선교사님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참 좋은 분을 만나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국 돌아가면 이메일로 선교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 꼭 보내드릴게요, 남은 기간 네팔에서 조심히 지내세요"

"그래요, 트레킹 잘하시고 종종 연락합시다"

헤어짐이 아쉬웠지만 인연이 되면 이분도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곳 히말라야에서는 직감력이나 본능이 일상적인 대도시에서 보다 훨씬 강력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리고 윤회나 인연의 속도도 평상시보다 1.5배는 더 빨리 진행되는 것 같다. 작별을 고하고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된 사람도 어느새 저 앞에 다시 나타나서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더 깊은 인연이 쌓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헤어짐으로 다가오는 곳, 하지만 헤어짐 뒤에 남은 일생 동안 한번은 꼭 다시 만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 곳, 이곳은 히말라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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