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가거든 그리고 사랑으로
[해발 4130미터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
윤* 스님이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그리고 식사 시간이 되자 식당 안으로 투숙객들이 모두 모였다. 트레커들이라고 해봐야 나와 꺼멀, 라메쉬 형과 비구니스님들, 한국인 여자대학생과 원빈처럼 생긴 포터, 그리고 이스라엘 여행자 2명과 그들의 포터들뿐이었다. 그런데 윤* 스님뿐 아니라 다른 스님들과 여학생도 기력이 별로 없어 보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용맹정진을 하셨더라도 이곳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곳까지 오시느라 여자의 몸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방으로 돌아가 배낭 안의 모든 한국 음식들을 꺼내 들고 와서 스님들과 여학생에게 나눠 드렸다. “스님, 한국 음식 생각 많이 나실 텐데 이거 나눠 드세요!”
컵라면 3개에 인스턴트 죽, 김치와 고추장 볶음을 보시자 스님들께서는 너무나 반가워 하셨다.
“아니 이건 **님이 드실 음식이 아닌가요?”
“저는 촘롱에 가면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다 짐을 놔뒀거든요.”
“고마워요, 잘 먹을께요”
스님들과 라메쉬 형이 진정 고마워했다.
저녁을 배불리 먹고 나자 나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의 체력도 일부 회복되었다.
스님들도 맛있게 곁들여 먹은 라면 때문인지 기분이 많이 좋아 보였고 옆에 있던 라메쉬 형도 행복해 보였다. 식사가 끝난 후 이른 저녁에 방에 들어가 홀로 있기 보다는 이 좋은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윤* 스님, 라메쉬 형, 제가 곡차가 좀 있는데요, 여기서 차 한잔 하실래요?”
윤* 스님께서는 못 이기시는 척,
“그러면 차 한잔 할까요!” 하셨고 형은 곡차란 말을 처음엔 못 알아듣다가 나중에 술이란 걸 알고 두 눈을 반짝거렸다. 가방에서 플라스틱 소주 2병을 꺼내서, 술이 많지 않은 만큼 흐르지 않도록 조심조심 따랐다. 한 두잔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양이었지만 분위기를 돋구는 데는 충분했다. 오랜만에 맛 본 소주 때문에 흥이 난 라메쉬 형이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형의 노래는 당연히 네팔 노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용필의 노래 ‘모나리자’였다.
형은 가사를 거의 완벽하게 외우며 모나리자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식당 안은 환호성으로 가득했고 형의 노래 때문에 식당 안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올라갔다. 형은 조용필의 광 팬이었다. 앵콜이 계속되자 형은 내가 모르는 조용필 노래를 다시 부르고 또 이어서 조용필의 다른 노래들을 불렀다. 한국인인 나보다 조용필 노래를 많이 알고 잘 부르는 네팔인이 있다는 게 그저 신기했다. 분위기가 끊어질세라 이번엔 꺼멀에게 숟가락 마이크를 돌렸다. 처음엔 꺼멀의 얼굴에 붉은 꽃이 피었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역시 ‘레썸삐리리'였다. ‘레썸삐리리'는 한국의 ‘아리랑’처럼 네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로 뒤 후렴구에 ‘레썸삐리리'가 반복되는 게 특징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이번엔 나에게 마이크가 돌아왔다. 주저 없이 노래를 불렀다.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 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 꾸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리.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 가며...바위처럼 살자 꾸나”
대학생때 가끔 불렀던 바위처럼, 가사 내용이 마치 시와 같았고 한 구절 한 구절이 내 자신을 토닥거려 주고 아픈 곳을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나자 나에게도 앵콜이 들어왔다. 뭘 부를까 잠시 고민하다 다시 노래를 불렀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우리는 만나야 한다”
‘직녀에게’라는 노래였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내 심정을 표현한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고 스님들께 부탁의 말씀을 드렸다.
“제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 좀 해주세요^^” 스님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실례를 무릅쓰고 스님들께 한 곡을 요청 드렸다. 스님들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발라드와 트로트로 분위기에 딱 맞는 노래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분들 중 제일 나이가 어려보이는 스님께서 계속 노래를 안 부르시려다가 마지 못해 조용히 노래를 하셨다.
“쓸쓸한 달빛 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 쉬듯 물어볼까요 난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 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가고 기억하는 이 내 슬픔까지도 사랑하길,
부디 먼 훗날 나 가고 슬퍼하는 이 내 슬픔 속에도 행복했다.”
명성황후의 주제곡 ‘나 가거든’의 노래가사가 너무나 애절하고 슬펐다. 그리고 스님의 목소리가 너무나 맑고 고와서 저절로 가슴이 저려왔다.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스님의 노래에 취해버렸다. 심지어 옆에 있던 이스라엘 트레커 2명도 노래가 끝나자 마자 원더풀을 연발하며 기립 박수를 쳤다. 식당 안은 생각지도 못한 너무나 멋진 노래들로 즐거움과 웃음과 감동으로 충만하였다.
이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시간, 우리는 윤* 스님이 선창하는 마지막 곡을 함께 불렀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불후의 명곡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였다. 이스라엘 사람이건 네팔 사람이건 상관없이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사랑으로’를 따라 불렀다.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라는 가사가 내 마음속에 큰 숙제처럼 다가왔다.
해발 4130미터 ABC 캠프에서의 작고 행복했던 음악회가 끝이 났다.
사람들은 평생 잊지 못할 공연을 본 듯 자리를 떠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 혹시나 컵라면이나 곡차 가지고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스님들은 당연히 육식을 하면 안되고 술을 마시면 안됩니다.
다만, 그날 ABC에서의 스님들은 여행의 피로가 최고로 쌓인 상태었고
체력도 바닥이 난 상태였습니다.
그날 그 분들은 스님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연약한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날 그 분들이 드신건 「한국의 맛과 정이 담긴 한끼 식사」 였습니다.
* 한국에 돌아와 가끔 스님들은 잘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날 이후 이제까지 그분들을 다시 만나봽지는 못했지만
윤* 스님이 저와의 약속은 지키신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들 낳고 지금까지 무탈하였습니다.'
스님,
혹시 이 글을 보게 되신다면 한 가지만 더 기도해 주십시요~(나마쓰떼)
'글 쓰는게 매일 즐겁고 즐거워, 졸작이라도 글로서 사람의 마음을 훔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