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의 Romanticists

ROTARY BEGINNERS 와의 첫 투어

펑크를 하다 보면, 인생의 중요한 약속들은 이상하게도 제일 흐릿한 자리에서 맺어진다. 회의실도 아니고, 명함도 없고, 계약서도 없다. 그날도 그랬다. 홍대 골목, 편의점 앞, 빈 소주병과 찌그러진 캔맥주, 담배꽁초 위에서 맺어진 약속이었다.

2014년 7월의 어느 날. 홍대 놀이터 야외 공연이었다.
SCUMRAID 드러머 이주영이 기획한 거리 라이브, 이름은 THE MORE I SEE. 이것은 주영의 시그니처 기획 시리즈였고, 그녀는 훗날 동명의 공연 사진집을 발간하게 된다.
SYSTEM FUCKER, REALITY CRISIS, ROTARY BEGINNERS, SCUMRAID, 그리고 우리 FTS까지. 일본에서 건너온 불량 중년들과 한국 펑크들이 뒤섞여, 놀이터 바닥을 통째로 울리던 날이었다.

야외 공연을 한다는 건, 언제든 민원이 터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날 경찰들이 나타났다. ROTARY BEGINNERS의 라이브 도중에 공연을 멈추게 했고, 드러머 토바가 험악한 표정으로 경찰과 대치했다. 일촉즉발이었지만, 공연의 기획자인 주영이 경찰을 붙들고 차분하게 상황 설명을 했다. 몇 마디 오간 뒤, 공연은 다시 이어졌다.

ROTARY BEGINNERS는 도요타에서 1993년부터 활동해 온, 지역의 상징 같은 밴드였다. 도요타 역 앞 엔텐카(炎天下) 스테이지에서 처음 시작한 무료 거리 공연은 지금의 TOYOTA PUNK CARNIVAL로 이어지고 있다. 거리 공연에 인생을 걸어온 사람들이라, 경찰의 중지 명령에 토바가 격하게 반응한 것도 이해가 갔다. 그날 일은 “한국 펑크 역사 최초의 경찰 난입” 정도의 제목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자 다른 장면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1차 회식까지 끝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갈라졌다. SYSTEM FUCKER, REALITY CRISIS, SCUMRAID 멤버들은 한강공원으로 간다고 했다. 일부는 숙소로 돌아가 쉬겠다고 했고, 나머지는 각자 흩어졌다. 강바람 맞으면서 마시는 술도 좋지만, 그날의 나는 굳이 이동하고 싶지 않았다. 공연 직후의 피곤한 몸으로 한강까지 가는 게 귀찮게 느껴졌다.

그때 소가가 말했다. 자기들은 아저씨들이라, 어디 옮겨 다니는 거 싫고 그냥 길에서 마시고 싶다고.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누가 봐도 문제 많은 중년들이었지만, 그 말 속에는 담백한 자존심 같은 게 있었다. 우리는 결국 둘로 나뉘었다. 한강파와 길바닥파. 나는 자연스럽게 길바닥 쪽을 골랐다. 임예지(훗날 SLANT 보컬이 되는 그 예지)와 몇몇 친구들이 같이 남았다. 그렇게 우리와 로타리, 한국과 일본의 불량 청년들과 불량 중년들이 홍대 걷고 싶은 거리의 편의점 앞에 둥글게 앉았다.

소주와 캔맥주, 편의점 안주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깔아놓고 계속 마셨다.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손짓과 단어 몇 개, 그리고 웃음으로 대충 채웠다. 그러다 소가가 나를 보더니,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했다.

“저는 소가입니다.”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분명한 존댓말이었다.
낯선 언어로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남자. 그 한 문장 안에, 이쪽 씬과 진짜로 섞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우리가 낯선 존재라는 걸 아는 예의가 같이 들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가 도요타 지역의 보스고, 폭주족 리더 출신이라는 걸 전혀 모른 채, 그냥 “예의 바른 나이스가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술이 더 들어가자, 소주병과 캔맥주가 점점 늘어났다. 말은 더 안 통했지만, 얼굴 표정과 목소리 톤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다 소가가 짧게, 또 한 문장을 꺼냈다.

“내년에, 당신의 밴드, 일본에 부를게요.”

기획서도 아니고, 공식 오퍼도 아니고, 그냥 길바닥에서 캔맥주 들고 마주 앉은 상태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펑크를 한다는 건, 이런 약속을 믿고 사는 일이기도 했다. 어디 남아 있지도 않은 구두 약속 하나가, 이상하게 더 믿음직스러울 때가 있다. 그날 소가의 그 한마디는 그렇게 내 안에 박혔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나, 나는 정말 일본 나고야에 도착해 있었다. FTS의 첫 해외 라이브였다.

나고야에 도착한 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평안과 같이 있었다. 내게 평안이는 가장 귀여운 친구이자 동생이었고, 형제 같은 존재였다. 이런 투어를 같이 떠날 사람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평안이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나중에 그는 무덤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지만, 이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전, 우리 둘 다 살아서 욕하고 웃고 마시던 시절의 이야기다.

도쿄에서 버스를 타고 나고야 시내로 들어오는 동안, 창밖 풍경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소가를 다시 본다”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머릿속에는 홍대 편의점 앞에서 정중하게 “저는 소가입니다”라고 말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뒤로 전해 들은 이야기, 도요타의 보스이자 폭주족 리더 출신이라는 소문이 겹쳐지면서 그 이미지가 조금씩 달라졌다.

정중한 신사와 도요타 최고의 배드보이라는 두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부딪혔다. 나고야로 향하는 동안, 그 둘이 실제로 어떤 사람으로 합쳐질지 내심 궁금했다.

나고야 터미널에 마중 나온 토바와 반갑게 인사했다. 그의 차를 타고 약속된 장소로 갔다. 도착했을 때의 장면 하나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멀리서 팔을 크게 흔들며, 웃는 얼굴로, 거의 고함에 가까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남자.

“어이!! 찬근!!!”

이번에는 정중한 자기소개 따위는 없었다. 인사는 주먹 한 방으로 대신됐다. 소가는 내 팔을 꽤 세게, 실제로 아플 정도로 쾅 내리쳤다. 반가움과 위압이 동시에 섞인 인사였다. 나는 웃으면서도 살짝 움찔했다. ‘아, 이게 도요타식 인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평안이가 깔깔 웃었다. 그 웃음에는 “오늘 밤 재밌겠다”는 기대가 섞여 있었다.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약속의 뒤편에 있던 도시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날 밤, 우리는 펑크 누님들이 운영하는 작은 펍으로 향했다. 어느 나라든 펑크 씬에는 이런 곳이 있다. 라이브하우스와 집 사이에 떠 있는 중간 지점 같은 곳. 퇴근 후 한 잔 마시러 오는 사람, 공연 전 몸풀러 오는 사람, 공연이 끝난 뒤 아침까지 앉아 있는 사람이 다 섞여 있는 곳.

우리가 간 펍도 비슷했다. 카운터 뒤에는 펑크 누님들이 서 있었고, 벽에는 오래된 포스터와 전단지가 겹쳐 붙어 있었다. 냉장고 문이 열릴 때마다 병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낮부터 마신 것 같은 손님들이 여기저기 앉아서 조용히 떠들거나 크게 웃고 있었다.

소가는 우리를 입구 쪽 자리에 앉혔다. 평안이는 나이 많은 소가 옆에 앉아 긴장한 얼굴로 잔을 받더니, 금방 적응한 얼굴로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말은 반만 통했고, 나머지는 제스처와 웃음으로 때웠다. 펑크 누님들은 서툰 영어와 몸짓으로 안주를 권했고, 소가는 중간에서 통역을 하다가 대충 서로 알아들으면 그냥 같이 웃어버렸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우리는 빠후로(Bar Afro)로 이동했다. 그곳은 나고야 펑크들이 모이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고, ROTARY BEGINNERS의 베이시스트, 아후로가 운영하는 바였다.

빠후로 안에는 일반 손님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밴드맨이거나 주변 펑크들이었다. 아후로도 거기에 있었다. 한국에서 봤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늘 그렇듯이 술 좋아하고, 시끄럽고, 웃기지만, 한편으로는 좀 위험해 보이는 인간. 농담을 던지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눈빛이 확 달라지는 타입. 그날도 인상은 그대로였다.

가게 안에는 개 두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시로와 쿠로. 래브라도 리트리버 계열의 검은 개들이었다. 둘 다 검은색이었는데 이름이 흑과 백이라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앉아 있으면 알아서 옆에 와서 비비고 눕고, 잠깐 있다가 다른 사람 쪽으로 옮겨 가곤 했다. 누구도 “개는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그들도 구성원이라는 듯이, 당연하게 거기 있었다.

구석 한쪽에는 갈색 닭이 있었다. 이름은 코케미. 닭이 바 안에서 같이 산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처음에는 술에 취해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몇 번을 봐도 닭이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코케미도 사람들 사이를 한 번씩 훑어본 뒤 자기 자리에 돌아가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이곳에서 잔다. 고마운 일이다.
펑크 투어라는 건 원래 이런 거다. DIY로 투어를 기획하면 비싼 숙소를 예약하기 어렵다. 호텔 대신 친구 집, 여관, 라이브하우스 바닥이 밴드맨들이 자는 곳이 된다. 비싼 페이도 필요 없다. 같은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약속만으로, 또, 그곳에 펑크씬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흔쾌히 국경선을 넘는다. VIVISICK의 베이시스트 타짱이 예전에 내게 해 준 말이 있다.

“펑크라면, 항상 침낭을 갖고 다녀라.”

정신없이 소란스러웠던 술자리가 끝나고, 나는 아후로가 마련해 준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있는데, 정수리에 뭔가 축축함이 느껴졌다. 시로와 쿠로였다.

두 마리가 번갈아 가며 내 머리를 핥았다. 이마 쪽이 축축해졌다가, 잠시 후에는 뒤통수 쪽이 젖는 느낌이 왔다. 아마 내 두피에서 소세지 맛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그냥 냅뒀다. 술기운이 온몸에 퍼졌고, 이쯤 되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케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닭 특유의 고개를 까딱이는 동작으로 이쪽을 한 번, 저쪽을 한 번 보더니,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개 두 마리, 닭 한 마리, 술에 취한 펑크들.
나는 그 사이에 누운 채, 담배와 술 냄새가 뒤섞인 공기를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빠후로에서 눈을 떴다.
시로와 쿠로, 코케미, 술 냄새까지 다 그대로였다.

잠깐 정신을 가다듬고 밖으로 나가니, FTS 멤버들이 나고야에 도착했다.
비슷한 얼굴, 비슷한 피곤함, 비슷한 기대.
한국에서 마지막 합주를 했던 얼굴들을 나고야 골목에서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일본에 도착했고, 할 일은 하나다.

“한 잔 할까?”

우리가 점심 낮술을 제안했고, 로타리 쪽도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
소가, 아후로, 몇몇 로타리 멤버들과 같이 근처 식당에서 술을 마셨다. 나고야는 미소가 유명한 지역이었다. 미소 우동 정식, 미소 돈카츠 정식, 미소 쿠시카츠 등등 굉장히 맛있는 밥에 반주를 곁들였다. 아니, 반주라기엔 도가 지나쳤다.
식당을 나서며 소가가 한 마디 했다.

“너희같이 마셔대는 놈들, 처음 봐.”

칭찬인지, 경고인지 애매했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낮술을 마시고 잠깐 쉬러 다시 빠후로로 돌아왔다. 소파에 드러눕자마자 어제의 그 기척이 다시 느껴졌다. 시로와 쿠로였다. 두 마리가 번갈아 가며 내 머리를 또 핥기 시작했다. 이마 한 번, 뒤통수 한 번. 어젯밤에도 실컷 빨아 먹더니, 아직도 뭐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그걸 보던 멤버들과 평안이는 바닥을 치며 웃었다. “머리 왜 이렇게 인기 많냐” 하고 놀려댔고, 나는 그냥 눈만 감은 채 “소세지”라고 대답했다.

그때, 소가가 누군가와 인사하더니 나에게 소개를 시켜줬다.

“찬근! 폭주족 좋아한댔지? 여기 진짜 폭주족이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면봉 2개를 자신의 입에서 콧구멍으로 연결하며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섣불리 웃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눴다.

소가의 과거 폭주족 후배인 그 남자가 갑자기 염색약을 가져와서 염색을 해 주겠다고 했다.

“어? 어... 어.... 아리가또....”

머뭇대는 사이에 그는 염색약을 내 머리에 발랐다. 면봉 2개를 콧구멍과 입에 연결한 채 염색약을 들고 오는 험상궂은 남자를 거부할 방도는 없었다. 어차피 개들한테 잔뜩 빨린 머리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내 머리는 후라이드 반, 간장 반이 되었고, 생각보다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한국에서도 한동안 이 스타일을 유지하고 다녔었다.

그날 밤, 공연장은 나고야의 라이브하우스 RED DRAGON 이었다. 공연 제목은

〈아나키와 평화〉였고, 라인업은.

PILEDRIVER
TURTLE ISLAND
ROTARY BEGINNERS
SCUMRAID
FTS

TURTLE ISLAND의 공연은 거의 의식에 가까웠다. 일본 전통 퍼커션 구성에, 한국식 풍물의 리듬, 거기에 펑크록이 섞여 있었다. 프런트맨 요시키(한국 이름 김애수)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외톨이로 지냈다고 했다. 하지만 펑크족들 만큼은 자신을 친구로 받아줘서 잘 살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아이치 지역에서 SOUL BEAT ASIA 라는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그 수익으로 생활을 이어가며, 지역 공동체와 생태, 평화 운동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는 아이치 지역을 넘어 일본 펑크씬의 큰 정신적 지주 중 하나이다. 그날도 본인들 페이를 한국에서 온 SCUMRAID와 우리에게 양보했다. 정말 고마웠고, 동시에 부끄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날 RED DRAGON의 공기는 이미 꽉 차 있었다. 우리 차례가 오기 전까지, 나는 미친듯이 긴장했다. 첫 해외 라이브, 첫 나고야, 첫 RED DRAGON이었다.

RED DRAGON의 사장은 CLOWN(九狼吽)의 보컬 무네였다. 그는 미국의 바이커 집단 HELLS ANGELS의 일본 지부 리더였다. 헬스 앤젤스는 미국에서는 범죄 집단으로 분류되지만, 그는 일본 지부 멤버들과 함께 동일본 대지진 때부터 “침묵보다는 행동하는 위선자가 되겠다”라며 구호물자를 싣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번 노토 지진 때도 ‘행동(行動)’이라는 스티커를 만들어, 판매 수익으로 구호물품을 운반하여, 재해를 입은 사람들을 도왔다. 거칠지만 의협심을 가진 사람들. 하지만 외양에서 느껴지는 포스는 굉장히 공포스러웠다.

그는 덩치가 정말 어마무시하게 컸는데, 보자마자 압도 당했다. 입장할 때 공연하는 밴드들은 프리 드링크 티켓을 두 장씩 받았는데, 나는 그것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다시 받으러 갔다. 티케팅 부스에는 그가 있었다. 나는 굉장히 무서웠지만 용기 내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프리 드링크 티켓...”
“잊어버렸어? 으하하하하!!”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티켓을 두 장 꺼내 줬던 기억. 강렬했다.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그 이후로 RED DRAGON을 몇 차례 갔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나는 굉장히 편한 마음으로 공연을 즐길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ROTARY BEGINNERS와 SCUMRAID가 엄청난 라이브를 보여주고 나서, 이제 우리 차례.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의 라이브는 엉망이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내 염색 머리에 힘을 얻어 시작했지만, 연주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무대 위에서 내가 원하는 모양이 안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곡. 일본 펑크 역사에서 전설적인 곡인 THE STALIN의 〈Romanticist〉 커버.

드럼 인트로가, “딴딴따단” 하고 시작되자마자,
나는 가사를 전부 잊어버렸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깐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그 짧은 몇 초가 영원한 정적처럼 느껴졌다.
밑에서 보던 소가가 결국 스테이지 앞으로 다가와 내 멱살을 잡았다.

“뭐 하는 거냐, 이놈!”

공연 중에 멱살을 잡히고 얻어맞는 경험도 그날 처음 해봤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명곡을 망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공연 직전에 인사를 나눴던 나고야의 틴에이저 하드코어 펑크 밴드, INMOH의 보컬이 무대로 뛰어올라왔다.
마이크를 넘겨받더니, 아무렇지 않게 “Romanticist”를 이어 불렀다.
관객들은 다시 열광했고, 공연을 겨우 완주했다.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다.
투지도, 멋도, 다 박살난 느낌이었다.
그날 나는 속으로 아주 간단한 결심을 하나 했다.

다시는 이따위로 밴드를 하지 않겠다.
오늘 무대 위에서 느낀 이 부끄러움을 다시는 느끼지 않겠다.

하지만 그날 밤이 완전히 실패로만 기억되진 않는다. 나는 라이브 중간에 주영에게 통역을 요청했고, 그녀가 마이크를 잡고, 일본어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FTS의 기타리스트 심지훈(직업은 활동가)이 시위 중 거듭 연행되면서 벌금이 천만 원 가까이 쌓였고, 그 벌금을 메우기 위해 한국 펑크 밴드들이 〈호걸을 건드리면 관아는 잿더미가 된다〉라는 이름의 컴필레이션을 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이 컴필레이션을 이 곳에서 판매중이고, 많이 구매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주영의 소개가 끝나고 마지막에 마이크를 이어받아,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말 하나를 외쳤다.

“PUNK IS NO BORDER!!!”

그 말이 어느 정도 전달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 PILEDRIVER의 오리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며 외쳤다.

“PUNK IS NO BORDER!”

나도 같이 허리를 굽혔다.
서로 누가 먼저 고개를 드나, 괜히 경쟁이라도 하듯이 조금씩 더 숙이다가, 결국 무릎까지 꿇은 맞절이 되어버렸다.

보컬 이치로와는 라이브하우스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이치로는 아르헨티나계 일본 혼혈이라,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멋과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태우며, 짧게 말했다.

“LOVE & PEACE.”

그 말은 클리셰에 가까웠지만, 그날의 공기 속에서는 오직 진심만이 느껴졌다.
어쨋든 이것은 공연이 끝난 뒤의 이야기.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자.

PILEDRIVER가 연주를 시작했다. PILEDRIVER는 요코하마/요코스카 씬의 전설적인 하드코어 펑크 밴드이다. 보컬 이치로와 기타리스트 오리가 10대 때 함께 결성한 폭주족 그룹 '혼모쿠 아웃사이더(本牧アウトサイダー)'는 아메리칸 바이크를 타는 유니크함으로 지역의 전설로 남아, 지금도 그 이름의 스티커와 패치가 온라인에서 거래된다고 들었다. 그날은 그들이 매우 오랜만에 나고야에서 라이브를 하는 날이었고, 그래서인지 RED DRAGON 안의 모든 사람들이 흥분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FIGHT FOR FREEDOM〉을 연주할 때, 나와 소가는 앞으로 뛰쳐 나갔고, 소가는 내 이름을 부르며 옆에서 내 팔을 계속 때렸다.

“찬근! 찬근!!”

나는 맞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너무도 유명한 전주가 끝나갈 무렵, 이치로가 마이크를 들고 외쳤다.

“FREEDOM!!!!”

머릿속에서 “Romanticist”의 실패 따위는 사라져 버린 지 오래, 그저 눈앞의 장면만이 선명하게 찍혔다.

공연이 모두 끝난 뒤, 우리는 짐을 챙겨 나고야에서 유명하다는 귀신 료칸으로 향했다. SYSTEM FUCKER 멤버들도 같이였다.

오래된 료칸, 긴 복도, 삐걱거리는 바닥. 딱 클리셰 같은 구조였다. 진짜 귀신이 나온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지만, 솔직히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아서 별 생각이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료칸의 방 안에서 SYSTEM FUCKER 들과 마시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잠들었다. SYSTEM FUCKER 멤버들은 일본 펑크 중 몇 안 되는 내 또래 친구들이다. 지금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이후 내 밴드들의 몇 차례의 아이치현 라이브 때마다 와서 서포트해 주는 고마운 친구들이다.

이렇게 하루가 또 저물고 내 인생 첫 해외 라이브가 끝났다.

다음 날 아침, 귀신 료칸에서 눈을 떴다. 숙취에 머리는 깨질 것 같았고, 입 안은 말라붙어 있었다.

심지훈은 밤에 소녀 귀신을 봤다고 여기저기 하소연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료칸을 나왔고, 그곳에서 길이 갈렸다. 나를 제외한 FTS 멤버들은 공항으로 향했다. “수고했다”는 말과 “다음에 또 오자”는 말이 뒤섞였지만, 각자 나름의 무거운 감정을 품고 헤어졌을 것이다. 한국의 라이브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경험과 부끄러움, 앞으로의 기대감, 모든 것이 뒤섞인 감정으로 각자의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으리라.

모두 떠나고, 나 혼자 남았다. 하루를 더 머물기로 한 건 나뿐이었다. 나는 좀 씻고 싶었다. 투어를 가게 되면 항상 맞이하는 문제가 씻는 문제다. 투어 기간 중, 운 좋게 로컬 친구들 집에서 숙박을 하게 될 때나, 비즈니스 호텔에서 머물 때를 제외하면 며칠씩 못 씻는 일도 생긴다. 지금이야 투어 동선에 맞춰 숙소를 따로 잡을 때도 있지만, 일정이 바쁘고, 이동이 많은 투어의 경우, 투어 프로모터의 환경과 시간에 맞춰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 여의치 않을 때도 많다. 혼자 나고야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첫날 눈여겨봤던 목욕탕으로 향했다.

3일 만에 씻으면서 온몸의 피로가 회복되는 느낌도 잠시. 목욕탕 직원인 아주머니 한 분이 내게 말을 건다. 나는 잠시 멍하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당시에는 일본어를 거의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내가 벌거벗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

“NO!!!”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본능적으로 소리부터 질렀다. 그리고 목욕탕을 뛰쳐나왔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의 나는 한국 대중 목욕탕과 일본 대중 목욕탕의 문화 차이를 몰랐다.

어쨌거나 나는 3일 만에 씻고 나와 자연스럽게 빠후로로 향했다.

가게 안은 전날보다 한가했다. 어제까지 함께 마시던 얼굴들 중 절반은 이미 하늘길로 떠났다. 시로와 쿠로, 코케미, 그리고 몇몇 나고야 펑크들만 남아 있었다.

잠깐 자리에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고,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하러 나갔다. 그때 코케미가 보였다.

갈색 닭 한 마리가, 혼자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목줄도 없고, 데려가는 사람도 없었다. 코케미는 빠후로가 아닌 방향으로 꼬박꼬박 걸어갔다.

나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따라갔다.
코케미는 큰길에서 신호라도 기다리듯 멈춰 서 있었다가, 차가 뜸해지는 타이밍에 건너편 블록으로 슬쩍 넘어갔다. 그리고 골목 안쪽, 한 미용실 앞에서 멈춰 섰다.

유리문 너머로, 젊은 여성 디자이너가 손님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코케미는 그 자리에 서서, 가게 안을 한참 바라봤다.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가, 다시 바로 세웠다가, 유리 너머를 오래도록 지켜봤다.

잠시 후, 코케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돌려 다시 빠후로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코케미는 똑똑해서 원래 동네를 혼자 산책하는데, 미용실에서 일하는 여성 디자이너를 좋아해서 매일 혼자 산책을 가서 미용실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온다고 했다. 닭 한 마리가 매일 같은 미용실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꽤 근사한 도시 전설이 될 만한 이야기였다. 한국이었다면 TV 동물농장에 소개될만한 사연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장면을 머릿속에 넣어둔 채, 다시 빠후로로 돌아왔다. 아후로는 이마와노 키요시로와 야자와 에이키치의 노래를 하루 종일 틀었다.

해가 기울 무렵, 슬슬 배가 고파졌다. 오전부터 술만 마셨더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별 생각 없이 한 마디를 꺼냈다.

“라멘이 먹고 싶다.”

그 말이 이렇게까지 일을 키울 줄은 몰랐다.

아후로는 한동안 바 안을 왔다 갔다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찬근. 라멘 먹으러 가고 싶지?”

그리고 그대로 가게 문을 닫았다. 안에 있던 펑크들, 시로, 쿠로, 코케미까지 전원 집합이었다.

우리는 10인승 도요타 버스로 향했다.
아무도 인원 수를 세지 않았다.
타는 데까지 타고, 빈자리가 없어도 어떻게든 끼어 앉았다.

10인승 도요타 버스 안에 사람 열댓 명, 개 두 마리, 닭 한 마리가 탔다. 그리고 나고야 시내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버스 안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시로와 쿠로는 좌석 사이를 돌아다녔고, 코케미는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이따금 날개를 퍼덕이며 이곳저곳 날아다녔다. 엉망진창이었다.

라멘집에 도착해서 우리는 줄지어 내렸다.
라멘과 술을 주문했고, 대화는 엉망이었지만 미친듯이 재밌었다. 아후로는 토바와 나에게 번갈아 가며 갓파 흉내 내는 법을 알려줬고, 내가 성공할때마다 배를 잡고 깔깔댔다. 잊지 못할 즐거운 밤이었다.

다음날 나는 모두와 조용한 인사를 나누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한 명의 외국인을 자기네 비밀 아지트의 멤버로 받아준 며칠간의 우정. 나는 훗날 반드시 빠후로로 돌아오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다.

2년 뒤, 나는 다시 나고야에 갔다. CRUCIAL SECTION과의 투어였고, 역시 정신없었다. 공연이 끝난 뒤, 우리의 공연을 보러 와 준 ROTARY BEGINNERS의 드러머 토바를 만났다.
선채로 안부를 물으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코케미 이야기가 떠올랐다.

“코케미는 잘 지내나요?”

토바는 껄껄 웃었다.
잠깐 웃음만 흘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개한테 물려 죽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들고 있던 술잔을 형제, 코케미에게 바쳤다. 그러면서 물어죽인 개가 제발 시로, 쿠로는 아니었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시간이 훌쩍 흘렀다.

나는 FTS로 두 번 더, 서울돌망치로 한 번 더 아이치현의 나고야, 오카자키 등을 투어로 방문했지만, 투어의 스케줄 상 따로 시간을 내어 빠후로에 가지 못했다. 언젠가 개인 여행으로라도 들르리라 다짐했지만, 먹고살기 바쁜 일상은 좀처럼 내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몇 해 전, 아후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제일 먼저 빠후로의 순간들과 도요타 버스와 라멘을 떠올렸다. 나고야의 시끄러운 펑크들, 개 두 마리, 닭 한 마리, 술 냄새, 웃음소리들.

아후로는 원래 거친 사고뭉치였다. 늘 술에 취해 있고, 시끄럽고, 언제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은 인간 같았다. 한국 투어 이후 홀로 홍대거리에 남아 일주일간 노숙을 하고 돌아갔던 자유인 아후로. 그래도 누군가가 “라멘이 먹고 싶다”고 말하면, 가게를 닫고, 개 두 마리와 닭 한 마리까지 태우고, 밤거리를 달려주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술도, 라멘도, 음악도 건넸다. 이마와노 키요시로와 야자와 에이키치, 일본 록의 또 다른 계보를 처음 들려준 것도 아후로였다. 그때 그가 알려준 노래들은 아직도 내 플레이리스트에 남아 있다. 그 노래들을 들을 때마다 빠후로의 매케한 공기가 떠오른다.

개 두 마리, 닭 한 마리,
술 취한 펑크들, 빠후로, 도요타 버스, 라멘집.
지금은 없는 사람들과, 없는 동물들과,
어딘가로 흩어져 버린 밤들.

나는 조용히 술 한 잔을 마셨다.
아후로에게, 코케미에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같이 경험했던 평안에게.
엉망진창 나고야의 밤들,
불량 중년들과 친구들, 그리고 한 마리 닭을 위해. 영원히 늙지 않을 Romanticists 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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