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FORWARD 한국 투어
2015년 9월, 아직 여름이 다 식지 않은 서울이었다.
일본 하드코어의 최전선, FORWARD가 한국에 왔다. 전 DEATH SIDE 멤버들이 속해 있는, BURNING SPIRIT 하드코어. 지금도 도쿄, 나아가 일본 하드코어 전체의 선봉에 서있는, ‘일본 하드코어의 대표 밴드’라고 불러도 되는 존재였다.
그 포워드를 한국으로 부른 건 반란(BANRAN)의 보컬 강용준, 드러머 조훈희였다. 용준은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OBSTRUCTION, GUERRA FINAL 같은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이어가게 되는, 한국 하드코어 펑크 역사에서 입지적인 인물이고, 훈희는 지금은 씬을 떠나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지만, 당대 한국 최고의 드러머 중 한 사람이었다.
버닝 스피릿, JAPCORE, DEATH SIDE.
그 계보의 최전방에 서 있는 밴드.
하지만 포워드는 단순히 하드코어 사운드로만 유명한 밴드는 아니었다. 멤버들이 젊은 시절부터 거칠고 폭력적인 세계와 깊게 엮여 있었다는, 온갖 무시무시한 소문들이 따라다녔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온다고 하니, 모두가 흥분했고, 동시에 조금씩 긴장했다.
‘너무 기대되지만, 약간은 두렵다.’
그때의 공기는 대략 그런 느낌이었다.
그 긴장은, 막상 그들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맥없이 풀려버렸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광장시장 일대를 돌아다니던 포워드 멤버들이 장난감 플라스틱 칼을 들고, 길 한가운데서 배를 찌르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했다.
“자살한다!!! 자살한다!!!”
그 목격담을 SCUMRAID의 류지환을 통해 전해 듣고 나는 웃었다. 도쿄 레전드, 전쟁 같았던 8~90년대 재패니즈 하드코어의 일화들, 어두운 골목, 거친 동네, 위험한 사람들. 이런 키워드들로만 상상하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장난감 칼 들고 광장시장을 뛰어다니며 아이 같은 얼굴로 “자살한다”를 외치고 있었다는 사실.
‘아, 생각보다… 귀엽네.’
첫 라이브는 신촌과 홍대 사이에 있던 라이브하우스, 살롱 바다비였다.
한국 하드코어 펑크, 특히 우리 친구들에겐 중요한 이름이지만, 바다비는 애초에 펑크 전용 공연장은 아니었다. 장르 불문, DIY 감성으로 가득 찬 한국 인디 씬의 보물 같은 공간이었다.
SKUNK HELL, CLUB SPOT 같은 펑크 공연장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나자, 하드코어/펑크 밴드들은 갈 곳을 잃었다. 2016년, 우리에게 고향이 되어 줄 GBN LIVE HOUSE가 문을 열기 전까지의 공백기. 그 디아스포라의 시절에 바다비는 거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지금은 CLUB SHARP와 BABY DOLL이 서울 펑크의 성지로 자리 잡았지만, 그 시기의 우리에게 “공연을 어디서 기획하지?”라고 물으면 답은 늘 하나였다.
살롱 바다비.
포워드의 첫 한국 공연 장소가 바다비였다는 건 우리 입장에서 꽤 상징적인 일이었다.
일본 하드코어의 정점이, 우리의 디아스포라 거점으로 내려온 셈이었으니까.
그날의 바다비는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포워드가 한국에 왔다.'
공연장의 습기, 사람들의 열기, 앰프의 잡음 속에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겹쳐졌다.
보컬 이시야는 처음 보면 그냥 무서운 아저씨였다. 날카로운 눈매, 특유의 콧수염, 살집이 있지만 단단해 보이는 몸, 모히칸 머리. 거기에 전체적인 아우라, 목소리, 무대 위 기세까지.
그런데 그는 채식을 실천하며 알리고, 반핵, 반전 집회에서 공연하다 연행된 적도 있는, 일본 펑크 씬에서 하나의 사회적 무브먼트를 이끌어 온 사람이기도 했다. 그 모든 정보가 뒤섞여서, 그는 더 묘한 존재감을 풍겼다.
라이브가 시작되고, 쏟아져 나오는 포워드의 하드코어 사운드로 바다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시야가 곡 사이사이마다 외치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친구!!!”
“친구! 사랑해요!! 친구!!!”
일본어 억양이 섞인 한국어였다. 문장은 단순했고, 발음도 어색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내 심장에 꽂혔다.
펑크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과거사 문제, 아직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 교과서, 독도, 위안부 문제, 국가와 역사 단위의 문제들 때문에 일본 펑크들과 어울리는 것을 문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바다비에서, 이시야가 계속 “사랑해요, 친구”를 외칠 때, 나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펑크에는, 국경이 없다.’
아주 단순하고, 그래서 더 당연한 진리다.
모두가 기다리던 곡이 있었다.
〈What’s the meaning of love?〉
가사는 일본 웹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 곡이다. 그렇다고 내가 가사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노래의 기본적인 정조는 다들 알고 있었다. 폭력과 거친 방황으로 얼룩진 길을 오래 걸어온 사람이. “그래서 사랑이 뭐냐?”를 묻는 노래.
인트로가 나오자, 바다비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그 전까지는 “드디어 포워드가 한국에 왔다”는 흥분이었다면, 이 곡이 시작될 때의 공기는 조금 더 이상했다. 어깨를 부딪치고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어딘가 조용해지는 느낌.
젊은 시절부터 방황과 분노, 자기 고집으로 버텨 온 사람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작은 라이브하우스 무대 위에서 붙잡은 단어가 “사랑”이라는 사실.
멋있었다.
이상적인 수사로 꾸며진 멋이 아니라, 실제 세상과 몸을 부딪히며 전력으로 살아온 시간들이 만든, 단단한 깨달음의 멋.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서로를 밀치고 떠받치면서도 후렴 한 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누군가는 그 날을 그저 미친 듯이 끝내줬던 라이브 정도로 기억하겠지만, 누군가는 거친 방황의 한가운데를 지나온 사람이 방황의 끝에서 사랑을 말하는 장면으로 기억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날 바다비를 가득 채운 건, DEATH SIDE의 전설도, BURNING SPIRIT의 계보도 아니고, 그냥 한 문장이었다.
“사랑해요! 친구!”
공연이 끝나고, 가벼운 회식이 이어졌다. 술 몇 잔, 라이브 후의 허기를 채우는 음식들, 단체로 건배를 하며 서로 “수고했다”고, 언어가 안 통해도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짓들. 그리고 본격적인 뒷풀이는 홍대 윗잔다리 공원으로 옮겨갔다.
홍대 놀이터 펑크 시대가 끝난 이후로, 밖에서 모여 술 마시는 일은 거의 사라졌었다. 시대도 바뀌었고, 놀이터에 우리가 있을 자리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다들 괜히 옛날 감정이 들었는지 자연스럽게 인적이 드문 윗잔다리 공원으로 향했다.
포워드는 일본에선 “무시무시한 아저씨들”이었지만, 여기서는 어차피 외국인이었다. 게다가 이미 광장시장에서 장난감 칼을 휘두르던 천진난만한 모습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일까, 슬슬 장난이 시작됐다. 주인공은 우리 FTS의 기타리스트, 심지훈이었다.
심지훈은 드러머 아키야마와 장난을 치다가 그의 슬리퍼를 슬쩍 뺏어버렸다. 정확한 기억은 흐릿하다. 서로 슬리퍼를 바꿔 신었는지, 장난치다가 그대로 신고 가게 된 건지. 어쨋거나 이것이 포워드 투어를 되새길때마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바로 그 아키야마 슬리퍼 사건이다.
심지훈이 아키야마의 슬리퍼를 신고 집에 돌아갔고, 며칠 뒤, 군대 휴가를 나온 지훈이의 동생이 그 슬리퍼를 신은채로 부대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 슬리퍼를 신고 군생활을 하다 그대로 두고 전역했다.
그러니까 지금도 어딘가, 어느 부대의 어떤 생활관에서는 도쿄 하드코어 레전드, 포워드 드러머의 슬리퍼를 신고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 군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주로 PX나 흡연장을 다녀오면서, 그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리라. 한국과 일본, 하드코어와 군대, 펑크 레전드와 한국의 군인, 모든 것이 이 한 켤레의 슬리퍼로 연결된 셈이다.
2일차의 무대는 낙성대였다.
낙성대, 사운드마인드.
홍대, 신촌, 이태원처럼 클럽 이름만 들어도 풍경이 떠오르는 동네가 아니었다. “낙성대에서 하드코어 공연을 한다”는 말 자체가 어딘가 낯설었다. 나 역시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 동네에서 공연을 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날 라인업 중에 내가 활동하는 밴드, 서울돌망치도 있었다.
하지만 포워드 멤버들은 공연 중간에 밥을 먹으러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서울돌망치의 무대는, 말 그대로 밥 타임 사이에 사라진 무대였다.
“포워드가 못 본 서울돌망치 라이브.”
그게 낙성대 공연에 대한 내 짧고 정확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 날 공연의 키워드는, '참이슬'이었다.
전 날, 놀이터에서의 뒷풀이가 끝난 뒤 숙소로 돌아왔을 때 이시야는 이미 꽤 만신창이였다. 한국 소주, 특히 참이슬과 정면으로 맞붙은 날이었으니까. 많은 일본 펑크 씬의 주당들이 한국에서 참이슬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쓰러지는 모습을 많이 봤다. 그 밤도 그랬다. 숙소에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마지막에 남아 있었던 얼굴은 선명하다. 나, 류지환, 그리고 포워드 멤버들.
술병이 비어 갈 즈음, 이시야가 2리터짜리 생수 페트병을 집어 들었다. 아무 말 없이, 거의 사투하듯이 그 물을 원샷했다. 꼬로로로록. 꿀꺽꿀꺽. 꼬로로로록. 꿀꺽꿀꺽. 목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상승하는 참이슬과 하강하는 2리터 생수의 대결. 그리고 이어지는 몇 차례의 괴성.
옆에서 보고 있자니 괴롭고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시야 씨, 내일 무대 설 수 있나…?’ 싶었다. 그 예감은 절반쯤 맞았다.
2일차 사운드마인드에서의 포워드는 여전히 멋있었지만, 그 날 이시야의 마이크에서 “사랑해요, 친구!” 보다 더 자주 튀어나온 말이 있었다.
“참이슬!!! FUCK OFF!!!”
곡 사이사이,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말을 계속 반복했다. 전날 바다비에서 “사랑해요, 친구!”를 연발하던 사람과 같은 인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그날의 이시야는 모든 원한을 참이슬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래도 무대 위에서의 포워드는 역시 포워드였다. 소이치의 기타는 그날도 칼처럼 날카로웠다. 도쿄 하드코어의 긴 역사가 피킹 사이사이에서 번쩍거리며 존재감을 뿜어냈다. 베이시스트 유우는 여전히 과묵했고, 한쪽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베이스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과 관련된 거친 소문들과는 전혀 다른, 어른의 상냥함이 느껴졌다.
공연이 끝난 뒤, 이시야는 결국 공연장 앞 잔디밭에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하늘을 보며 옆으로 누운 그는 연신
“참이슬 FUCK OFF!!!”
를 외쳐댔다.
그 옆에서 감동에 젖은 사람들이 다가가 인사하는 동안에도 그는 “참이슬 FUCK OFF!!!” 그리고 연이어 “사랑해요!! 친구!!!”를 번갈아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2일차의 라이브가 막을 내렸다.
반란이 예약한 숙소는 생각보다 꽤 넓었다. 포워드는 다음 날 이른 시간에 공항으로 떠나야 했고, 용준과 훈희는 아침 픽업을 위해 먼저 돌아갔다. 숙소에 남은 건 지환과 나, 그리고 포워드 멤버들이었다.
모두들 제법 피곤해 보였지만, 술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둘러앉아 술을 더 따랐다.
어느 순간, 대화가 영화 이야기로 흘렀다. 이시야는 박찬욱 감독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본업이 글 쓰는 작가라서, 한국 영화에 대해 글을 쓴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했다. 도쿄 하드코어의 프런트맨이자, 투어 중에도 채식을 실천하며 반핵 운동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국 영화의 특정 장면들을 꺼내 얘기하고 있으니 신기하고 친근했다.
지환은 한쪽에서 노래를 틀기 시작했다. 일본의 옛날 노래들, 한국의 옛날 노래들, 자신이 아는 떠오르는 노래들을 마구잡이로 재생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플레이리스트가 분위기를 띄워주기보다는 다들 약간씩 피곤해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거다. 술자리는 즐거웠고, 영화 이야기, 이런저런 잡담들이 오가는 중에 노래만 계속 바뀌니 누구도 집중해서 듣지 못했다. 그냥 배경 소음처럼 흘러갔다.
그때, 내가 한 곡을 골랐다.
포크 크루세이더즈(FOLK CRUSADERS)의 〈임진강〉
나는 이 노래가 가진 의미를 알고 있었다. 분단, 강, 돌아갈 수 없는 땅, 그리고 그 강을 사이에 둔 사람들의 이야기. 예전에 자이니치 관련 영화들을 보고 난 뒤 가끔 떠올려 듣곤 했고, 대학교 때 민중가요 동아리 시절에는 북한 버전의 원곡도 불러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그냥 일본의 옛 포크송 하나 더” 정도의 느낌으로 선택했다. 그저 술자리 BGM의 한 곡으로 말이다.
그런데 인트로가 흐르자마자, 방 안의 공기가 조용히 바뀌었다. 이시야의 눈가가 갑자기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자기의 아내가 매우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자기 아내는 재일 한국인, 자이니치 출신이고, 그래서 이 노래는, 그녀와 자신의 삶에 아주 깊이 연결된 곡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복판이 저려왔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 한국 국적자로 살아온 내게 임진강은 영화와 노래로 배운 강이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지금도 가족의 강, 자신의 강, 현재형의 강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그 노래에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건 단지 피상적인 지식에 가까웠다는 걸 알았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한 곡의 노래로 인한 감동적인 순간을 서로가 경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그것도 잠시,
감동이 영원히 이어지진 않았다.
노래가 끝나고, 술잔이 채워지기 시작하자 다시 각자의 언어와 농담이 튀어나왔다. 나와 류지환은 계속 “조금만 더 마시자”고 했고, 이시야는 결국 무서운 얼굴로 변하더니 두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만 자라!!! 제발 자게 해줘!!!”
우리는 그제야 멋쩍게 웃으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우리도 이미 충분히 마신 밤이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소이치가 굉장히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로 우리에게 건넸던 마지막 한마디였다.
“Sweet dreams, sweet dreams.”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나와 류지환만 남아 있었다. 포워드는 이미 공항으로 떠난 뒤였고, 침대는 우리가 차지한 채 자고 있었다. 우리는 기획자도 아니었는데, 그저 하루 더 놀러 가서 20살은 더 많은 투어 아티스트들의 침대를 뺏은 셈이었다. 심지어 분명 공항까지 함께 배웅 나가겠다는 계획까지 있었는데 그마저도 날려버렸다.
작별 인사도, 배웅도 하지 못했다는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머리맡을 내려다보니 낯익은 담배가 서너 갑 놓여 있었다.
와카바(わかば).
전날 밤, 담배가 떨어진 내게 유우가 몇 개비 줬던 바로 그 담배. 편지도 없었고, 메모도 없었다. 그냥 담배 몇 갑만 말없이 놓고 떠난 것이다. 그에 대한 과거의 거친 소문들의 진위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만난 유우는 그저 과묵하고 다정한, 속 깊은 어른이었다.
그 후 귀국길 공항에서, 소이치가 눈물을 흘렸다는 소식도 들었다. 젊은 시절부터 거친 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기타리스트, 도쿄 하드코어의 한 축을 만든 사람이 이틀 간의 한국 투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무슨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을지, 나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NO BORDER PUNK ALWAYS WIN."
서울까지 날아와 작은 라이브하우스 무대에 서서 “사랑해요! 친구!!!”를 외치며 역사와 감정의 국경선을 그냥 목청으로 넘어 버리던 사람들. 〈임진강〉 한 곡에 눈시울이 붉어지던 보컬. 아침 일찍 아무 말 없이 와카바 담배 서너 갑만 머리맡에 두고 떠난 베이시스트. 공항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기타리스트. 그리고 이름 모를 타국의 젊은 펑크에게 영문도 모른 채 슬리퍼를 강탈당하고도 사람 좋게 웃던 드러머.
결국 그 모든 장면이, 저 한 줄의 슬로건에 대한 증거들처럼 느껴졌다.
국경선은 여전히 굳건하고, 언어도 다르다. 풀어야 할 정치, 역사 문제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그 모든 걸 뚫고 같은 밤, 같은 무대, 같은 노래를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어쨌든 작은 승리가 하나 남는다.
그 승리는 거창한 혁명이나 영웅담이 아니다. 국경선을 없애 버리고, 전쟁을 멈추는 기적도 아니다. 그저 공연이 끝난 뒤 각자 삶으로 돌아가서도 한동안 지워지지 않는 멍든 팔, 쉰 목소리, 플레이리스트 한 구석에 남은 노래 몇 곡, 짬뽕 국물 냄새에 불쑥 떠오르는 얼굴들에 가깝다.
각자 제자리로 돌아간 뒤, 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내일의 노동을 버티게 하고, 망가진 현실 속에서도 다음 합주와 라이브, 투어를 기획하게 만든다.
그것은 한 번쯤은 더 싸워볼 힘이 남는 정도의 승리다.
국적과 언어가 달라도, 타국의 작은 지하 라이브하우스에서 같은 후렴을 외쳤다는 기억, “어느 나라에도 나 같은 인간들이 산다”는 확신, 그래서 하루를 더 버티고, 한 번 더 믿어보는 마음.
그들이 말하는 승리는 아마 그런 마음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일 거다.
그들은 하드코어 사운드에 그런 마음을 담아 굳이 이름을 붙이려 했던 사람들이다.
〈What’s the meaning of love?〉라고 묻고, “사랑해요, 친구!”를 끝까지 외치던 밴드.
NO BORDER PUNK ALWAYS WIN.
그 문장은 결국,
국경을 넘어서도 이런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고집에 대한 선언이다.
세상을 다 바꾸지는 못해도, 서로를 향해 끝까지 내미는 이 한 줌의 고집.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부를 것이다.
사랑.
내가 기억하는 2015년 9월,
포워드 한국 투어는 그렇게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