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형제 밴드, CRUCIAL SECTION.
CRUCIAL SECTION과의 인연은 반란이 기획한 한국 투어에서 시작됐다.
크루셜 섹션은 90년대 후반부터 일본 반다나 스래시를 이끌어 온, 그 계보의 선두에 서 있는 밴드이다.
보컬 히로는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스래시/US 하드코어 펑크 레이블인 CREW FOR LIFE를 운영하고 있고, 도쿄 니시오기쿠보의 라이브하우스 PIT BAR의 주인이기도 하다. 한국과의 이 첫 연결 덕분에, 히로는 우리보다 먼저 반란과 SCUMRAID의 일본 투어를 기획해 주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크루셜 섹션과 우리가 형제 밴드처럼 가까워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밴드 인생에서 10일이 넘는 장기 투어를, 그것도 두 번이나 함께 다니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히로의 첫 인상은, 내가 이전까지 알고 있던 일본 펑크들과는 조금 달랐다. 막 나가는 무서운 인상이라기보다는, 책임감과 고집이 얼굴에 단단하게 박혀 있고, 자기 기준이 분명한 타입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딱딱하기만 한 사람도 아니다. 히로는 엄청 웃긴 걸 좋아하고, 직접 사람들 웃기는 걸 더 좋아했다. 투어 밴 안에서든, PIT BAR 카운터에서든, 숙소에서든, 투어 중에 제일 먼저 바보 같은 농담을 던지는 쪽은 항상 히로였다. 한 번 빵 터뜨려 놓고는 씩 웃고, 다시 자기 볼 일로 돌아가는 스타일.
나중에 일본에 가서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역시나 한 씬을 이끄는 사람 특유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역사가 오래된 일본 펑크씬에서 비교적 젊은 리더에 속하지만, 연배가 높은 펑크들도 그를 쉽게 대하지 못하는 공기가 있었다. 웃길 땐 끝까지 웃기지만, 자기 레이블과 공간, 지역 씬을 책임지는 문제에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
히로는 일본 하드코어 펑크 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고, 크루셜 섹션 역시 일본 하드코어 펑크사에서 하나의 계보를 이룬 밴드다. 크루셜 섹션의 얼굴은 히로지만, 이 밴드의 풍경을 완성하는 건 나머지 네 사람이다.
기타리스트 와다는 장발에 수염을 기른 모습부터가 이미 평범하지 않았다. 어딘가 산에서 내려온 신선 같기도 하고, 코엔지 골목을 떠도는 요정 같기도 했다. 체구는 작고 말랐지만, 무대 위에 올라가면 누구보다 눈길을 끄는 사람. 크루셜 섹션의 마스코트, 말 그대로 “코엔지의 요정”이었다.
두 번째 기타리스트 신야, 별명은 스나이퍼. 투어 기간 중 휴식 날이나 도쿄에 머무를 때, 우리는 그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말수는 적고, 조용히 웃는 타입이었지만, 항상 우리를 위해 침구를 챙겨주던 사람. 왜 별명이 스나이퍼인지 물어본 적도 없고, 누가 설명해 준 적도 없지만, 라이브하우스 한 켠에서 늘 묵묵히 라이브를 지켜보는 모습을 보면, 왠지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베이스 모리타는 전형적인 쾌남형이었다. 말투도, 표정도, 웃음도 시원했다. 특이한 건 말버릇이었다. 그가 있는 라이브하우스를 가면,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지하에서 먼저 이 한마디가 들렸다.
“마지데???????”
(진짜????????)
그 과장된 놀람 한 방이면 굳이 확인할 것도 없었다.
아, 오늘도 모리타가 있구나.
영화 취향도 나와 딱 맞아서 금방 가까워졌는데, 어느 날 내게 멋진 선물을 줬다. 자신이 직접 만든 갱스터 영화 포스터 스크랩북이었다. 일본 개봉판 갱스터 영화 포스터들만 모아놓은 두툼한 스크랩북. 나 같은 영화 덕후에게는 말 그대로 보물이었다. 그 스크랩북은 아직도 내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드럼 이타루는 일본 동인 만화 씬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만화가다. 그의 작품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일본이란 나라 자체가 만화 강국이다 보니, 메이저 상업 만화 말고도 동인 씬이 엄청 크고, 그 안에서 팬덤을 가진 작가들도 많다고 들었다. 이타루가 딱 그런 케이스였다.
한국에 왔을 때는 한국 만화와 로봇에 꽂혀서, 태권V 피규어를 사겠다며 투어 중 틈만 나면 장난감 가게를 뒤지고 다녔다. 결국 원하는 걸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며 한숨을 쉬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중에 일본에 갔을 때, 한국 펑크 친구 ‘태권이’를 이타루에게 소개해 준 적이 있다. 이타루는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태곤… 태… 구온…??”
하더니, 어디서 배웠는지 태권V 주제가를 큰 소리로 불렀다. 태권이도, 나도 그대로 빵 터졌다. 그런 사람이다.
지금은 신야와 이타루가 크루셜 섹션을 떠난 상태다. 각자의 이유가 있었을 거고, 밴드 멤버가 바뀌는 일은 나 역시 너무 많이 겪어봐서 굳이 캐묻고 싶지도 않다. 적어도 내게 크루셜 섹션은, 가장 오래 함께 투어를 돌고 무대를 공유했던 다섯 명의 밴드로 기억된다.
히로, 와다, 신야, 모리타, 이타루.
나중에 2025년 서울돌망치 3일 투어 때는 신야 없이 4인 편성에 드럼 멤버도 바뀌어 있었지만, 내 머릿속에서 “크루셜 섹션”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얼굴은 언제나 이 다섯 명이다.
그리고 이 다섯 명과 우리의 인연은, 어느 순간부터 한국과 일본을 몇 번이고 오가는 왕복선처럼 이어지기 시작했다. 반란과 함께했던 한국 투어에서 뜨겁게 같이 연주하고, 같이 관광하고, 밥 먹고, 술 마신 인연으로 히로는 결국 우리 FTS를 도쿄로 부르게 됐다.
2015년 11월, 늘 그랬듯 출발 전부터 FTS답게 엉망진창이었다. 공항에서 첫 판부터 불안했던 건 역시 이동혁이었다. 출국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얼굴이 안 보였다. 티켓팅을 마치고, 수하물을 붙이고, 보안 검색대를 지나고, 탑승구에 도착했는데도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야… 진짜 이 새끼 안 오는 거 아니냐…?”
“투어 망했네…?”
애써 농담은 했지만, 웃음은 안 나왔다. 동혁이가 비행기를 놓치면, 우리의 인생 첫 도쿄 라이브가 통째로 날아가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기내에 착석하고 나서도 동혁이는 보이지 않았다. 탑승구가 닫히고, 위에 짐 넣는 소리가 하나둘씩 줄어들고, 안내방송이 흐르고, 안전벨트를 매라는 말이 나오고, 승무원들이 마지막 체크를 하고 지나가는데도, 동혁이 자리만 텅 비어 있었다.
그때, 이코노미석 앞쪽에서 승무원 둘에게 둘러싸인 한 남자가 기내의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면서 걸어 들어왔다. 지각꾼 동혁이었다. 승무원들은 최대한 인자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모든 승객들의 눈빛은 같았다.
‘저놈 때문에 우리 비행기가 늦게 뜨는구나.’
동혁이는 그 눈총들을 정면으로 맞아가며 자기 자리를 찾아 쭈뼛쭈뼛 걸어왔다. 스튜어디스 두 명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오는 모습에 순간 빼실빼실 웃음이 튀어나왔지만, 나는 곧바로 입술을 앙다물고 꾹 참았다. 웃는 순간 저 눈총들이 내게도 날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FTS 멤버 전원이, 출발 직전 간신히 같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게 우리의 첫 도쿄 투어의 시작이었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카드부터 쓰기 시작했다. 멍청함도 전염이 되는 걸까? 직업란을 채우면서, 상식적으로 ‘회사원’, ‘학생’ 같은 단어를 쓸 수도 있었다. 방문 목적에는 ‘관광’이라고 쓰면 됐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상식 따위는 몰랐다.
멤버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렇게 썼다.
직업: PUNK ROCKER
방문 목적: BAND TOUR
누가 주도한 것도 아니었다. 쓰고 보니 전원이 똑같이 적어 놓은 것이다. 타국 입국 심사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돈키호테들. 그게 우리였다.
입국 심사대 행렬에 서서 짐을 검사대에 올리고 하나둘씩 앞으로 나아가는데, 또 사고가 났다. 이번에도 주인공은 동혁이었다.
우당탕탕.
무슨 일인지, 우리가 준비해 간 머천과 버튼들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FIND THE SPOT 로고와,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는 내 얼굴 사진이 박힌 버튼들이 일본 입국장 바닥을 반짝거리며 굴러다녔다.
입국 카드를 엉망으로 작성한 건 그때는 문제인 줄도 모르고 있었지만, 버튼들을 쏟았을 땐 살짝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 이상한 놈들이라고 오해받겠다…’
걱정이 머릿 속을 채우고 있을 때, 검사대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동혁과 우리 얼굴을 차례대로 훑어보고, 아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PUNK ROCKER 데스까?”
(펑크 록커입니까?)
순간 긴장이 살짝 풀렸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하이…”
(...네… 네...)
그는 우리를 한 번 더 훑어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오오, 카코이! 카코이!!”
(오오, 멋있다! 멋있어!!)
그러더니 두 손으로 ‘오케이, 오케이’ 제스처를 하면서 입국 심사대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케이. 웰컴 재팬.”
그게 끝이었다.
직업: PUNK ROCKER,
방문 목적: BAND TOUR,
입국장 바닥에 굴러다니는 피흘리는 내 얼굴이 프린팅 된 버튼들.
그 조합으로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일본에 입국했다.
나중에 일본 친구들과 얘기하다가 깨달았다. 앞으로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오늘은 그냥 운이 좋았던 거다. 진짜 아무것도 몰랐던 바보 같은 펑크밴드가 운 좋게 통과한 사건.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 인생 첫 도쿄 투어의 문을 연 장면이 이 난장판이었다는 게 지금도 꽤 마음에 든다.
핏 바(PIT BAR)에 도착했을 때 기분은 묘하게 익숙했다. 나고야 라이브 직전에 스컴레이드 투어를 따라 도쿄에 먼저 왔을 때 이미 한 번 들렀던 곳이었으니까.
핏 바는 2014년에 문을 연, 당시 기준으로는 신생 라이브하우스였다. CREW FOR LIFE의 베이스 캠프이자, 도쿄 하드코어 펑크 씬의 새로운 성지 같은 공간. 도쿄의 수많은 펑크들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오는 구심점.
LET’S SLAM FEST.
그곳에서 열리는 이틀짜리 작은 축제였다.
미네소타에서 날아온 크로스오버 스래시 밴드 IN DEFENCE, 한국의 FIND THE SPOT, 그리고 CRUCIAL SECTION까지.
첫날, 히로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날 바로 옆 라이브하우스에서 BOOM BOOM KID의 일본 공연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붐붐 키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전설적인 뮤지션. 한때 하드코어 펑크 밴드 FUN PEOPLE의 보컬이었고, 이후 BOOM BOOM KID라는 이름으로 솔로 프로젝트를 이어가며 남미, 유럽, 일본을 끊임없이 도는, 남미 펑크의 아이콘 같은 존재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그 전설이, 지금 이 시각, 바로 옆 건물에서 라이브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걸 알게 된 순간, 솔직히 나도 흔들렸다. 붐붐 키드의 라이브를 보러 달려가고 싶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지구 반대편의 뮤지션. 아마도 내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였을지도 모르는 공연.
하지만 그날 내 자리는 옆 건물 지하, 핏 바의 무대 위였다. 나는 FIND THE SPOT의 보컬이었고, 오늘은 우리의 첫 도쿄 무대였다. 결국 붐붐 키드의 라이브를 보러 달려가는 대신, 우리는 LET’S SLAM FEST의 1일차를 그대로 치렀다.
문제는 관객 수였다. 핏 바가 문을 연 이후 역대 최저 관객 수를 찍었다고,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투어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히로의 얼굴이 어두워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우리는 그저 모든 게 즐거웠다. 해외 투어에 처음 나가보면 사실 관객 수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언어도, 간판도, 공기의 냄새도 다른 도시에서, 현지 밴드들과 한 무대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현실적인 기쁨이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한국에서 외국 밴드들의 투어를 기획할 때도 똑같았다. 기획자는 늘 적은 관객 수에 먼저 마음이 무겁다.
‘미안하다, 어쩌지? 손해가 너무 크지 않을까?’
이런 계산과 죄책감이 앞선다. 하지만 투어를 온 밴드 쪽은, 대개 재밌게 즐기고 좋은 추억만 잔뜩 쌓고 간다. 대형 메이저 에이전시가 붙은 투어라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펑크에서는, 적어도 우리가 있던 세계에서는 그랬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연습한 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즐겁게 공연을 마쳤다. 관객은 대부분 함께 공연한 밴드 멤버들이었지만, 그만큼 응집된 에너지를 주고받은 밤이었다.
그래서 LET’S SLAM FEST 1일차는, 히로에게는 핏 바 오픈 이래 최저 관객의 밤이었고, 우리에게는 드디어 도쿄에서 라이브를 한 기념비적인 밤이라는, 조금은 엇갈린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또 한 명의 인생 친구를 얻었다. 이름은 사코.
히로의 부탁으로, 그는 우리가 샤워할 수 있게 자기 자취방 욕실을 내줬다. 핏 바에서 땀에 절은 채로 근처에 있는 사코의 집까지 걸어가, 좁은 일본식 욕실에서 차례대로 땀을 씻어냈다. 사코의 집 벽 한쪽엔 낡은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집 곳곳에 레코드판, CD, 테이프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샤워를 끝내고 멤버들이 씻는 동안 나는 사코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펑크/하드코어라는 같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원래 그렇듯 금방 친해졌다.
그 당시 사코는 JOHN DOE의 보컬이었고, 지금은 일본으로 이주한 SCUMRAID 드러머 이주영이 활동하는 밴드 THE VERTIGOS에서 베이스를 치고 있다. 그 다음 해, 또 그 다음 해, 두 번의 전일 투어 동안에도 투어 중간에 샤워가 막히면 항상 사코가 등장했다. 나중에는 그가 한국에 여러 번 놀러 오기도 했고, JOHN DOE와 THE VERTIGOS로 한국 투어를 오기도 했다. 우리 투어의 위생과 존엄을 유지해 준 사코는, 훗날 한국 펑크씬의 모두와 친구가 됐다.
우리는 사코의 집에서 샤워를 마친 뒤 근처 이자카야로 뒷풀이를 갔다. 맥주와 사케, 꼬치와 튀김, 사시미들이 테이블 위에 하나둘 쌓여갈 때쯤, 우리를 만나러 온 손님들이 있었다.
VIVISICK의 타짱, 스나오, 히토시.
VIVISICK은 지금은 해체했지만, 90년대 후반부터 일본을 넘어 전 세계 스래시 하드코어 펑크 씬에서 전설로 자리매김한 밴드였다. 이들 역시 한때 반란의 기획으로 한국에 왔고, 우리는 그때 이미 친구가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비비식 멤버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맥주잔을 부딪히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그 장면을 보던 사코가 갑자기 굳어버렸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야… 너네, 어떻게 저 사람들이랑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친하게 지내…? 저 사람들은 영웅이야.”
그에게 비비식은, 그냥 ‘동네 선배 밴드’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우러러 보던, 말 그대로 영웅 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그 영웅들이 지금 자기 옆자리에서 한국 친구들과 술잔을 부딪히고 있으니, 현실감이 잠깐 날아갔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기도 잠시, 사코도 비비식들과 금세 친해졌고, 그날 밤은 웃음소리와 취한 목소리들로 끝까지 이어졌다.
나고야의 실패를 씻고 도쿄에 다시 선 첫 무대.
누군가에게는 영웅들과 친구가 된 날.
그리고, 사코라는 평생 친구 하나가 생긴 하루.
그렇게 첫날은 무사히 지나갔다.
2일차는 1일차와 완전히 달랐다. 이날은 관객들이 눈에 띄게 많이 모였다. 비비식 멤버들을 포함해 우리가 아는 얼굴들이 핏 바를 가득 채웠다. 공기가 확 달라졌고, 히로도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정확한 타임테이블은 이제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분위기는 이랬다. IN DEFENCE가 공연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그 뒤를 이어 CRUCIAL SECTION이 무대를 장악하고, 마무리를 우리가 맡았을 것이다.
IN DEFENCE의 라이브는, 말 그대로 “미네소타산 난장판”이었다. 근육질 보컬이 관객을 어깨에 들쳐매고 뛰어다니며 소리치고, 기타와 베이스는 시종일관 갈겨대고, 드럼은 라이브가 끝날 때까지 스네어가 찢어질 듯 두드려댔다. 빠르고, 시끄럽고, 미쳐버린 셋.
그 뒤를 이어 무대에 오른 건 CRUCIAL SECTION이었다. 2일차의 하이라이트는 이때 터졌다.
LET’S RAISE YOUR HANDS.
이 곡의 인트로가 나오자마자, 뭔가 해보자는 표정을 한 친구들이 스테이지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덩치 큰 사람들이 먼저 바닥에 엎드려 무릎꿇고 푸시업 자세로 1층을 깔고, 그 위로 또 다른 사람들이 타고 오르며 2층, 3층을 쌓기 시작했다.
인간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는 역시 와다가 올라갔다. 작고 마른 몸으로 맨 위에 올라타 기타를 잡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코엔지에서 날아온 요정 같았다. 히로는 아래에서 와다의 몸을 한 손으로 떠받치며 한 손엔 마이크를 움켜쥐고 노래하고 있었다. 살짝만 균형이 틀어져도 그대로 우르르 무너질 것 같은 형국이었지만, 관객들은 이 위험한 놀이의 법칙을 너무 잘 아는 얼굴이었다.
마지막 후렴이 터졌다.
“LET’S RAISE YOUR HANDS!!!”
와다는 꼭대기에서 한 손을 번쩍 들고, 아래의 사람들은 두 팔을 뻗어 따라 외쳤다. 그 순간만큼은, 핏 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보였다.
곡이 끝나자마자 피라미드는 그대로 와르르 무너졌다. 사람들이 바닥에서 서로를 부여잡고 웃으면서 일어났다. 누군가는 무릎을 부여잡고 있고, 누군가는 안경을 찾고 있고, 무대 위에서 모리타는 “마지데???”를 외치고, 나머지 멤버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 곡을 준비하고 있었다.
크루셜 섹션이 만들어 낸 펑크/하드코어 놀이문화의 극. 늘 나오는 장면은 아니고, 분위기가 정말 끓어오를 때만 등장하는 장면. LET’S SLAM FEST 2일차, 그 인간 피라미드는 그렇게 우리 기억에 각인됐고, 이듬해와 그 이듬해, 두 번의 전일 투어 동안 우리는 FTS의 이름으로 LET'S RAISE YOUR HANDS 를 커버했다. 히로와 함께 노래를 불렀고, 수많은 인간 피라미드를 재현해 냈던 잊지못할 장관들.
2일차의 마지막은 우리 FTS가 이어 받았다. 나고야의 실패를 만회하듯이, 어제의 에너지를 그대로 이어가듯이, 한 곡 한 곡 악착같이 쏟아부었다. 크루셜 섹션, 인 디펜스, 비비식, 사코… 아는 얼굴들이 맨 앞에 서서 신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같이 소리쳐 줬다.
이 날의 라이브는, 투어에 동행했던 스컴레이드의 베이시스트 이동우 감독이 촬영해 줬다. 지금도 내 몸이 망가지고 라이브에 대한 열정이 식어갈 때면, 나는 이 날의 영상을 찾아 본다. 젊고 빛나던 우리의 모습과, 반짝이는 친구들의 눈빛들.
이틀 동안의 라이브가 끝났을 때, 히로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GREAT TOUR! GREAT TOUR!”
그리고는 다음에는 FTS와 크루셜 섹션의, 좀 더 긴 투어를 기획하겠다고 했다. 준비하고 있으라고.
우리에게 2015년 11월 LET’S SLAM FEST의 이틀은, FTS의 역사에서 ‘밴드다운 밴드’로서 첫 페이지를 넘긴 순간이었고, 평생 친구들을 잔뜩 사귄, 밴드 인생의 묵직한 한 챕터였다. 그리고 이 챕터는 크루셜 섹션과 FTS가 진짜로 형제 밴드가 되어 가는 긴 이야기의 첫 문단 정도였는지도 모른다.
이후 몇 년 동안 그 첫 문단 뒤로 문장들이 쭉 이어졌다. 2016년, 2017년, 두 번의 일본 전일 투어. 지도 위에 찍힌 도시 이름들은 비슷했지만, 공기는 매번 조금씩 달랐다. 첫 전일 투어인 ‘질풍 투어’는 말 그대로 질풍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모른 채, 히로가 운전하는 밴에 몸을 싣고, 아침에 눈 뜨면 다른 도시, 밤이면 또 다른 라이브하우스.
“아, 밴드는 이렇게까지 해보는 거구나.”
를 몸으로 배우던 시기였다.
두 번째 전일 투어, NETWORK / CONTINUATION IS OUR DEDICATION. 이번엔 서로가 서로에게 훨씬 익숙해져 있었다. 어느 도시에서는 누가 우리를 보러 올지, 어느 라이브하우스의 뒷풀이는 어떻고 뭐가 맛있는지, 어디에서 자고 씻을 수 있는지 웬만큼 알고 움직이는 투어. 처음 만난 외국 밴드가 아니라, 이미 몇 번이나 같이 먹고 자고 달려본 동료들끼리 도는 투어였다.
그 두 번째 전일 투어의 마지막은 일본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도쿄도, 나고야도, 오사카도 아니고, 서울 문래동 지하 라이브하우스 GBN. 일본 전역을 한 바퀴 휘돌고 와서 마지막 귀환지가 서울이라는 구조 자체가, 펑크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타임테이블이었다. 도쿄 밴드와의 전일 투어라면 보통 마지막은 도쿄에서 끝나는 게 정석일 텐데, 그 해 투어의 마지막 페이지는 우리에겐 그립고도 익숙한 문래동의 천장 아래에서 넘겨졌다.
그날 GBN은 말 그대로 미쳐 있었다. 스테이지 앞과 뒤, PA 부스 옆, 기둥 사이 어디서든 사람이 날아다녔다. 라이브 내내 누군가가 무대 위에 올라가 뛰어내렸고, 어깨에서, 머리 위에서, 사람들 손바닥 위에서 쉴 새 없이 몸들이 떠다녔다. 정확한 숫자를 셀 수는 없지만, 아마 GBN 역사상 최다 스테이지 다이빙이 터진 밤이었을 것이다. 모리타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베이스를 무대 위에 던져두고 써클핏 돌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일본의 도시들을 열흘 간 함께 돌고 돌아 각자 3주 휴식 후,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찍은 라이브였다. 전일 투어 전체의 에너지와 경험치는 극대화된 채였고, 체력은 완전히 충전된 상태. 에너지가 미친 듯이 폭발한 마무리였다.
그 뒤로 GBN이 폐업 위기를 겪고 있을 때, 크루셜 섹션이 다시 한국에 온 이유도 단순했다. 놀러 오는 투어가 아니라, 연대를 위한 라이브였다. 히로와 멤버들은 자기들 돈으로 항공권을 끊고, 아침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와 GBN에서 연주하고, 뒷풀이 한 번 하지 않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페이도 없는, 하루짜리 무상 서포트에 가까운 라이브였다. 히로는 나에게 이 한마디만을 남겼다.
"나는 너희를 돕고 싶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히로가 운영하는 레이블 CREW FOR LIFE는 FTS의 1집 정규 앨범을 내줬고, 시간이 더 흘러서는 서울돌망치의 두 번째 EP도 내줬다. 티셔츠, 모자, 에코백 같은 머천다이즈들도 그쪽에서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에 찍어 줬다. 큰 이익이 될 리 없는 일들이었지만,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흔쾌히 같이 작업해 줬다.
2024년 11월, 서울돌망치의 3일간의 일본 투어를 크루셜 섹션이 다시 기획해 주었다. 이번엔 FIND THE SPOT이 아니라 서울돌망치였다. 나는 다른 멤버들과 함께였고, 크루셜 섹션의 멤버 구성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핏 바의 공기, 라이브가 끝난 뒤 잔을 부딪히는 방식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어느새 히로와 나는, 한국과 일본 사이를 오가는 왕복선 한 척처럼 엮여 있었다. 여권에 찍힌 국적은 다르고, 서로 다른 언어로 욕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 사이에는 다른 종류의 약속이 한 줄 깔려 있었다. 기타를 메고, 베이스를 들고, 드럼 스틱을 쥐고, 작은 지하 라이브하우스 계단을 내려가 서로의 밴드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들끼리는, 언제든 다시 만나서 같은 밤을 만들 수 있다는 약속.
CRUCIAL SECTION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나는 여전히 몇 개의 장면을 동시에 떠올린다. 핏 바 입구에서, 그닥 반갑지 않은 척 까칠한 표정으로 농담을 던지며 우리를 맞이하던 히로.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기타를 치던 요정 와다. “마지데???”를 연발하던 모리타. 우리에게 침구를 내주던 신야. 태권V 피규어를 찾다가 끝내 실패했던 이타루.
그리고 그 장면들 사이를 실처럼 엮고 있는, 밴 안의 썩은 농담들, 미친듯이 폭소하던 순간들, 일본 고속도로 휴게소의 풍경들, 편의점 앞 새벽 공기, 투어 기간 내내 서로를 응원하며 웃던 얼굴들.
그 모든 장면과 서사를 한데 모으면, 이름은 하나로 모아진다.
내 인생의 형제 밴드, 크루셜 섹션.
나와 히로는 지금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는다. 새 밴드 얘기, 투어 얘기, 요즘 씬이 어떤지, 쓸데없는 농담 몇 개와, “언젠가 또 같이 하자”는 이야기.
가까운 시일 안에 우리는 아마 또 뭔가를 같이 만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뒤에도, 또 그 뒤에도 계속.
처음 만났을 때 히로가 우리에게 내밀었던 그 레이블 이름처럼. 한 번 같은 배를 탔으면, 끝까지 같이 간다는 뜻처럼.
CREW FOR LIFE.
그건 단지 한 레이블의 상호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건 아주 단순한 약속의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