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이마, 오카에리.

오카자키의 오래 이어진 인연들.

교토에서의 라이브를 마치고, 2016 <질풍> 투어의 4일차. 우리는 오카자키에 도착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카자키는 단순히 투어 일정 중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나와 오랫동안 깊게 얽혀 온 펑크 씬이다. FTS로 두 번, 개인적인 여행으로 한 번 이 도시를 찾았고, ACUTE와 CIG의 한국 투어, ATTACK SS의 한국 투어를 각각 한 차례씩 기획했다. 그리고 2024년 11월, 서울돌망치로 다시 한 번 이곳에 섰다. 몇 번의 방문이라는 숫자로는 설명되지 않는 시간과 얼굴들이, 이 도시에 겹겹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장은 오카자키와 이어진 기억들이 흘러온 방식 그대로를 따른다. 어느 해의 투어에서, 어느 밤의 공연장에서, 혹은 여행 중의 술자리에서 이어지며, 그 시간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이 글 역시 그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처음 이 도시에 도착했던 아침에서,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하게 된 밤까지. 오카자키와 나 사이에 쌓인 시간들을, 인물과 사건이 남긴 순서 그대로 기록해 두려 한다. 이제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

오카자키에 도착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리허설도 아니고 장비 체크도 아니었다. 밥이었다.

투어가 하루 이틀짜리면야 지역 음식도 먹고, 이자카야에서 여유 있게 뒷풀이도 한다. 하지만 장기 투어가 시작되면 그런 건 사치에 가깝다. 고속도로 휴게소, 공연장 근처 편의점, 차 안에서 급하게 때려 넣는 도시락이 기본이다. 다행히 일본은 편의점조차 평균 이상이지만, 그래도 한 단계 위가 있다면 저렴한 동네 마트다. 도시락도, 튀김도, 꽤 훌륭하다.

그날도 그랬다. 오카자키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트로 흘러 들어갔다. 각자 도시락 하나씩 고르고, 어디 대충 앉아서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트 입구 쪽이 묘하게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경품 박스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진행자가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단체 가위바위보.

이건 뭐, 안 낄 이유가 없었다. FTS와 CRUCIAL SECTION 군단은 도시락을 고르다 말고 그대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외국인 몇 명이 섞인 게 웃겼는지, 주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가위바위보는 빠르게 정리됐다. 몇 명씩, 아주 질서정연하게 탈락했다. 경품도 처음엔 소소했다. 휴지, 과자, 생수 같은 것들.


사람 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그때부터 슬슬 쓸 만하다 싶은 경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와다였다.

코엔지의 요정. 과묵하고, 체구 작고, 표정 변화 거의 없는 그 와다. 와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대하는 표정도 없었고, 긴장한 기색도 없었다. 그냥 무표정으로 팔을 올리고 가위바위보를 냈다.

그리고 이겼다.

다시.

또 이겼다.

사람이 네 명 남고, 세 명, 두 명이 되는 동안에도 와다는 그대로였다. 가위바위보를 내는 리듬도, 얼굴도, 자세도 변하지 않았다.

그냥 계속 이겼다.

그리고 마지막.

와다는 결국 모든 사람을 이겼고, 그 보상으로 자기 상반신만 한 시라누이 한 박스를 받아 들었다. 한국에서는 한라봉으로 불리는 고급 품종의 귤. 그 박스 사이즈라면 상당한 금액이었다고 했다.


몸집 작은 요정이 자기보다 큰 귤 상자를 안고 서 있는 장면. 그 순간 마트 한복판이 뒤집어졌다.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고, 모리타는 “마지데???”라고 중얼거렸다. 와다는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상자를 들고 서 있었고, 히로를 포함한 모든 일동이 와다의 사진을 찍었다.

코엔지의 요정 와다, 오카자키의 마트를 정복하다.

그렇게 마트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고 나서야, 우리는 차에 올랐다. 와다는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고, 우리는 계속 웃고 떠들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출발이었지만, 그때는 그냥 그게 오카자키인 줄 알았다.

그리고 그대로, 공연장으로 향했다. BOPPERS.
보퍼즈는 도로변에 붙어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간판만 보면 공연장인지 식당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보퍼즈를 보며 미국 영화에 나오는 국도변의 핫도그 가게를 떠올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긴 바와 주방이 보였고, 그 옆으로 작은 스테이지가 붙어 있었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은 거의 없었고, 모든 것이 한 공간에 압축돼 있었다. 공연장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떠들다 그대로 연주가 시작되는 장소에 가까웠다.

그날 밤은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크루셜 섹션의 라이브도 좋았고, 오카자키 씬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전날 교토에서 느꼈던 거리감은 여기엔 없었다. 굳이 분위기를 만들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고, 나는 공연 내내 관객들 사이에 섞여 몸을 부딪혔다. PIT BAR나 CLUB SHARP처럼 바닥과 무대의 경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우리와 또래인 PICNIC이 먼저 무대에 올랐다. 그들은 공연의 공기를 단번에 끌어올렸다. 그리고 ACUTE가 뒤를 이었다.

ACUTE는 내가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밴드였다. 그들의 라이브를 보게 된 것도, 같은 무대에 서게 된 것도 감회가 남달랐다. 음반으로 먼저 접했을 때의 인상은 분명 어두웠다. 음산하고 주술적인 느낌. 과거 오카자키 펑크 씬에 존재했던 불경한 이름, IKKA SHINJU(一家心中, 일가족 동반자살) 같은 밴드가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 품었던 감상에 가까웠다.

막상 무대 위의 ACUTE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음반에서 느꼈던 공포나 주술 같은 정서는 없었다. 느껴진 건 단단함과 열기였다. 연주는 안정적이었고, 멤버들의 표정에는 오래 무대를 지켜온 사람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베이스를 치며 노래하던 유조와 드럼으로 중심을 잡던 시바킨. 두 사람이 오카자키의 전설적인 밴드 TOMORROW 출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안정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ACUTE라는 밴드 이름과 과거의 개인적인 감상에서 연상했던 호러 이미지, 그리고 무대 위에서 마주한 멤버들의 강인하면서도 푸근한 얼굴들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간극을 해석하거나 정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날의 ACUTE는 그저 훌륭한 하드코어 펑크 밴드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공연이 끝나자 주방 쪽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음식 냄새가 투어로 지치고 허기진 우리의 위장을 자극했다. 파스타, 치킨, 샐러드, 튀김까지 다양한 요리들이 테이블 위로 계속 나왔다. 우리는 그대로 보퍼즈에서 단체로 뒷풀이를 했다. 공연과 뒷풀이가 같은 공간에서 이어지는 방식이 이 도시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날 나는 이 장소를 마음에 새겼다.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다시 오기까지는 8년이 걸렸다. 2024년, 서울돌망치로 이곳을 다시 찾았을 때에도 2016년에 느꼈던 공기와 흥겨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오카자키 시내의 작은 펍, 토루라는 남자의 가게였다. 그는 PICNIC 멤버들과 친구였고, 그날 우리는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PICNIC과의 인연도 이어졌다. 다음 해 투어, 한국 투어, 그리고 몇 년 뒤 다시 만난 자리까지. 토루는 그로부터 7년 뒤, 홍구와 함께 오카자키 여행을 왔다가 레코드샵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그는 지금 오카자키 시내에서 카레 가게를 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히로의 밴에 몸을 싣고 바로 나고야로 향했다. 첫 오카자키의 밤은 그렇게 끝났다. 공연장 이름과 몇몇 얼굴들, 그리고 뜨거웠던 공기만이 남았다.

1년이 지나, 2017년. 우리는 다시 오카자키에 왔다. CRUCIAL SECTION과의 두 번째 투어, NETWORK / CONTINUATION IS OUR DEDICATION 투어였다. 전날은 오사카, 다음 날은 도쿄. 일정 사이에 끼어 있는 하루라 여유는 없었다. 관광도, 긴 체류도 없이, 말 그대로 공연 하나를 위해 들렀다.

그날의 공연장은 RAGSLOW였다. 오카자키 펑크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DIY 공간. 낮에는 식당 겸 카페로 쓰이고, 밤이 되면 라이브하우스로 변하는 곳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공간 안에 모여드는 밀도 높은 열기에 온몸이 후끈거렸다.


저 멀리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우리 형제들, 나고야의 SYSTEM FUCKER가 우리를 보러 와줬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맥주 한 잔씩 부딪히며 서로의 안부를 나눴다.

공연은 최고였다. 두 번째 오카자키 방문이었고, 나는 그 사실이 괜히 벅찼다. ‘왔다’가 아니라, ‘돌아왔다’는 말을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무대에 올라 라이브를 시작하며 크게 외쳤다.

“타다이마!”
(돌아 왔어!)

그저 다시 왔다는 뜻으로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던 것 같다. 이후 무대에 오른 ACUTE의 공연이 달아오른 뒤, 유조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외국 놈들이 오카자키에 와서 ‘타다이마’라고 말하는 건 처음 본다.”

그는 잠깐 웃더니, 나를 보며 소리쳤다.

“어이! 오카에리!”
(어이! 어서 와!)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타다이마–오카에리.’ 일본어로는 일상적인 말이지만,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정서는 단순한 인사 이상이었다. 집, 고향, 가족 같은 감각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말. 나는 그냥 다시 왔다고 말했을 뿐이지만, 그것은 돌아온 사람의 언어였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RAGSLOW에서는 음식이 쏟아져 나왔다. 낮에는 식당으로 쓰이던 공간답게, 테이블 위가 금세 가득 찼다. 그 풍경을 보며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라이브하우스에서 공연을 하고, 같은 공간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 게 오카자키 씬의 전통일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그날 우리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밤새 달려 도쿄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히로의 밴에 몸을 실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도시에서 처음 외쳤던 “타다이마”와, 그에 돌아온 “오카에리”가 이후의 오카자키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말이 될 줄은.

그렇게 두 번째 오카자키의 밤도 지나갔다. 짧았지만, 분명히 ‘다시 돌아온’ 밤이었다.

그 다음에 오카자키를 찾았을 때는, 투어가 아니라 여행이었다. 서울돌망치와 FTS의 드러머 홍구와 함께였고, 여기에 고치의 이노우에가 합류했다. 이노우에는 시코쿠 펑크씬의 보스 격인 인물로, 일본 하드코어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와의 끈끈한 인연과 이야기들은 따로 한 챕터로 떼어내야 할 만큼 길어서, 여기서는 깊게 들어가지 않겠다. 다만 그가 함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여행의 즐거움은 이미 충분히 올라가 있었다.

이번에는 무대 위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오카자키 펑크씬에 놀러 온 방문객이었다. 나고야 공항에서 이노우에를 만났고, 공항 주차장 쪽으로 커다란 밴 한 대가 도착했다. ACUTE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오카자키에 머물던 이틀 동안 ACUTE 멤버들은 우리가 묵던 비즈니스 호텔부터 술자리, RAGSLOW, 마지막으로 나고야 RED DRAGON까지 밴으로 운전해줬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한국에도 종종 일본이나 해외의 밴드맨들이 라이브가 아닌 여행으로 놀러 온다. 그때마다 시간이 되는 사람들이 픽업을 가기도 하고, 휴가를 내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관광을 시켜주곤 한다. 이런 모습은 펑크라는 문화가 가진 가장 멋진 우정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틀 동안 술을 마시고, 라이브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첫날 술자리에서 새로운 인물을 소개받았다. 세이지.

옆자리의 이노우에 역시 세이지를 알고 있는 모습이었기에, 나는 물었다.

“저 사람은 어떤 밴드를 하나요?”

이노우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He is a PRO OKYAKUSAMA.”
(그는 프로 관객님이다.)

나는 바로 이해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이지는 CIG의 매니저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오카자키 펑크씬에서 밴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런 ‘프로 오캬쿠사마’들의 존재는 한국 씬에도 있다. 라이브 영상과 사진을 찍어 편집해 올리는 사람들, 공연장에 와서 신나게 놀며 라이브의 온도를 끌어올리는 사람들, 일손이 부족할 때 티켓팅이나 공연 진행을 도와주는 뮤지션의 연인들, 늘 음반과 머천다이즈를 사주며 밴드 활동을 지탱해주는 사람들. 이 모든 이들이야말로 음악을 제외한 씬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서포트와 열정 덕분에 씬은 굴러가고, 우리는 이곳을 보금자리처럼 느끼며 계속 음악을 만들고 라이브를 할 수 있다.

오카자키 펑크씬에서 이름난 술꾼이었던 세이지는 이틀 동안 우리를 오카자키 시내의 여러 술집으로 안내했고, 가는 곳마다 사장님들과의 끈끈한 관계를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오카자키 크루와의 2차 술자리에서 홍구는 결국 기절했다. 유조는 자상한 얼굴로 홍구를 옆자리의 긴 테이블에 눕혔다. 그러고도 술자리는 한참 이어졌다. 우리는 홍구의 악명 높은 코골이를 배경음 삼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무대가 없어도, 라이브가 없어도, 이 도시의 밤은 충분히 진했다.

이튿날, 다시 RAGSLOW를 찾았다. 그곳에는 유조가 전날 밤 홍구가 잃어버린 모자를 들고 있었다. 그러다 RAGSLOW가 곧 문을 닫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낮에는 식당, 밤에는 라이브하우스로 쓰이던 공간. “타다이마”를 처음 외쳤고, “오카에리”가 돌아왔던 장소. 밴드로 다시 돌아와 그 말을 외칠 수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더 오래 둘러봤고, 더 천천히 공간을 눈에 담았다. 무대 위치가 입구 쪽으로 바뀌어 있는 것도 확인했다. 사라질 걸 알게 된 장소는 기억 속에서 괜히 더 단단해진다.

그날 밤 ACUTE의 라이브는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밴드를 오래 해온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밀도와 아우라. 그런 것들이 특별한 순간에 유난히 선명해지는 라이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CIG라는 밴드를 처음 봤다. 잘 차려입은 멋쟁이들, 마치 이탈리아 마피아 패밀리를 연상시키는 인상. 하드코어와 스카, 록큰롤과 펑크, Oi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연주하는데 한눈에 반했다. STRIKE OUT, DIEAUDE 같은 밴드 출신 멤버들이 모여 있다는 설명은 나중에 들었다. 그보다 먼저 와 닿은 건 “이 밴드는 반드시 한국에 불러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옆에 있던 홍구에게 눈짓을 보냈고, 홍구 역시 같은 마음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직감은 이듬해 현실이 됐다. 2024년 6월, 나는 ACUTE와 CIG를 한국으로 불렀다. 도쿠시마의 SILVERWIGS와 함께한 투어였다. 공연도, 뒷풀이도, 이동도 모두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정말 멋진 기획이었고, 특히 잊히지 않는 한 순간이 있다.

첫날, 신촌 BABY DOLL에서 ACUTE가 마지막 순서였다. 보통은 마지막 순서가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그날은 조금 어긋났다. 공연 시작부터 쌓인 딜레이로 인해 ACUTE는 25분 안에 공연을 마쳐야 했다. 공연장과 건물주 간의 계약상, 시끄러운 라이브를 끝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정중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드러머 시바킨이 말했다.

“25분? 충분하네.”

곧바로 그의 카운트로 라이브가 시작됐다. 그들은 25분 동안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신들린 듯한 열기 속에서 관객들은 미친 듯이 환호했다. 매번 최고의 라이브를 보여주던 밴드였지만, BABY DOLL에서의 그 밤만큼은 내 펑크 인생에서도 손에 꼽을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한국 투어에 대한 답처럼, 오카자키에 인연이 닿았던 거의 모든 밴드들이 서울돌망치를 오카자키로 불러줬다.

도쿄의 크루셜 섹션과 함께한 3일간의 투어였고, 오카자키 쪽에서는 ACUTE, CIG, PICNIC, VERTIGO, ATTACK SS가 함께했다. 이름만 나열해도 이미 설명이 필요 없는 얼굴들이었다. 이 중 누구도 ‘초면’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 밤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형제이자 친구였다.

VERTIGO는 이노우에, 홍구와의 오카자키 여행 바로 다음 날, 나고야 RED DRAGON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 NAHU의 기획으로 한국에서 라이브를 했을 때, 다시 제대로 친해졌다. 무대 위에서도, 무대 아래에서도 솔직하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서울돌망치의 첫 오카자키 라이브, 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 얼굴들을 다시 보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ATTACK SS와의 인연은 더 길고 깊었다. 2010년, 스컴레이드의 이주영이 이들을 한국으로 불렀을 때, 나는 잠시 펑크씬을 떠나 있던 시기라 그 자리에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과의 첫 인연은 2015년 나고야에서였다. 나고야 RED DRAGON에서의 FTS 라이브는 완전히 망한 라이브였다. 그 라이브가 끝난 뒤,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ATTACK SS의 베이스이자 보컬, 준이었다.

“심장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한마디에, 내 심장도 뜨거워졌었다. 위로나 형식적인 칭찬이 아니라, 진심이 그대로 전해지는 말이었다. 그게 준과의 첫 대화였다.

그 이후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2024년 7월, 나는 주영과 함께 ATTACK SS와 惡AI意의 한국 투어를 기획했다. 이때 ATTACK SS의 새로운 기타리스트로 합류한 사람은 SYSTEM FUCKER와 ABIZMO의 기타리스트 아츠미였다. 오래 알고 지낸 형제였고, 그래서 더 반가웠다. 그 투어는 여러 의미에서 내 인생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중요한 기획으로 남아 있다.

그 모든 인연들이 다시 오카자키에서 한자리에 모였다. 보퍼즈의 무대는, 그날만큼은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었다. 누가 밴드이고, 누가 관객인지 구분할 필요가 없는 밤이었다. 서로의 공연을 보고, 서로의 무대를 기다리고, 서로의 귀환을 기뻐하는 자리였다.

또 다른 반가운 얼굴들도 있었다. ATTACK SS와 惡AI意의 한국 투어 때 함께 한국을 찾았던 FORWARD의 새로운 베이시스트 다미(DAMMY, 한국명 안직수)가 우리를 보러 와주었다. 오랜 인연이 있는 브라질인 형제 PUNHALADA의 보컬 지오바니도 나고야에서 달려 와주었다. 그리고 세이지도, CIG의 한국 투어 당시 함께 왔던 기타리스트 요시히로의 딸 사키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 날, 유조의 딸과도 처음 인사를 나눴다. 그녀들은 익숙한 듯 보퍼즈를 누비고 다녔고, 아버지들은 무대에 올랐다. 펑크 삼촌들과 이모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에 그녀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펑크가 특정 세대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그 시대의 소음’을 처음 만들어 낸 자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이 도시가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처음 만들어 낸 소음이 또다른 누군가의 삶이 되고, 누군가의 집이 되고, 또 다음 세대의 풍경이 되는 방식으로.

모두가 친구였던 공연. 투어 기획을 맡아준 도쿄의 크루셜 섹션, 그리고 오카자키에서 이 밤을 만들어준 모든 밴드들. 히로가 첫 날은 오카자키라고 이야기했을 때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 공연 플라이어가 나왔을 때도, 보퍼즈에 도착해 반가운 얼굴을 하나둘 다시 마주치기 시작했을 때도, 감정은 천천히 고조되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보퍼즈의 무대에 다시 선 순간 완전히 터졌다.

나는 마이크를 움켜 쥐고 또 한 번 외쳤다.

“타다이마!!!”

서울돌망치로는 처음 서는 무대였지만 상관없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안에서 끓고 있던 단어가 내 몸을 통과해 나간 다음, 그 자리에 남는 건 이상할 정도로 편안한 감정이었다. ‘보퍼즈의 무대에 다시 서있다.’

하룻밤의 뜨거웠던 라이브가 허무하게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이 도시의 공기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감각.

그리고 그 때, 사람들이 소리쳤다.

“오카에리!!!”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준비해 간 셋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 음식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그날 오카자키의 료칸에 묵을 예정이었고, 그래서 마음 놓고 먹고 마셨다. 잊지 않겠다는 말 같은 건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또 만날 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카자키라는 도시. 나에게 이곳은 수많은 인연과 시간이 겹겹이 쌓인 장소다. 친구와 형제, 자매들이 있는 도시. 돌아가면 받아주는 얼굴들이 있는 도시.

그래서 내 머릿속에서 오카자키는 늘 두 단어로 묶여 있다.

타다이마.
오카에리.

이보다 정확한 설명은,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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