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NOISE의 밤

소음의 성지, 고치

요코하마의 푸른 불빛을 등지고, 우리는 고치로 향했다. 열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밤새 꼬박 달리며, 중간중간 밤과 새벽의 휴게소에서 피곤한 몸을 일으켜 차에서 내릴 때마다 서로의 지친 얼굴이 보였다. 나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운전해 본 적이 몇 번 있지만, 열 시간 이상 운전해서 가는 거리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미국 밴드들에게는 이런 거리의 투어가 일상이라고 들었는데, 일본도 생각보다 훨씬 넓은 나라라고 느꼈다.

무엇보다, 밤새 운전하는 히로의 얼굴을 보고 새삼 존경심이 생겼다. 도쿄에서 가장 라이브를 자주 하는 CRUCIAL SECTION의 멤버로, 공연장과 레이블까지 운영하면서, 끊임 없이 해외 밴드들의 투어를 기획한다. 평생을 펑크에 바친다는 게 이런 일이구나 싶었다.

마지막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아침이었다. 애니메이션 ‘바다가 들린다’의 배경 도시로 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넓은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고,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것처럼 아침 바다 풍경이 예뻤다. 이제 곧 고치에 도착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휴게소에서 아침밥을 사 먹고 다시 출발했다. 피로와 식곤증에 다시 잠이 들었던 것도 잠시,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밴은 커다란 아케이드 한복판에 서 있었다. 오비야마치 상점가였다. 활기찬 번화가 사거리의 한가운데에 ‘CHAOTIC NOISE’라는 간판이 보였다.

우리는 악기와 머천, 개인 짐을 들고 지하의 라이브하우스로 내려갔다.

내려가자마자, 익숙한 감각이 먼저 들어왔다. 냄새였다. 오래된 라이브하우스에는 냄새가 있다. 켜켜이 쌓인 뮤지션들의 땀 냄새, 훈훈한 열기의 냄새, 오래된 장비의 먼지 냄새가 한데 섞인 자유의 냄새. 특히 지하 라이브하우스의 그 냄새를 나는 좋아한다.

무대를 봤다. 스테이지 양 끝에 원형 테이블이 하나씩 있었다. 단차가 높지 않은 무대였고, 그 테이블은 스테이지 다이빙을 위한 장치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날, 그 테이블들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대를 바라보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사람 사진 하나가 걸려 있었다. DISCLOSE의 기타 보컬, 카와카미. 고치라는 시골 도시에서 D-Beat의 소음을 극단까지 끌어올려, 전 세계 펑크들에게 신으로 불리게 된 남자. 사진이 걸려 있는 모습은 거의 제단 같았다.

2007년, 그의 죽음은 서울에 있는 우리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때 친구 한 명은 그의 제사를 지내려 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펑크가 무슨 제사냐, 그건 종교지 펑크가 아니야’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사진 앞에 서니,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 마음이 조금 이해됐다. 나는 제사를 지내는 마음으로 카와카미의 사진을 바라보며 애도했고, 오늘의 라이브를 잘할 수 있게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펑크는 가끔 종교처럼 작동한다. 그게 내가 경계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내가 사랑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히로가 한 남자를 소개해줬다. 요시오 이노우에였다. 키가 크고 덩치가 컸다. 인상이 강했고, 첫 인상만으로는 쉽게 친해지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날 공연의 기획자였고, SPEED! NOISE! HELL!과 WALL OF TRASH의 기타리스트로 우리와 함께 무대에 설 사람이었다.

CHAOTIC NOISE와 DANDOH RECORDS의 사장, 전설적인 밴드 CONGA FURY의 기타리스트, 시코쿠 펑크씬의 중심. 이노우에는 여러 수식어가 붙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수식어가 다 설명하지 못하는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이 남자는 카와카미가 떠난 뒤에도 이 도시 한복판에서 그 이름을 계속 붙잡고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

그는 DISCLOSE의 전집인 RAW BRUTAL ASSAULT 시리즈를 발매했고, 해마다 추모 행사와 머천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카와카미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녀를 꾸준히 돌보며 살고 있었다.

누군가를 ‘전설’로 박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떠난 사람의 빈자리를 현재형으로 지속시키는 방식. 그게 이노우에의 무게였다. 씬의 동료이자 선배로서, 먼저 떠난 이에 대한 우정을 몸과 마음으로 짊어지고 사는 사람.

그런 그가 훗날 우리 서울 펑크씬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또 한 명의 아픈 이름이 자리 잡게 될 줄도.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노우에에게 잘 부탁드린다 인사를 하고서, CRUCIAL SECTION 멤버들과 함께 잠깐 관광을 나갔다. 가장 먼저 고치성을 구경했다. 나는 닌자와 사무라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냐는 식의 바보 같은 농담을 던지며 성을 걸었다. 투어 중에는 관광을 제대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짧은 산책이 무척 즐거웠다.

그리고 다시 오비야마치로 돌아와 밥을 먹으러 갔다. 히로메 시장이라는 곳이었다. 지금은 분위기가 좀 더 관광지 느낌으로 변했지만, 당시의 히로메 시장은 좀 더 투박했고, 그래서 더 좋았다.

시장에는 여러 점포들이 모여 있었다. 투어 중 시간과 잔고 부족으로 쉽게 못 먹던 스시와 해산물 요리들이 잔뜩 있었고, 야끼소바와 교자 같은 스트리트 푸드도 넘쳤다. 여러 점포에서 음식을 사서 중앙의 나무 테이블에 앉아 다 같이 먹는 방식이었고, 여러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우리는 각자 음식과 하이볼, 생맥주를 사 와서 라이브 전에 작은 만찬을 했다.

그때부터, 히로메 시장은 나중에 내가 고치에 갈 때마다 찾는 장소가 된다.

배를 채우고, 힘을 회복한 우리는 다시 CHAOTIC NOISE로 돌아왔다.

그날의 라이브가 시작되었다.

첫 순서는 STAD FILLER였다. 그들은 시작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특히 프론트우먼 아마노가 무대를 여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지치지 않고 힘이 넘치는 보컬이었다. 시작할 때의 텐션이 마지막 곡의 끝까지 유지되는 모습에서 그녀의 걸출한 기량이 느껴졌다. 훗날 그녀는 GALNUTS의 보컬로 한국에 투어를 오게 되는데, 그녀의 힘과 기량은 여전했다.

아마노와 STAD FILLER가 잔뜩 끌어올린 공기를 이번엔 GODFREE HO가 이어받았다.

GODFREE HO는 처음부터 기대를 하고 있었다. CONGA FURY의 시라이시가 베이스를 잡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라이브는 밀도가 높았다. 한 곡 한 곡이 짧게 끝나는데도, 쉬는 시간 따위는 없었다. 프론트맨은 관객 사이사이를 라이브 내내 뛰어다니며 밀도 높은 보컬을 계속 쏘아냈다. 나중에 이 밴드가 한국에 와서, 앵콜을 열 번이나 하게 될 줄은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날의 라이브가 이미 훗날의 앵콜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 같다. GODFREE HO는 멈출 줄 모르는 밴드라는 인상이 이때부터 내 마음속에 강하게 박혔다.

다음은 SPEED! NOISE! HELL! 이날 공연의 호스트였다. 고치 씬을 대표하는 밴드다웠다. 이노우에의 기타 사운드는 곡이라기보다는 물리적인 소음에 가까웠다. 칼날처럼 날카롭다가 몽둥이처럼 두껍게 후려치며, 계속 밀어붙였다. 토시미츠와 타카이, 두 프론트맨은 관객과 몸을 격렬히 부딪히며 각자 고유의 데시벨로 계속해서 소음을 내질렀다. 라이브를 보면서, 고치라는 도시가 왜 일본 소음의 성지가 되었는지 바로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날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은 건 WALL OF TRASH였다. 멤버 교체는 많지 않았다. 기타 앰프 앞에는 이노우에가 그대로 있었고, 앞서 SPEED! NOISE! HELL!에서 연주하던 변태 드러머 콧피도 그대로 무대에 남아 있었다. 베이스에 GODFREE HO의 시라이시가 다시 올라왔고, 보컬은 오뎅이었다. 드럼을 제외하면 CONGA FURY의 오리지널 멤버들이 다시 모인 셈이었다.

공연 전, CHAOTIC NOISE에 도착했을 때부터 오뎅은 눈에 띄었다. 새빨갛게 염색한 머리를 스파이키 스타일로 잔뜩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키가 작았지만, 인사할 때나 사람들과 대화할 때 풍기는 기세가 달랐다. 특유의 강인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라이브가 시작되자 그 느낌이 더 분명해졌다. 무대 양쪽에 놓인 원형 테이블을 발판 삼아, 그녀는 공연 내내 스테이지 다이빙을 했다. 한 번 다이빙을 하면 쉽게 내려오지 않았다. 고치의 관객과 동료 뮤지션들이 오뎅을 계속 밑에서 받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사람들 위에 계속 떠 있었고, 그 상태로 노래를 이어갔다. 놀라운 건 그 격렬한 인간 파도의 흔들림에도 보컬이 완벽했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관록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오뎅의 귀곡성 같은 보컬도, 이노우에와 멤버들이 표현하는 사운드도 공포스러울 정도였지만, 반대로 현장의 분위기는 라이브 내내 신나고 화기애애했다.

가장 웃겼던 장면은 CRUCIAL SECTION 멤버들이 연출했다. 갑자기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뭔가 눈짓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뎅이 바닥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달려가서 곧바로 다시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WALL OF TRASH의 라이브 내내 오뎅은 스스로 다이빙을 하거나 이렇게 사람들에 의해 들어 올려지기를 반복하며 날다람쥐처럼 공중을 날아다녔다.

이날 이후 나는, 해체한 CONGA FURY의 라이브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이상 아쉽지 않았다. WALL OF TRASH의 라이브를 봤으니까. 이 사실은 내 인생의 자랑이자 잊지 못할 광경 중 하나다.

라이브 내내 공중을 날아다니던 오뎅이 무대에서 내려오고, 도쿄에서 온 CRUCIAL SECTION의 차례.

역시 최고였다. 오랜만에 고치에 온 도쿄의 CRUCIAL SECTION을 맞이한 관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쳐 있었다. 써클핏이 열리고, 모쉬가 터지고, 싱얼롱이 계속 이어졌다. 무대와 객석 사이가 사라지는 밤이었다.

히로는 해외 밴드와 장기 투어를 할 때마다 매일매일 작은 승부를 만든다. 지난번 〈질풍 투어〉 때도 그랬다. 하루가 끝나면 꼭 이런 말을 했다.

“오늘은 CRUCIAL SECTION이 이겼다.”

혹은

“오늘은 FIND THE SPOT이 이겼다.”

투어가 끝나면 스코어를 정리한다. 열 번의 라이브가 끝나면 “5대 5였어. 멋진 투어였어.” 같은 말로, 진짜로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를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그날은 우리가 졌다. 확실했다. 나는 그날 몇 곡을 날려 먹었으니까.

우리 FTS 차례가 왔다.

무대에 올라설 때부터 나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20대의 나는 라이브가 폭발하면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던 사람이었다. 그때 내게는 두 가지 퍼포먼스가 있었다.

하나는 롤링봄버였다. 점프한 뒤 몸을 회전시켜 맨바닥으로 떨어지는 기술. 낙법을 잘못 치면 등허리에 시꺼먼 멍이 남았다. 다른 하나는 마이크로 내 이마를 쳐서 피를 터뜨리는 것이었다. 지난 질풍 투어와 이번 NETWORK 투어 동안, 나는 거의 매일 피를 흘렸다.

그 시절의 나에겐 '하드코어는 극단까지 가야 한다'는 고집이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전부 쏟아냈다는 증거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공연장의 공기 속에서, 관객들의 끓는 점을 무대 위에서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폭력적인 퍼포먼스로 사람들은 더 날뛰고, 더 미치고, 라이브의 열기는 순식간에 끓어올라 폭발했다.

사람들은 종종 IGGY POP이나 GG ALLIN을 떠올리겠지만, 내 방식은 달랐다. 자해를 의도한 적은 없었다. 내 스스로는 프로레슬러에 가까운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하드코어 펑크라는 극단의 음악에 진심을 더한다면, 그 분노와 몰입을 몸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누군가는 의미를 원하고, 누군가는 깃발을 원한다. 나는 그 요구가 생기는 온도를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 온도 앞에서 깃발을 드는 방식이 꼭 피와 폭력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안다. 예전에는 그 방법밖에 몰랐지만, 이제는 같은 의미를 더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

꼭 합주실이나 무대 위에서 경험으로 쌓이는 실력이 아니라, 여러 위대한 밴드들의 라이브를 보고 느끼면서 배우게 되는 감각들이 있다. 연주와 마이크를 매개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직접 전해지는 그 경이로운 순간들. 나도 지금은 그 순간을 다른 방식으로도 조금씩 잡아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매번 피를 흘렸고, 투어가 진행될수록 이마는 붓고 상처투성이가 되어갔다. 투어 후반기였던 고치에서는, 더 이상 이마에 상처를 낼 남은 공간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라이브 도중 마이크로 이마가 아닌, 내 뺨을 쳤다. 순간.

빠각.

턱이 어긋나버렸다.

입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았다. 노래를 할 수 없었다. 웅얼웅얼거리며 소리만 질렀다. 멘트를 하려 했지만 “어어어… 으으…” 같은 소리만 새어나왔다. 멤버들은 무슨 일이 생긴 줄도 모른 채 연주를 계속했다. 무대 아래 CRUCIAL SECTION 멤버들은 박장대소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CHAOTIC NOISE의 관객들과 고치의 펑크들은 더 열광하기 시작했다.

두세 곡 정도를 말아먹고 나니 턱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 CHAOTIC NOISE라는 이름답게 혼돈 속의 라이브였다. 관객들은 미쳐갔고, 우리도 정신없이 연주를 즐겼고, 나도 계속해서 몸을 날렸다. 마지막 앵콜을 앞두고 나는 외쳤다.

“한국, 서울에도 고치처럼 작지만 뜨거운 펑크씬이 있어. 모두들 서울에 와서 공연해줘! VIVISICK도, FORWARD도, CRUCIAL SECTION도 왔어. 고치에서도 와줘! 계속 계속 서울에 와줘!”

이 말은 나중에 현실이 된다. 고치는 서울 펑크의 자매결연 도시가 되었으니까.

엄청난 환호 속에서 라이브가 끝났다. 끝나자마자 SPEED! NOISE! HELL!의 보컬 토시미츠가 내게 다가왔다. 투어 중 다쳤지만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던 내 이마의 상처들을 조용히, 섬세하게 치료해줬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인간적인 따스함에 큰 감동을 느꼈다. 그는 멋진 보컬리스트일 뿐 아니라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토시미츠와는 그 후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형제로 지내고 있다. 그와의 인연도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

라이브 직후의 열기를 그대로 안고서 우리는 고치 펑크들의 대연회 장소인 아카타누키(붉은 너구리)로 향했다. 일본 전통식의 넓은 연회석이 우리를 맞이했다. 투어 중 가장 다양한 음식이 나왔던 이자카야였다. 큰 룸이라 공연한 뮤지션들과 친구들끼리 독립적으로 화기애애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고치에 가면 늘 들르고, 가게 앞의 붉은 너구리 동상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게 되는 곳. 언제나 그리운 곳이다.

뒷풀이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는 잔뜩 기대했다. 히로가 여러 번 강조해서 말해줬던 고치의 술문화 때문이다.

“고치 사람들은 한국인처럼 마신다.”

실제로 일본에서 술 소비량 1위가 고치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고치 사람’이기 전에 ‘펑크’였다. 술에 미친 인간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사케 바토루(SAKE BATTLE)라는 전통이 있었다. 사케 써클핏이라고도 불렀다.

원래 써클핏은 하드코어 공연장에서 원을 만들고 거칠게 돌며 모쉬하는 걸 말한다. 여기선 모두가 술잔을 가지고 원을 돌며 한 명씩 원샷을 한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걸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계속한다. 그래서 사케 바토루를 하다 보면 기절하는 사람이 몇 명씩은 나온다.

결국 우리는 참패했다. 우리는 입을 모아 공연 전부터 일본 최악의 싸구려 술 오니고로시를 물처럼 마셔서 졌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노우에가 타고난 술꾼인 건 확실했다. 이듬해 우연히 고치를 여행하다 CHAOTIC NOISE를 발견해 이노우에를 다시 만난 20대의 한국 대표 술꾼들, 이동우와 이평안마저 그에게 가볍게 참패했으니까. 이노우에와 고치의 펑크들은 강했다.

시끌벅쩍하고 정겨웠던 아카타누키의 밤이 끝나고, 기절 직전까지 만취한 우리와 CRUCIAL SECTION 멤버들은 SPEED! NOISE! HELL!과 WALL OF TRASH의 드러머 콧피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콧피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가족의 집에서 신세지는 경험은 처음이라 조심스러웠던 우리는, 조용히 쓰러지듯 잠들었던 것만 기억난다.

아침에 눈을 뜨자 주방이 분주했고, 콧피의 어머니께서 밥을 차리고 계셨다. 한국의 찜닭과 비슷한 음식이 식탁 위에 한가득 올라왔다. 전날의 소음과 술기운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지만, 그 따뜻한 냄새 앞에서 꼭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낯선 외국인 펑크들과 같은 상에 앉아 밥을 먹는 일이 이 가족들에게는 익숙해 보였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음식도 정말 맛있었다. 나중에야 그 음식이 치쿠젠니라는 일본의 가정식이라는 걸 알게 됐다.

밥을 배불리 먹고 난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밤새 소음으로 들끓던 도시는 아침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를 되찾고 있었다. 공연장에서 서로 부딪히던 몸들도, 이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인사를 나누고 다시 각자의 생활로 흩어진다. 펑크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무대 위의 격렬함만으로 남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

우리는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히로의 밴에 올랐다. 목적지는 오사카였다.

고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후로도 여러 번 고치를 방문하게 되고, 이 도시의 사람들과 관련한 수없이 많은 에피소드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많은 이야기들은 결국 이노우에라는 한 남자와 이어진다. 나는 언젠가 이노우에에 대한 이야기를 따로, 제대로 쓰게 될 것 같다.

고치를 떠날 때마다 묘한 확신이 남는다. 여기는 소음이 큰 도시가 아니라, 우정이 큰 도시라는 것. 떠난 사람의 이름을 추억으로만 두지 않고, 일상 속에서 계속 불러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는 것. 공연이 끝나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도시. 고치는 늘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붙잡는다.

시간이 지나, 그 밤의 중심이었던 CHAOTIC NOISE는 얼마 전 문을 닫았다. 한 도시의 지하에 박혀 있던 간판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장소가 사라졌다기보다 한 시대와 소중한 추억들이 저물었다는 느낌을 먼저 받았다. 하지만 고치가 특별한 이유는, 그들이 장소를 잃었다고 해서 이야기를 잃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노우에는 지금, 도심이 아니라 산속에 NOISE DEATH CULT라는 공연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예전처럼 펑크만으로 밤을 불태우기보다는, 이제는 주로 포크 공연 기획에 힘을 쏟고 있다고 들었다. 얼마 전에는 한국의 포크 뮤지션 윤숭이 투어를 가기도 했다. 장르가 바뀌었다고 해서 그가 살아온 방식이 바뀐 건 아니었다. 누군가의 노래가 울려 퍼질 수 있도록 길을 내고, 낯선 이가 머물 수 있게 공간을 주고, 떠난 이름들을 현재형으로 붙잡아두는 일. 결국 그는 계속 ‘공연장’이라는 형태로 사람을 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비야마치 거리는, 고치의 또 다른 형제인 TUSKS의 기타, 유사쿠가 ARCADIA라는 공간을 만들어 펑크 라이브를 책임지고 있다. ‘한 곳이 닫히면 다른 곳이 열린다’, 같은 단순한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누군가가 사라진 자리를 누군가가 메우는 게 아니라, 각자가 자기 방식으로 도시의 심장을 다시 꿰메는 것이다.

사실, 고치의 펑크씬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많이 붐비진 않는다. 그래도 그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사람 수로는 재지지 않는 박동이 있다. 생활에 쫓기는 와중에도, 누군가는 그 생활을 무대 위로 올려놓는다. 소음이 줄어든 자리에 남는 건, 더 오래 가는 우정과 더 단단해진 마음이다.

그래서 고치는 언제까지도 소음의 성지로 남아 이어질 것이다. 카와카미와 DISCLOSE의 이름을, 지금도 가장 먼저 불러내는 도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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