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펑크로 가족이 되는 방식
고치에서 혼돈의 소음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우리는 오사카에 도착했다. 정확한 이동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너댓 시간쯤 걸렸던 것 같은데, 투어 막바지였고 이미 훨씬 긴 거리들을 지나온 뒤라 그런지 생각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몸은 지쳐 있었지만, 고치에서 받은 환대 덕분에 힘은 아직 남아 있었다.
오사카에 도착하자 시간이 조금 남았다. 우리는 공연이 예정된 라이브하우스 HOKAGE 근처에서 짧게 레코드샵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렇게 들어간 곳이 PUNK AND DESTROY였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몇 블록만 더 걸어가면 오사카의 전설, FRAMTID의 기타리스트 자키가 운영하는 REVENGE RECORDS가 있었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갔을지 모르겠다. 나중에 지도를 보고서야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더 아쉬웠다.
그럼에도 PUNK AND DESTROY는 충분히 멋진 가게였다. 크지 않은 공간에 빼곡히 채워진 레코드들과 플라이어들, 정성스런 손때가 묻은 분위기. 펑크에서 이야기하는 DIY가 무엇인지 바로 느껴졌다. 대형 메이저 레코드샵들처럼 깔끔하게 장식하려 애쓴 흔적 따위는 없었다. 여기는 진짜 ‘펑크 레코드샵’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레코드샵이 쉽게 생기기 어렵다. 장르의 문제 이전에 구조의 문제다. 임대료와 권리금, 짧은 계약 주기와 불안정한 유지 비용. 레코드는 천천히 팔리지만, 한국의 부동산 구조는 지나치게 빠른 수익을 요구한다. 결국 가게는 월세를 내기 급급한 생업이 되어버린다.
시장 자체도 크지 않다. 한국의 펑크/하드코어는 사회 전면에 드러난 서브컬처라기보다는, 아직도 극소수의 사람들이 꾸준히 지켜온 '부족 문화'에 가깝다. 그래서 레코드를 사는 사람 자체가 적고, 그 안에서도 취향은 더 잘게 나뉜다. 입고를 해도 회전은 느리고, 재고는 쌓인다. 월세는 매달 같은 속도로 나가는데, 매출은 부족하다. 버티기 어려운 구조다.
그래서 한국의 펑크씬은 장소보다 사람을 더 많이 남겨 왔다. 공간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그 안을 오가던 얼굴들과 관계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공연이 중심이 되었고, 밴드와 관객 사이의 우정과 기억이 씬을 떠받쳤다. 공간이 중심이 되지 못한 대신, 관계가 중심이 된 셈이다.
그 과정에서 몇몇 장소의 이름은 이제 고향처럼 남았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GBN처럼, 한때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모이던 곳들. 집으로 통하던 장소들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됐다.
그래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진행형인 집들이 있다. 10년째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CLUB SHARP와 새로 생긴 BABY DOLL, VICTIM 같은 라이브하우스들이다. 여전히 소음이 울리고, 오래된 얼굴들이 모이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는 공간들이다.
처음 오는 사람에게 여기가 우리 서울의 펑크 씬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곳. 음악과 사람들, 우정의 기억들이 시간과 함께 겹겹이 쌓여 깊이 스며든 곳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해외의 레코드샵과 라이브하우스를 볼 때마다 단순히 멋있다고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집들이 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함께 품게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PUNK AND DESTROY 에서 친구들의 밴드 SCUMRAID 의 앨범을 발견했다. 반가웠다. 같은 KOREA PUNK 섹션에서 작년에 CREW FOR LIFE 에서 발매한 우리 FTS의 1집 앨범도 몇 장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신기해하며 자축하는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타국의 레코드샵에 우리와 친구 밴드의 앨범이 있었다는 것. 당시로서는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고, 신기한 기분이었다.
PUNK AND DESTROY 를 구경하고 레코드를 몇 장씩 산 우리는, HOKAGE에 들어섰다.
HOKAGE는 매력적인 라이브하우스였다. 특히 무대와 관객 구역의 구분 없이 같은 높이였는데, 이건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공연장 스타일이었다. 밴드의 스테이지는 붉은 카페트와 웨지 모니터 몇 개로만 희미하게 구분돼 있었고, 관객과 같은 높이에서 바로 숨을 섞을 수 있는 구조였다.
첫 밴드는 KATSUYAMA I.D. 였다. CRUCIAL SECTION과 같은 반다나 스래쉬 스타일. 80년대 크로스오버 스래쉬의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빠르고 경쾌했다.
그다음은 CONCRETE WAVES 였다. 70년대 펑크를 바탕으로 뉴웨이브와 로큰롤이 뒤섞인 사운드. 가볍고 신나는 라이브였다.
무엇보다 이날의 기획자, 츠지나미의 밴드 TONE DEAF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큰 영향을 받았던, 원초적인 80년대 미국 하드코어 펑크 스타일을 일본에서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MINOR THREAT의 영향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 날 오사카 HOKAGE에서의 TONE DEAF와 CRUCIAL SECTION의 라이브는 정말 에너지가 넘쳤다. 우리도 그 기운을 그대로 받아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투어의 종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작부터 계속 엉망진창으로 뒤뚱거리며 기복을 보이던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안정된 호흡으로 무대를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라이브가 끝난 뒤, 우리는 츠지나미의 어머니 댁으로 향했다. 츠지나미가 기획하는 공연은, 투어 밴드들을 어머니 집으로 데려가 함께 먹고 자는 것이 하나의 규칙이라고 들었다.
어머님은 편안한 인상의, 정말 인자한 분이었다. 그리고 상을 가득 차려 주셨다. 일본식 생선구이와 국, 탕, 여러 가지 가정식 반찬들. 진짜 일본 가정식이었고 너무 맛있었다. 우리는 배부르게 밥을 먹고, 술도 함께 마셨다.
투어 막바지라 체력적으로는 많이 지쳐 있었지만, 전날 콧피의 어머니와 이날 츠지나미의 어머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과 가정집의 온기 덕분에 우리는 다시 힘을 얻었다. 공연장에서 얻는 에너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었다. 근성으로 마음을 데워 올리고, 오기로 몸을 움직여서 버티는 힘이 아니라, 정과 온기로 사람을 자연스럽게 회복시키는 힘에 가까웠다.
그날 밤, 맥주를 마시며 우리는 츠지나미와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음악 이야기였고, 투어 이야기였고, 살아온 방식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몇 해 뒤, 츠지나미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가족여행을 왔을 때도 다시 만났고, 내가 서울돌망치로 첫 시코쿠 투어를 갔을 때는 오사카에서 고치까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주었다. 자신의 공연이 없던 날에도, 그는 그렇게 관객으로 와서 힘이 되주었다.
서울돌망치의 고베 라이브 때는 TONE DEAF와 다시 한 번 같은 무대에 섰다. 그날 라이브 도중, 츠지나미는 갑자기 나를 무대 위로 끌어 올리더니 MINOR THREAT의 <Filler> 를 연주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칠 틈도 없이 노래를 불렀다. 호흡이 힘들 정도로 유난히 습하고 숨찼던 HELLUVA ROUNGE에서, 공통으로 영향을 받은 하나의 송가를 헐떡이며 함께 불렀던 순간은 아직도 숨막히게 생생하다. 잊을 수 없는 뜨거웠던 순간이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집 앞에서 츠지나미의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CRUCIAL SECTION과 우리가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다. 가족과 투어 밴드가 한 프레임에 들어오는 이 사진은, 츠지나미 기획 공연의 오래된 마무리 행사였다. 수많은 밴드들이 가족 사진의 일원이 되었고, 우리도 그 가족들 중 하나가 되었다.
돌아보면 펑크씬에서의 관계는 언제나 이랬다. 같은 무대에서 함께 소리를 지르고, 같이 밥을 먹으면 어느새 가족이 된다. 설명은 필요 없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고, 가족이 되고, 다시 각자의 도시로 흩어진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이런 방식일 것이다.
우리는 다시 히로의 밴에 올랐고, 또다른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도시, 오카자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