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한 번은 펼쳐본 경험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23년인 현재에도 정말 놀라운 점은 이 책이 2014년에 쓰였다는 점인데, 내가 이 책을 이렇게나 시간이 지나서 읽었다는 게 너무 한탄스럽기도 하면서, 지금이라도 읽은 게 어딘가 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한 리뷰와 다양한 해석을 진행했다는 점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글 역시나 철저하게 개인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예정이다. 사실 해석보다는 나중에 필자가 다시 살펴보기 위한 요약본에 가깝다고 본다.
책은 네 가지 챕터로 구성된다. 1부는 인지혁명, 2부는 농업혁명, 3부는 인류의 통합, 4부는 과학혁명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지혁명 파트를 이 책의 진정한 묘미라고 해설하지만 나는 4부 과학혁명에서 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이 너무나 흥미롭고 유익하여 하나하나 차근차근 되돌아보며 글을 쓰기로 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들을 보면서, 현재의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인간이 최고의 포식자이자 지배자라고 여긴다. 나 역시 인간이 당연히 최고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교과서에서 배워왔듯이 불과 도구의 사용, 그리고 언어와 기록의 등장이라고 스스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기록이 일어나기 전 현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는 이미 그 당시 다른 종족들을 무참히 학살해 가며 살아남은 상태였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왔을까?
당시 지구에는 호모 사피엔스뿐만이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을 포함한 다양한 영장류가 존재했다. 놀랍게도 네안데르탈인이 육체적으로는 호모사피엔스보다 훨씬 강력했고, 그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영장류나 포식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역사서를 배울 때 많이 봤던 내용 중 하나는 역시 '불'의 등장이었을 것이다. 불이 등장하며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게 되었고, 겨울을 날 수 있었으며 고의로 산불을 내는 행위 등을 통해 다양한 이득을 꾀할 수 있었다. 또한 '이족보행'과 '도구'의 사용 역시 빼놓을 수 없겠다. 하지만 이런 것들 만으로는 지구상에서 왜 하필이면 호모사피엔스가 최고의 동물이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도구와 언어는 영장류가 아닌 동물들도 사용한 사례가 있으며, 네안데르탈인 역시 불을 사용했다.
저자는 그 차이가 '허구의 무언가를 상상하고, 믿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인간관계는 많이 잡아야 150명이 한계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상상과 믿음의 능력은 이러한 숫자를 깨부수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신을 믿는 종교들을 떠올려보라. 물론 종교적 의견이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당연히 동의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어쨌든 우리 눈앞에 신이 있는가? 우리가 고통받을 때 신은 우리 눈앞에 존재했는가? 종교의 효용을 둘째치고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물체를 믿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즉 우리는 우리 눈앞에 없는 무형의 무언가를 상상하고 이를 믿고 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은 서로 연대했다.
종교만이 이러한 믿음으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존재하는가? 대체 국가가 어디 있는가? 우리는 영토와 국민을 하나의 물질로 여길 수 있지만 사실 그 믿음이 사라져 버리면 땅은 그저 지구에서 바다 위에 드러난 표면일 뿐이고, 국민은 그저 상대적으로 비슷한 특징을 지닌 호모사피엔스들의 집합일 뿐이다. 사실 국가 역시 우리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자본주의'는 어떤가? 돈은 실제로 아무런 가치도 없다. 물론 과거 동전을 주로 거래했던 시기에는 물체적 개념에서 어느 정도 가치라는 것이 존재했지만. 인플레이션이 심해진 나라만 봐도 알 수 있듯 돈을 믿는 자들이 사라지면 바로 종이쪼가리로 바뀌어 버린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던가 땅을 많이 사놔야겠다던가 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자본주의와 국가라는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는 성사될 수 없는 개념으로 바뀌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150명의 한계선을 넘게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국가라는 공동체로서 5000만 명의 국민들과 함께 K-문화를 자랑스러워하기도 하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기독교인의 수는 21억이 넘는다. 그리고 '돈'을 믿는 사람은 몇몇 부족민들을 제외하더라도 현재 인구인 80억 명은 될 것이다. 놀랍게도 상상력과 믿음은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룰을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굳게 믿는 '능력주의'나, '자유주의', '인권', '공정성' 등 역시 무형의 상상물이다.
저자의 이러한 개념이 생소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깊게 볼 만한 주제이다. 물론 생각해 본다고 해서 우리가 자본주의와 국가, 종교 등의 개념에서 단숨에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우리가 자본주의를 믿지 않는다고 돈을 다 버려버린다면 살아갈 수나 있겠는가?
그럼 이런 고민도 해볼 수 있겠다. 우리는 흔히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았기에 강한 것이다."라는 말을 밈처럼 사용하곤 한다. 인간이 '상상과 믿음'의 능력을 갖추었기에 지구 생태계를 지배했고, 자본주의와 능력주위가 현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상상중 일부이니, 인간은 가장 뛰어난 개체이고, 돈과 효율성의 증대가 최고인 것인가? 이러한 질문이 든 나에게 2장 농업혁명에서 작가는 이에 근접할 수 있는 또 다른 해설을 쥐어준다.
알다시피 농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인간은 수렵채집을 주로 해왔던 이전의 생활을 버리고 한 지역에 정착해 작물을 기르거나 동물을 키우는 삶을 살아왔다. 그 결과, 당연히 기존에 비해 작물 생산량은 늘어나고 인간은 더 행복해졌을 거라고 쉽게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과연 그런가? 여분의 식량이 곧 더 나은 식사나 더 많은 여유시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를 낳았고, 평균적 수렵채집인들보다 많이 일하고 열악한 식사를 했다. 저자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로 표현한다.
농사는 매 계절마다 우리에게 수확물을 안겨주지 않는다. 또한 매년마다 풍작일 거라는 보장이 전혀 없고, 그 해의 결과물은 많은 경우 노력보다는 비가 얼마나 오는지 등의 운에 달려있었다. 즉 살아남기 위해 농사꾼들은 당연히 그 해 먹을 만큼의 작물만 생산하는 것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다음 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랐으므로 최대한 많은 양의 작물을 키우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고, 잉여 생산물로 아이를 낳아 길러 노동력을 보충했으며, 이는 입이 늘어남으로써 더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삶의 질 측면에서의 악순환을 낳았다. 또한 잉여생산물이 생긴다는 의미는 뭐겠는가? 당연히 모아둔 곡식을 훔치기 위해 도둑질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고, 도둑을 막기 위해서 농사꾼들은 이를 방어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것을 우리네 사회와 비유하며 말한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최대한 돈을 벌어 마흔 전에 은퇴하고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힘들게 일하나, 막상 그 나이가 되면 주택융자, 자녀, 차, 집 해외휴가 등으로 인해 실제로 그들의 다짐을 이뤄내는 일은 거의 없으며, 결국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하게 된다. 당연히 이러한 삶에 대해서도 사람마다의 가치체계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아무래도 이러한 서술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꽤나 많을 것이다.
그래서 돌이켜보면, 인간은 사실 자신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 모르고 그저 행동한다. 미래를 아는 자는 사실 아무도 없다. 결국 인간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앞서나가려고 노력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서 편리함을 증진시키려고 하지만, 늘어난 효율로 쉬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작업량을 늘리며 결국 일의 능률은 평균적으로 증대되나 행복도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오히려 떨어지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삶을 위한 투쟁은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알면서도 우리는 이러한 달리는 열차에서 내릴 수가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다 같이 행복해지자고 담합해서 일의 능률을 떨어뜨리는 상황이 가능하겠는가? 한 명이라도 그 담합에서 벗어나 효율 좋게 일하려고 나서게 되면 그는 시장 수요에 따라 남들에 비해 수십 배에 달하는 돈을 얻게 될 텐데, 과연 남들은 가만히 있을까? 취업시장이 힘들어진 지금 훨씬 더 많은 생산효율을 얻어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 높은 스펙요구와, 비참한 업무환경의 연속이다. 농업혁명의 굴레는 모습만 바꾼 체 현대의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져오고 있다.
이 파트를 읽으며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항상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불안의 결과는 취업을 위한 열정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혹은 더 많은 돈과 지위를 얻기 위해 로스쿨을 가기도 하며, 불안을 잠재우고자 전문직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갖기 마련이다. 이러한 선택이 옳으냐 그르냐를 넘어서서 한 가지 질문정도는 던져보는 게 좋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게 정말 현시대를 사는 너를 위한 선택이 맞느냐고.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를 이 책에서도 자주 언급한다. 아무리 유전자의 법칙에 따라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과연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자 전달을 위해 자신을 바칠 이는 얼마나 되겠는가? 인간은 자신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은 사실 맞으면서도 틀린 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이 장에서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포인트가 있다. 21세기 현대인들은 '경험'과 '다양성'등을 높이 산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여행'이다. 몇몇 사람들은 휴가기간 동안 집에 틀어박혀있으면 제대로 휴가를 즐긴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우리는 개인적 욕망이라고 표현하지만 알다시피 모두가 여행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저자는 흔한 욕망인 해외여행이 전혀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앞서 말한 경험과 다양성을 신봉하는 개념을 '낭만주의'라고 칭하는데, 낭만주의는 인간으로서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 속삭인다. 다른 음식을 시식하고,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듣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등. 이러한 경험의 가장 보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여행이다. 저자는 이것이 보편타당하지 않다는 근거로 여러 예시를 든다.
1. 침팬지 알파 수컷은 권력을 이용해 이웃 침팬지 무리의 영토로 휴가를 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2. 고대 이집트 엘리트들은 피라미드를 짓고 자신의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데 전 재산을 썼지, 바빌론으로 휴가를 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3.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피라미드 건설에 삶을 바쳤다. 피라미드는 수영장과 늘 푸른 잔디밭이 딸린 교외의 작은 집이거나, 전망이 끝내주는 고급 멘션 꼭대기층일 수도 있다.
'여행'에 대한 욕망의 측면에서는 저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과연 그것이 단순히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낭만주의'때문에 일어난 결과물인가에 대한 논쟁에서는 100%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저자가 접근하고 있는 방식-인간은 수렵채집인의 DNA에서 전혀 벗어난 바가 없다-의 측면에서 바라볼 때, 한 곳에 머무르기보다 다른 쪽으로 이주해 나간 사람들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현대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가 라는 가설을 세워보고 싶다.
수렵채집사회에서 한 지점에 가만히 있는 것은 여러모로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정착생활을 할 수 있었던 농경사회와 다르게, 한 지점에서 한동안 생활을 하더라도, 계절에 따라 혹은 옆 부족의 침략 때문에, 아니면 사람이 너무 불어나서 기존의 방식으로는 살아남기 힘들어서 등, 한 곳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보다는 호기심을 가지고 다른 지역을 여행했던 사람들이 더 살기 좋은 환경을 찾고, 더 높은 생존율을 가져오지 않았을까라고 생각된다. 어찌 되었던, 저자의 의견은 참/거짓을 논하기 이전에 깊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지금도 보아라, 모두가 해외여행을 가는 시대에 남들 따라 여행 갔다가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오는 사람들이 꽤 많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현대의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개념인 '경험'과 '다양성'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다른 사람들은 의문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돌려보면 이러한 보편타당하다고 여겨지는 개념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 확인할 수 있다. 현대인 대부분은 '공정함'과 '정의'에 대해 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 중 하나라고 여기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사회는 전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다.
대한민국을 우리는 '한민족', '단일민족'이라고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유전자 검사가 시행된 이후 한국인의 유전자 비율 평균을 살펴보면 한국인(49.6%) 일본인(25.1%) 중국인(20.7%) 동남아시아인(2.6%) 몽골인(1.8%) 시베리아인(0.2%)으로 사실 한국인은 혼혈 즉 잡종이다.
종교는 어떠한가? 유일신을 섬겼던 종교는 '선'과 '질서'는 정의할 수 있었으나, 사회에 존재하는 '악'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공백을 설명하기 위해 애니미즘, 일신교, 다신교, 인간숭배 등 다양한 종교들은 합쳐지고 분화되며 사실상 고유한 종교라는 성질은 정의하기 애매한 단어가 되었다.
이러한 문화의 융합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물론 다양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융합은 '제국'과 '강자'의 이름 아래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제국의 영향은 다양한 문화가 가야 할 방향을 어느 정도 유도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 선의 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로마가 한창 제국의 영토를 넓혀가고 있을 때,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원주민 켈트족이 사는 누만시아라는 산동네는 로마제국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과 전투를 펼쳐왔다. 이들은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던 로마인들을 상대로 항복을 받아내고, 굴욕의 후퇴를 하게 만들었다. 결국 로마는 3만 명이 넘는 대군을 파견시켰고, 포위를 통해 누만시아의 보급을 차단해 굶어 죽이는 방식을 선택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항복을 택하지 않고, 스스로 마을을 불태웠고 로마인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
누만시아는 나중에 스페인의 독립과 용기의 상징이 되었고, 스페인 애국자들의 성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스페인어로, 누만시아인들이 사용하던 켈트어가 아니었다. 세르반테스는 극 <누만시아>의 대본을 라틴어로 썼고, 이 극은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 모델을 좇았다. 스페인 애국자들은 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열렬한 신도이다. 로마는 누만시아를 상대로 너무나 완벽한 승리를 거둔 나머지, 패자들의 기억마저 자기들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유문화라는 개념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순간 바뀌어버린다. 사실 대한민국을 떠올려 봤을 때, 반일운동을 하는 등 친일 문화에 대해서는 경멸을 느끼지만 우리는 오마카세를 사 먹고, 스시와 와규를 찬양한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 대다수의 사람은 죽었고, 우리의 선조들은 살아남았다. 아마 본인의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땅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린 자연스레 그가 친일파가 아니었을까 의심해 볼 수 있다. 또한 한글은 너무나도 위대한 언어이지만, 북한과 다르게 대한민국은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모순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를 지키는 것에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대부분의 우리의 문화,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의 문화는 제국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에서 융합된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주로 현대인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방식으로 자행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믿는 공정과 정의, 선, 능력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의 뿌리를 되짚어 나가다보면 실제로는 이런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중요시 여긴 사람이 아닌, 이것으로 이득을 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끌어온 신념이라는 점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왕이 대체 왜 민주주의를 지지하겠는가?)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고, 또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트이다. 현대인은 너무나도 과학과 기술, 발전에 친숙한 나머지, 그냥 원래 이렇게 발전해 온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전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허구의 상상을 통해 '종교'를 만들었고, 절대자의 존재는 우리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 정답을 제공했다. 신이 우리에게 그 진실을 알려주지 않은 이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정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몰라서'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어떤 뛰어난, 그러나 나이 든 과학자가 무언가가 "가능하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을 경우, 그의 말은 높은 확률로 틀렸다.
아서클라크라는 SF소설계의 대가가 말한 과학 3법칙 중 1법칙이다.
우리는 무지를 인정하게 됨으로써, 자신보다 현명한 누군가에게 (주로 사제나, 예언자들) 물어보는 행위를 피하고, 수학이나 관찰을 통해 무지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지를 인지하는 것만으로 현대과학의 거대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는가? 거기에 대해서 저자는 우리에게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끊임없는 참호전이라는 진창에 빠졌을 때, 양측 모두 과학자들을 통해 이 교착상태를 깨기 위한 시도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만들어낸 것들은 수많은 전쟁무기; 전투기, 독가스, 탱크, 잠수함 등이었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원자폭탄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과학을 사용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로마병사는 최강의 군대였으나 기술적으로 낫다고 하기 어려웠고, 중국은 화약을 개발했음에도 이를 전쟁에 사용하지 않고 폭죽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과학이 전쟁에서 유리하다는 측면을 깨달았기 때문에 과학은 전쟁의 시기동안 놀랍도록 발전했다.
무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과학'은, 제국의 논리와 맞물려 더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저자는 이를 '과학과 제국의 결혼'이라고 표현한다. 과학은 항해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던 '괴혈병'을 치료하였고, 자본주의와 맞물린 과학은 타 국가를 지배하는 게 돈이 된다는 점을 깨달은 순간부터 우리가 아는 수많은 제국주의 행태를 만들어냈다. 타 국가를 지배하기 위해 무력만이 중요한 게 아닌 것을 알게 된 제국주의 국가들은 원정에 수많은 학자들을 함께 데려가기 시작했고, 이는 다시 제국의 힘을 키워줌으로써 하나의 사이클로 완성되었다.
이 이후의 내용들은 금융과 신용이라는 시스템이 어떻게 더 제국을 발전시켰고, 산업혁명을 낳았으며, 사람들을 소비지상주의로 빠지게 만들고,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를 만들어 냈는지, 전래 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는지를 설명한다.
사실 필자에게 이 부분의 경우에 앞선 인지-농업혁명에서 저자가 설명한 내용에 비하면 원인이 너무나도 방대하고 복잡해(자유주의, 사회주의의 등장, 자본주의, 제국주의, 금융, 전쟁 등) 명확하게 파악이 안 되기도 해서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한 가지 이유로 설명하기 힘들고, 현대의 우리가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학혁명 파트가 가장 길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필자가 과학혁명 파트가 가장 흥미로웠다고 말하는 이유는 19장에서 저자가 제시한 질문에 있다.
우리는 흔히 왜 사냐?라고 물어보면 대부분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나 역시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모두가 이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기에 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는 건가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앞서 말한 인류가 생태계의 정상에 오르고, 수많은 문화를 만들고 과학적 발전을 이루고, 엄청난 생산효율성을 가져온 것들은 과연 인류의 행복에 좋은 영향을 미쳤는가?
저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행복을 바라본다.
1. 인간의 행복은 생화학적 메커니즘일 뿐이다.
유전진화적인 측면으로 바라봤을 때, 쾌락 즉 인간의 몸에서 발생하는 생화학 시스템을 행복이라고 정의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 무한한 행복감을 느낀다고 가정하자. 그는 그 행동을 함으로써 행복을 무한히 느끼기 때문에 다른 행동을 할 이유는 생기지 않는다. 인류에 그런 사람이 존재했다면 아마 그는 높은 확률로 굶어 죽었을 것이고, 사회적 성취를 위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DNA는 우리의 행복에 대부분 관심이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면 항상성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해 행복감을 내리는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했을 것이고, 사람들마다 유전자에 따라 행복감을 평소에 더 느끼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구별될 수는 있을지언정 항상 불행하고 항상 행복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행복을 쾌락과 직접적으로 연결해 버리면 우리는 사실 더 좋은 집, 차 많은 돈이 아니라 행복의 원인은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으로 대답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멋진 신세계>에서 등장한 생산성과 효율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마약인 '소마'에 대해 언급한다. 이 약만 있으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 "행복한 삶."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것인가? 이는 메트릭스의 빨간약 파란 약 딜레마를 떠올리게 한다.
2. 삶의 의미
위에서의 딜레마에 대한 다른 대답으로 나온 새로운 가능성은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총제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그 큰 차이는 우리의 가치체계가 결정한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삶은 고통이 가득할지라도 겪어볼 만할 것이고, 안락하고 의미 없는 삶은 시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런데 이건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만약 누군가의 높은 가치가 살인에서 오는 평온함이라면 어떨까?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가 자살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올 거라고 믿고, 실제로 우리보다 행복하게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과거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 역시 사후에는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는 우리보다 행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을 받아들인 우리에게는 죽음 뒤에 행복이 가득한 낙원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대부분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스스로가 세운 믿음과 환상이 행복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의 자기기만이며 주관적 행복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3. 번뇌에서 벗어나기
만약 생화학적 쾌락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 행복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행복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러한 모든 것, 즉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외부적 가치체계나 개인이 가진 주관적 가치체계에 대해서 감정이라는 보상은 짧은 시간 왔다 갈 뿐이다. 감정, 생각, 호불호는 자신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하며,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닌 진짜 자신이 정말로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즉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의식의 해제가 정도라고 불교는 주장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번뇌를 탈피하기 위해 뛰어들었으나, 실제로 이를 이룬 사람들은 손에 꼽는다. 그리고 이뤘다는 것이 사실인지도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세 가지 접근 방식 모두 일리가 있고, 또한 반박이 가능한 주제이다. 하지만 무엇하나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저자 역시 행복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미지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살면서 이렇게 긴 책을 읽어본 게 얼마만인가 싶다. 책을 읽고, 이렇게 내 생각과 책의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가졌던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이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고, 꼭 읽어봐야 할 명저로 불린 이유도 이 때문 아닐까? 우리는 다만 우리 인류가 보내온 역사의 흐름과 저자의 생각을 따라갔을 뿐인데, 그 어떤 소설보다 많은 희로애락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인지혁명'파트에서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국가, 종교, 자본주의와 같은 개념들이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허상을 믿는다는 사실이 인간이 생태계의 최고층에 올라온 이유임을 깨닫는다. 여기서 기존의 개념; 단순히 인간이 우월하다거나, 지도에 그려진 영토를 보고 국가가 실제 한다고 생각한다거나 하는 생각들은 흔들리게 된다.
'농업혁명'에서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부와, 효율성의 추구가 전체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우리에게 안겨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삶의 질 측면에서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고, 우리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 삶의 증진과는 관련이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인류의 통합'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나,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들이 사실은 피칠갑을 한 제국(혹은 제국의 형태를 띈 무언가)의 역사에서 쓰여 내려왔다는 점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규정하는 고유의 문화와 종교, 신념등이 사실은 고유한 특질이 아니며 용광로를 거쳐 나온 복합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과학혁명'에서는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과학의 발전과 진보가 사실은 인류를 위해 발전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부와 명예의 추구에서 발생한 부산물이며, 과학의 발전으로 우리가 그동안 스스로를 규정하던 인류의 개념이 사실은 그저 생명체의 한 종류일 뿐이고, 유전공학등의 발전이 일어난다면 앞으로 인류라고 불리는 것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이렇게 넓혀진 지식은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기던 행복의 개념 역시 의심의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고, 부서진 잔해물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아나기 위해 발버둥 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책에서 정답을 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슬며시 알려주는 것을 한 가지 꼽자면. "무언가를 안다고 확신하지 말 것"이라는 교훈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이 무언가를 안다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의심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가 연구자가 되어야 하는 세상에 직면해 있는 듯하다. 스스로의 가설을 정의하고 실험을 통해 이를 다시 부수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하며,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