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빈혈

by 괴물

빈혈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가장 두려운 체력훈련 시간.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바퀴 수를 다 돌아와야 한다. 코치님이 유독 나를 더 많이 야단치신 이유는 남들보다 현저히 떨어진 체력 탓도 한몫했을 것이다. 시간 안에 바퀴 수를 돌지 않으면 코치님이 기합을 주셨는데 나는 유난히 혼자 다른 선수들과 저만치 거리를 벗어나 있었다.


'늦으면 1초당 1대씩!!!'


아무리 코치님의 강한 매질과 기합을 받아도 체력이 뒤따라 주지 않아서 기준에 들어올 수 없었다. 내가 대든다고 느끼셨을 수도 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마음속으로 '차라리 때려라, 더는 못 뛰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그날 24초 늦었다. 24대를 맞았다.


고2를 막 마친 겨울방학ㅡ 주니어 대표로 뽑힌 선수들 이 모여서 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15바퀴를 뛰는데 그중 5바퀴는 따라잡힐 정도로 내 체력은 형편없었다. 조깅보다 느린 속도로 뛰던 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몸짓 으로 한 걸음, 한걸음 무겁게 내딛고 있었다. 많은 선수 들이 내 옆을 잽싸게 지나갔다. 창피했다.


다리가 앞으로 저어지지 않은 채로 거친 숨을 헐떡이며 생각했다.'하.. 멈추었다가 다시 뛸까. 정지한 상태로 다시 출발하는 게 지금 뛰고 있는 속도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감독님이 매서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지만 문제는 다음 훈련도 쫓아가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15바퀴 러닝은 훈련 가장 처음 시작하는 몸풀기로 시작되는 워밍업 이었는데 나는 이미 온 체력을 다 소진한 뒤였다. 너무 뒤처진 내가 희한해 보였는지 동료 선수가 '너 빈혈 아니야? 눈 밑에 봐봐'라고 하더니 눈 밑에 핏기가 없다며 빈혈인 것 같다고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다른 선수들보다 내 눈꺼풀은 핏기가 없어 연한 오렌지색에 가까웠다.

'아.. 내가 빈혈이었구나'라며 생각에 잠기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두들겨 맞아가며 훈련한 게 고작 빈혈 때문이라니.. 허탈했다.


하지만 빈혈은 나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느 후배가 감독님께 빈혈이 있다고 먼저 말씀드린 모양이었다. 감독님은 모두를 불러 모아 내일 아침 병원에 갈 예정이 니 빈혈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다. 세 네 명 정도 손을 들었지만 나는 손을 들 수 없었다. 감독님이 무섭기도 했지만 첫 주니어 훈련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얘는 러닝도 못 뛰는데 빈혈도 있네?'라며 눈에 가시가 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날 밤 혼자 약국에 가서 '빈혈 약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약사님이 말했다.'빈혈 약은 없고 철분을 옮기는 헤모글로빈이 부족해서 빈혈이 생길 수 있어'라며 정제로 된 진한 갈색 약을 하나 건네주셨다.

손에 쥔 빈혈약이 신통방통한 마법의 약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랬다.일주일쯤 먹고 나자 정말 놀랍게도 내 체력은 급격히 좋아졌다.


그동안의 고생이 이깟 3만원의 약으로 해결되는 것이었다니. 피식하고 썩소를 날렸지만 기분은 좋았다.

내 몸은 딱 한 달 정도 빈혈 약을 먹고 나서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회복되었다.


무조건 일등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밤이 되면 눈을 감아도 코트가 그려져서 잠을 통 이룰 수가 없었다.스케치북에 코트를 그렸다. 공이 올 수 있는 길을 모조리 외우고 확률을 분석하며 대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일 상상하곤 했다.고등학교 2학년, 나는 고3 선배와 조를 이루어 전국 대회 개인전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였다.


매거진의 이전글1.배드민턴 선수가 될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