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 불이 켜진다. 아흔이 조금 못 된 노인이 천천히 발을 끌며 등장한다.
식탁에 앉는다. 남이 차려준 음식을 요로코롬 살펴보는 눈에는 애정이 없고 습관적이다.
한 사람이 식탁에 등장하자, 다른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가며 자취를 감춘다.
무언극이다. 한 무대에 절대 두 명 이상 등장하는 법이 없다.
한 가족이다. 그러나 한 공간에 두 명 이상 있는 적이 없다.
알고있다. 우리 가족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언제부터였을까. 우리가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은.
젊은 여자는 티비를 켰다. 여덟 살 남짓 된 꼬마 아이 둘이 서로 “너희 부모님은 이혼하신거지?” 라고 묻는다. 기괴한 날이다. 티비를 껐다.
마흔의 남자는 식탁에 불이 켜지는 것을 보고 산책을 나가기로 결심한다.
후텁지근한 날씨가 피부를 덮는다. 끈적하다. 그냥 감수하고 걷기로 한다.
집 앞 실내골프연습장이 있던 자리에 건물 나무 골조만 남아있다.
그새 망했구나, 싶다.
길 건너편 대형 타이어 체인도 셔터를 내렸다.
불경기 가운데 "우리 모두 힘냅시다!" 라고 플랜카드를 붙여 놓았던 집이었다.
이제서야 그 플랜카드는 ‘나 죽겠소’ 라는 뜻이었음을 알아들었다.
장사는 잘 안 되어도, 평점은 높은 집이었다.
주인은 친절함을 남기고 사라졌다.
골목 아랫집 문에는 각종 명함들이 꽃혀있다.
슴슴하게 꺼진 불빛.
그 옆 환하게 불을 밝힌 부동산 불빛이 대조적이다.
실외골프연습장으로 향했다. 마흔의 남자는 실외골프연습장을 좋아한다.
시내 몇 남지 않는 실외골프연습장, 야드가 꽤 확보된 연습장이 동네에 있다는 것이 그만의 자랑거리였다. 그것은 그 동네가 자연친화적이고, 널찍한 공간이 확보되는 부촌이라는 뜻이었다.
남자는 닭장 같은 아파트가 싫었다. 개인에게는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 존엄성을 지킬 공간이 확보되지 못해서야. ’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인한 잔혹 사건을 미디어에서 접할 때마다 생각했다. 닭장이 이 도시에서는 왜 그리 비싼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실외골프연습장으로 향한다.
어라, 실외골프연습장도 팔렸나보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박스형 구조물이 입구를 막고 서 있다.
"출입금지"
평소같으면 들리는 탕, 탕, 탕, 경쾌한 공을 치는 소리도 오늘은 들리지 않는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남자의 발걸음은 무채색이다.
막연한 기대감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집에 들어오니 아직도 식탁에 불이 켜져있다.
고요하다. 잠시 후 식탁에서 노인이 맥주를 조르르 따르는 소리가 들린다.
또 맥주…
남자는 현관에서 곧장 방으로 향한다. 젊은 남자는 저녁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을 작정이다.
시간이 지나자 노인이 취해 발을 끌며 식탁에서 방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린다.
달칵.
문고리는 경쾌하지만 신경질적인 소리를 낸다.
그러자 다른 방에서 예순을 갓 넘긴 여자가 나온다.
여자는 슬리퍼 소리를 내며 거실을 지난다. 소리가 잿빛이다. 그리고 약간의 귀찮음이 묻어있다.
할 수 없으니 한다는 식의 터억- 터억- 슬리퍼가 규칙적 소리를 내다가 멎은 곳은 부엌이다.
감정 없는 손놀림으로 노인이 먹고 남은 그릇을 치운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젊은 여자는 티비를 끄고 휴대전화에 몰두한다.
애인일까?
친구에게 온갖 간지러운 말을 메신저로, 이모티콘으로 날리는 표정은 무덤덤하다.
나이든 여자는 설거지가 끝나자 다시 슬리퍼를 터억- 터억- 끌고 방으로 들어간다.
중년의 남자는 방에서 음악을 틀기 시작했다.
연로한 노인은 화장실에 가는 것 외에는 오늘 밤 일정이 없다.
2021.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