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시기를 보내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순 시기를 특별한 은총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분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시간과 우리들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겹쳐 놓고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찾거나 극복해 보려고 한다. 교회력에 따른 절기 중에서 사순 시기와 대림 시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까닭은 모두 부활과 성탄이라는 대축제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대림이 없는 성탄이 세속화되기 쉽듯이 사순 시기가 없는 부활은 그 기쁨의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대림이 기다림의 희망을 묵상하게 해 준다면, 사순 시기는 수난의 고통을 음미하게 해 준다. 그리고 대림이 하늘에서 오는 은총이라면 사순 시기의 고통은 땅에서 맺는 열매와 같다. 매년 사순 시기를 지내며 루틴(routin)처럼 해오던 일은 멜 깁슨 감독이 만든 영화, ‘The Passion of Christ’를 보는 일이다. 수난 복음을 읽는 것보다 훨씬 강렬하게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26년 사순 시기를 보내며 영화 보는 일 외에 고통을 생각해 본다. 지난해 대림 시기를 지내며 기다림에 대해 써 놓은 묵상 글도 함께 이 글 뒤에 실어보려고 한다.
1. 고통의 두 원인: 상실과 집착
근대 철학자 중에 대표적인 쾌락주의자는 홉스(T. Hobbes)이며, 영국 공리주의도 쾌락주의의 전통에 속한다. 홉스는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라고 했다. 고통은 누구나 피하려 하고, 쾌락은 가까이 가려고 한다. 공리주의자들은 심지어 쾌락과 고통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도 믿었다. 쾌락은 내가 가까이 가려고 하면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는데, 고통은 내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기도 하지만 많은 고통은 회피할 수 없이 직면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맞이할 때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하고 신에게 항의하기도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통받으며 죽어갔던 유대인 중에 어떤 이는 그런 상황에서도 고통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고통의 시작이 나 밖에 있는 원인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그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우연한 사고나 천재지변 같은 일로 생긴 고통은 원인을 안다 해도 내가 피할 수 있거나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이 내 안에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치유하거나 극복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고통의 내적인 원인을 나는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상실감(sense of loss)이고 다른 하나는 집착(obsession)이다. 정말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거나 사회적 관계망이 파괴되었을 때 겪게 되는 마음의 고통은 상실감에서 비롯된다. 물론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보다는 사람을 잃었을 때 고통이 훨씬 큰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한 사람을 잃었을 때보다는 나의 존재를 지탱해 주던 인간관계가 무너졌을 때의 심적 고통은 더 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랑하던 사람을 사고나 병으로 잃었을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상실감이 주는 고통 중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부모와 배우자를 잃었을 때 그리고 자식을 잃은 부모가 느끼는 고통일 것이다. 부모보다는 배우자, 그리고 배우자보다는 자식을 상실하는 슬픔이 더 크다고 말할 수는 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자식을 잃어버리는 데서 오는 고통의 강도는 측정 불가능할 것이다. 그 극적인 사례는 사순 시기에 집중적으로 만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모 마리아의 슬픔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례가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건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세월호 참사 때나 이태원 참사 때같이 채 피지도 못한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수많은 부모의 고통도 성모 마리아의 고통과 다르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