絶學無憂와 識者憂患 1

by 생각하며 놀자

1. 절학무우

절학무우는 노자의 『도덕경』 20장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그 뜻은 ‘배우는 것을 중단하니 걱정거리가 없다.’ 정도일 것이다. 노자가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고 공자가 유위(有爲), 예, 인의, 질서를 말하는 것을 보면, 노자 철학은 공자의 현실 정치에 대해 비판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의 대상은 공자의 권학(勸學)으로 보인다. 공자가 『논어』의 첫머리에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易說呼)라 하여 배움(學)을 권하였다면 노자는 그 학(學)을 비판하며 절학(絶學)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도(道)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웠다. 그런데 노자가 갑자기 절학(絶學)을 결론처럼 말하기 위해서는 그 이유를 먼저 말해야 하는데 『도덕경』 18장과 19장에 나와 있다. 18장과 19장은 전제가 되고 20장의 첫머리가 결론에 해당이 된다.

18장의 뜻을 대략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큰 도(여기서 도는 노자의 도이다)가 없어지면 인의(仁義)와 지혜(智惠)가 나타나고 그것이 큰 위선(僞善)을 낳는다. 가족 간에 불화가 생기니 효도며 자애 같은 것도 생기고, 어지러운 나라에 충신이 있기 마련이다.’ 인의, 지혜, 충과 효 등은 모두 유가의 덕목들이다. 노자는 인의나 지혜 같은 덕목이 있어서 오히려 큰 위선이 생기고, 가족 간에 화목하면 굳이 자식의 효도나 부모의 자애 같은 덕목도 필요가 없는데 화목하지 못하니 효를 강조하고 자애를 말하게 된다. 평화로운 나라에는 충신도 필요 없고 생기지도 않는다. 충신이나 장군의 동상이 많은 나라는 전쟁이 많았던 나라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노자가 볼 때 유가의 덕목을 배우고 익히라고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구별과 차별 그리고 위선의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도덕경』 19장에서 노자는 그 해법으로 세 가지 유가적 가치 추구를 끊고 포기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절성기지(絶聖棄智), 절인기의(絶仁棄義), 절교기리(絶巧棄利)가 그것들이다. 성인, 군자가 될 것을 끊어버리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라. 인과 의에 대한 집착과 노력을 중단하고 포기하라. 그리고 남의 것을 훔치는 기술(盜)을 멈추고 남을 해쳐서(賊) 얻는 이익을 포기하라. 그리하면 백성들에게는 백배로 이로우며, 효성과 자애로움도 회복되며 도적도 없어진다. 이렇게 말한 후에 노자는 20장에서 절학무우를 결론처럼 말하고 있다.



블랙웰서점.jpg 철학서가, 블랙웰서점, 옥스퍼드


그렇다면 배운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배움의 폐해가 무엇이기에 노자는 배움의 중단을 말하고 그래야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고 했을까?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워 알게 되는 것은 식별지(識別知) 또는 구별지(區別知)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면서 자아의식이 생긴다. 그런 다음에 이것과 저것,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좋은 것(善)과 나쁜 것(惡), 아름다운 것(美)과 미운 것(醜) 그리고 옳은 것(是)과 그른 것(非)을 구분하며 식별한다. 시비지심(是非之心)을 아는 것(知)의 실마리, 즉 단초(端初)라고 말하는 것도 모두 구별지이다.

이런 구별과 식별로부터 차이가 생기고, 우열이 생기고 차별이 생긴다. 노자가 배움이나 지식의 축적에 대해 걱정했던 이유도 아마 그것이 사람과 사회에서 인위적인 질서와 제도를 만들고 그것이 자연 본래의 질서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구별과 차별이 없는 세상에 유가의 덕목들이 오히려 차별과 인위적 질서를 강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년 퇴임을 앞두고 연구실 서가(書架)를 가득 채운 책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인문 사회과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된다. 손때 묻은 책부터 아직 읽지 못한 책, 그리고 결코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두고 직면하는 고민거리이다. 도서관에서도 기증을 받지 않아 난감했다. 이제 가르칠 일도 없는데 장소만 많이 차지하는 서가의 책들을 집으로 옮긴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던 나에게 어떤 이가 노자의 절학무우를 말하면서 소장하던 모든 책을 고물상에 넘기고 홀가분하게 은퇴했다는 어느 교수의 일화를 전해 주었다. 이제 가르칠 일도 배울 일도 없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논문을 쓸 의무감도 없어 책을 버리니 자유로워서 좋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절학무우가 이렇게도 쓰일 수 있다니 참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럴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아직 그러질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배우는 일을 멈추지 않고 배운 만큼 걱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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