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요즘은 천원이 마치 옛날의 백원처럼 쓰이는 세상이다.
커피 한 잔, 주차비, 심지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의 값도 천원으로는 감히 넘보기 어렵다.
전자결제가 일상이 된 시대에, 지갑 속 천원짜리 한 장은 이제 거의 구경거리처럼 느껴진다.
나는 탐사보도를 오래 했다.
그 덕에 생명의 위협도, 형사소송도, 감옥의 그림자도 여러 번 마주했다. 그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내가 일생을 두고 동경해온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7살 어렸고, 미스코리아 출신의 교수였다.
감히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마음 한켠에서 늘 빛처럼 존재했다.
그녀는 늘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당당하고 정의로운 길이라면 절대 두려워하지 말아요. 그 길 앞에 대통령 할아버지가 와서 막아선다 해도, 결국 멈출 수는 없어요. 진심으로 옳은 일은, 언젠가 길을 열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 말이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되었다.
그녀의 신념은 언제나 단호했지만, 그 단호함은 사람을 향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상 앞에서 내가 고개를 들 수 있었던 건, 그녀의 그 말 한마디가 내 가슴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녀가 내 돈 쓰는 모습을 보더니 불현듯 천원짜리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 천원에서 10원 하나라도 부족하면 999원이잖아요. 사람도 그래요. 작은 걸 소홀히 하면 결국 큰 것도 무너져요.”
그날, 나는 처음으로 천원을 다시 보았다.
그 지폐 속에는 내가 매일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한 인물, 퇴계 이황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퇴계의 삶도 완전함을 향한 끝없는 수양과 사랑의 누적이었다.
# 위대한 학자 뒤엔 위대한 어머니, 춘천 박씨
퇴계 이황(1501~1570)은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그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에서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이었고, 어머니는 춘천 박씨였다. 부친 이식의 첫 부인 의성 김씨는 2남 1녀를 두고 2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식은 춘천 박씨를 후처로 맞아 이의, 이해, 이징, 이황 네 아들을 두었다. 하지만 퇴계가 태어난 지 채 한 해가 되기도 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어머니 춘천 박씨는 전처 소생의 자식들과 자신이 낳은 네 아들까지 거두어 길러야 했다. 생계는 고되고 교육의 책임은 무거웠다. 그녀는 생활력 강한 여인이었다. 농사와 누에치기, 길쌈으로 생계를 이으며, 자식들이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엄격하게 가르쳤다.
퇴계는 어머니에게서 가정교육을, 숙부 송재 이우에게서 글을 배워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훗날 “내가 학업에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숙부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숙부 이우는 1498년 대과에 급제해 형조참판과 강원도관찰사를 지냈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머물렀다. 그 덕분에 춘천 박씨는 자식들을 훌륭히 교육할 수 있었다.
퇴계가 지은 「춘천박씨묘갈명」에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남아 있다.
“세상 사람들은 과부의 자식은 교양이 없다고 비웃는다. 너희는 남보다 백배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 비웃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엄함 속에서도 따뜻한 사랑을 잃지 않았고, 이황의 절제된 삶과 학문 정신은 바로 그 품에서 싹텄다.
한편, 퇴계가 어린 시절 1만 권의 책에 둘러싸여 자랐다는 일화로 인해, 부유한 가문에서 자란 것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대학』이나 『중용』 한 권을 사려면 논 400~500평에 해당하는 상면포 세 필을 내야 할 정도로 책값이 비쌌다. 그러나 그가 접한 책들은 본가의 재산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큰어머니 의성 김씨의 친정에서 건네받은 장서였다.
의성 김씨의 부친 김한절(金漢節)은 당대의 명문으로, 가문에는 수많은 책이 소장돼 있었다. 김씨의 모친, 곧 퇴계의 외할머니는 학문을 사랑하는 사위 이식에게 그 책들을 선물로 내주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생모가 달라도 어머니의 친정을 ‘외가’로 여기는 풍습이 있었기에, 퇴계 또한 이 책들을 외가의 유산처럼 받아들였다.
비록 이복형제들의 몫이었지만, 학문을 향한 그의 열정과 인품이 결국 그 장서를 그의 품으로 이끌었다. 퇴계의 사유와 학문의 뿌리는 아마도 그 외가의 책들 속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 예(禮)로 맺고, 연민으로 이어진 사랑
스물한 살에 퇴계는 허찬(許瓚)의 딸, 허씨와 혼인했다. 퇴계는 항상 “부부란 서로 손님을 대하듯 공경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이를 ‘상경여빈(相敬如賓)’이라 불렀다. 훗날 손자 이안도가 혼인할 때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자신의 부부관을 이렇게 정의했다.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며 만복의 근원이니, 아무리 지극히 친밀하고 가까워도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삼가야 하는 자리다.”
조선시대 한 문인이 그의 첫 부인을 위해 쓴 묘비명에도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선생은 스물한 살 때 부인에게 장가를 드셨는데, 서로 손님같이 경대를 하셨다. 거처하실 때와 대화하실 때를 보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처음엔 금슬이 없어 보이지만 오래 두고 보면 그 부부의 정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게 된다.”
퇴계는 일곱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넉넉하지 못한 살림 속에서 자랐다. 반면 허씨 부인의 친정은 일대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가문이었다. 두 사람은 예(禮)와 공경으로 서로를 대했다. 남들이 보기엔 전형적인 유학자 부부의 엄숙하고 차가운 관계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누구보다 깊고 다정한 ‘동갑내기 사랑’이 있었다.
퇴계는 허씨를 통해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예로 다스리는 마음’임을 배웠고, 허씨는 남편의 그 절제를 이해하며 조용히 곁을 지켰다. 그들의 결혼은 정과 공경이 함께 어우러진, 유학자적 사랑의 한 모범이었다.
허씨 부인은 스물셋에 맏아들 준(浚)을, 스물일곱에 둘째아들 채(采)를 얻었으나, 둘째 출산 후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허씨 부인의 3년상을 치룬다. 이어 1530년 그는 권질(權質)의 딸과 재혼했다. 그러나 두 번째 부인 권씨는 불행한 집안의 상처를 안고 태어나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고 한다.
이 결혼은 단순한 혼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집안의 비극과 한 선비의 연민이 맞닿은 만남이었다. 권질의 가문은 사화의 회오리에 휩쓸려 참혹한 일을 겪었다. 부친 권주는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평해로 유배되었고, 그 아들 권질은 거제도로 귀양을 갔다. 권주는 이듬해 사약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권질의 어머니 또한 남편 권주의 비보를 듣고 자결했다.
1519년 기묘사화 때에는 권질의 동생인 권전이 연루되어 형장에서 죽음을 맞았고, 권질은 또다시 유배를 당했다. 이번 유배지는 퇴계의 고향 예안이었다. 그 시절 어린 권씨 부인은 숙부의 죽음과 아버지의 유배, 가문의 몰락을 모두 지켜보며 마음의 빛을 잃었다. 퇴계는 평소 권질의 부친 권주의 인품을 존경해왔기에, 귀양살이하던 권질을 찾아 위로하곤 했다. 몇 해 뒤 병이 깊어진 권질은 퇴계를 불러 말했다.
“이제 자네 말고는 내 딸을 맡길 이가 없네.”
그 말은 유언과 다름없었다. 퇴계는 그 부탁을 받아들였고, 권씨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았다.
이듬해인 1531년, 그는 예안 온혜리 남쪽 양곡에 ‘지산와사(芝山蝸舍)’라는 초가를 짓고 가족과 함께 머물렀다. 이름 그대로 달팽이처럼 조용하고 느린 삶을 택한 첫 보금자리였다.
이곳에서 퇴계는 전처의 두 아들과 함께 학문에 몰두했다. 3년 뒤인 1533년, 그는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하지만 벼슬지에서도 그는 정신이 불안한 권씨를 곁에 두고 따뜻하게 돌보았다.
권씨 부인은 종종 엉뚱한 행동으로 퇴계를 난처하게 하기도 했다.
저고리를 지으면 한쪽 소매가 짧고 한쪽은 길었으며, 두루마기를 만들 때 풀을 걸러 쓰지 않아 밥풀 자국이 옷에 덕지덕지 붙곤 했다. 하지만 퇴계는 그런 옷을 입고도 한마디 불평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흉을 보면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요즘은 길이가 다른 소매가 유행이라오.”
# 이름 없는 여인을 위한 사랑, 적서의 구분을 지우다
1534년(중종 29년) 34세의 퇴계는 대과 전시에서 을과 제1인으로 합격했다. 이는 전체 4등에 해당하는 성적이었다. 그해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불과 이틀 만에 해임되었다. 귀양살이하던 장인 권질이 신사무옥 때 처형된 권전의 형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권세가 김안로(金安老)는 이 사건을 빌미로 퇴계가 사관이 될 수 없다고 공격했고, 그를 추천한 관원들까지 파직시켰다. 김안로는 퇴계의 첫 부인 허씨의 친정이 있는 영주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퇴계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한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퇴계는 이후 임금이 참석한 문신 경연에서 차석을 차지하며 인정을 받았다. 그는 상을 받고 승진했으나, 권력보다 학문을 택했다. 1537년, 어머니 춘천 박씨가 67세로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슬픔에 식음을 전폐하다 병을 얻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1546년, 권씨 부인이 첫아이를 낳다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나자, 그는 무덤 곁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1년 넘게 머물렀다. 죽은 아내를 향한 그의 애정은 끝내 식지 않았다.
퇴계는 첫 부인과 사별한 직후 한 첩을 들였다. 그녀는 장애가 있던 권씨 부인을 대신해 살림을 꾸리고 집안을 지켰다. 퇴계는 첩의 헌신에 감사하며,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이적(李迪)을 호적에 올렸다. 또한 이적의 후손이 적서차별을 받지 않도록 족보에 ‘적(嫡)’과 ‘서(庶)’의 구분을 두지 말라 명했다. 지금까지도 퇴계 가문의 족보에는 적서의 기록이 없다.
이 결정은 단순한 관용이 아니었다. 그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한 여인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그녀가 지켜준 평온한 일상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퇴계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에필로그
퇴계는 수십 차례 관직을 받고 사양하며 여러 번 서울을 오르내렸지만, 벼슬살이에 큰 뜻이 없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수많은 제자와 강학하며 ‘사람됨의 학문’을 체계화했다.
그가 남긴 『퇴계집』에는 3000여 통의 편지와 2500여 수의 시가 담겨 있다.
그 속엔 한 시대의 철학이자, 한 인간의 마음이 살아 있다.
그의 철학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아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절반은 여성에게서 온다.
여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여성을 사랑하지 못하면 참된 사람됨의 깊이에 닿을 수 없다.
퇴계는 그것을 생애로 보여주었다.
그에게 사랑은 욕망이 아니라 품음이었다.
그 품 안에서 학문은 자랐고, 철학은 생명을 얻었다.
그가 말한 도(道)는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세상의 결핍을 보듬는 따뜻한 사랑이었다.
천원짜리 한 장에는 숫자보다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속의 퇴계는 도를 말한 학자이면서, 사랑을 품은 인간이었다.
어머니의 엄함, 첫 부인의 따스함, 두 번째 부인의 연민,
또한 어려운 시기 함께해준 여인에 대한 마음까지...
아마 여교수가 내게 가르쳐준 것도 같은 뜻이었을 것이다.
“완전한 1000원을 위해서는 10원 하나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그 말은,
결국 사랑의 한 조각도 흘려보내지 말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