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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Nov 14. 2022

엘리자의 내일 (2017)

-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감독 : 크리스티안 문주

출연 : 애드리언 티티에니, 마리아 빅토리아 드래거스, 리아 버그나, 말리나 마노비치, 블라드 이바노브


루마니아의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2017년도 작품 <엘리자의 내일>을 보았다.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리스트 15위에 <4개월, 3주 ...2일>이라는 작품이 랭크되어 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감독의 다른 작품이라도 보자 싶어서 검색해 봤는데, 평점도 나쁘지 않아서 기대를 갖고 보았다. 결론은 잘 만든 영화 한 편을 잘 보았다는 것.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영화도 처음 접하는 것인데 앞으로 감독의 영화가 개봉이 된다면 챙겨서 봐야겠다. 

영화의 평들을 보면 대부분 '윤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영화가 이 영역을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테제라는 생각이 든다. 제 아무리 훌륭하고 촘촘한 계획이라도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곧 인생인 것이다. 




로메오(애드리언 티티에니)는 의사로 외동딸 엘리자(마리아 빅토리아 드래거스)를 영국으로 유학 보내려고 한다. 다행히 엘리자가 공부를 잘해 마지막 시험만 평소처럼 본다면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갈 수가 있다. 그가 딸을 유학 보내려는 이유는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환자로 만난 산드라(말리나 마노비치)와 내연 관계로 벌써 1년을 불륜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원래는 학교까지 태워다 줬었는데, 출근 전 산드라의 집에 들르기 위해 로메오는 엘리자를 학교 건너편에서 내려준다. 그리고 산드라의 집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을 때 연락이 오는데 엘리자가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엘리자는 범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하필 자신이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지 못한 날(불륜 행각을 하기 위해) 엘리자가 폭행을 당하자 로메오는 누구에게 말도 못 한 채 너무나 괴롭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강간까지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메오는 경찰서에 찾아가 경감인 친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경감은 어떻게든 범인을 잡겠다고 말한다.

신체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은 엘리자. 하지만 아빠인 로메오는 이 일 때문에 엘리자가 유학을 못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학금을 받고 영국으로 유학 갈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잡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 것이다. 엘리자는 시험을 보기는 보지만 기대 점수보다 낮은 점수를 받는다. 계획대로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가려면 다음에 남은 수학 과목 시험에서 10점 만점을 받아야만 한다. 늘 9점은 넘는 점수를 받았지만 10점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폭행범을 잡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경찰서에 들른 로메오. 그리고 자연스레 엘리자의 상황을 얘기하게 되고, 경감 친구는 방법이 있다며 한 사람을 소개해준다. 고위공무원이었다가 은퇴한 블라이라는 사람인데, 간 이식을 받아야 하는 지경이라 외과의사인 로메오와 접점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블라이는 엘리자의 학교 시험 담당 교사의 일을 도와준 적이 있다며 (그의 아내가 해고되었을 때 복직을 도왔다고 한다) 그에게 말을 해두겠다고 한다. 그렇게 로메오는 교사를 만나고, 교사는 엘리자가 시험지를 낼 때 표시를 해두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메오는 간 기증자가 생기면 제일 먼저 블라이를 수술하겠다고 그렇게 세 사람은 서로를 돕는 것(?)에 합의한다. 하지만 로메오 자신은 자기 나름대로는 도덕성이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의사들이 뒷돈을 받는 것은 당연지사인 환경이었음. 그러나 로메오는 받지 않음) 이런 뒷거래를 하고 난 뒤 집에 들어가기 전 혼자서 엉엉 운다. 


딸에게 어렵게 말을 꺼낸 로메오. 엘리자는 시험을 볼 것이지만 아빠가 말한 대로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사고가 있어 이식할 간이 생겨 블라이에게 수술만 하면 되는데, 불안한 블라이는 자꾸 돈을 주면서 이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로메오는 받지 않는다. 심장에 지병이 있어 정기적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집에 들른 로메오. 어머니는 엘리자를 보내지 말라고 하지만, 속도 모르면서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는 것 같아 로메오는 괴롭다. 산드라는 집에 일만 생기면 자신은 나 몰라라 하는 로메오에게 섭섭하고, 임신인 것 같다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산드라의 아들 문제로 조언을 구해도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그에게 실망해 이별을 고한다. 그때 산드라의 집 문을 누군가 두드리고, 문을 여니 엘리자가 서 있다. 할머니가 쓰러졌다고 아빠를 찾으러 온 것이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을 할 새도 없이 로메오는 어머니의 문제를 먼저 수습하고, 엘리자는 아빠에게 엄마한테 사실대로 털어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말한다. 집에 돌아와 하는 수 없이 로메오는 아내 마그다(리아 버그나)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사이가 좋지 않은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내연녀가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던 마그다는 로메오에게 짐을 싸서 나가라고 말한다. 


엘리자에게는 마리우스라는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마리우스는 로메오의 눈으로 봤을 때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딸이 만난다고 하니 뭐라고는 못하는데, 엘리자의 폭행범으로 입건된 용의자들 중 엘리자는 범인이 없다고 말하고, 로메오는 마리우스를 찾아가 왜 엘리자와 만나기로 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느냐, 신고한 사람이 너 아니냐, 너는 분명 범인을 보지 않았느냐! 하며 추궁하고, 어떻게든 누구 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몰아붙인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콧방귀만 뀐다. 



졸지에 오갈 데 없는 불륜남이 되어버린 로메오.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산드라의 집 밖에 없다. 자기 아이를 돌봐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줄 수밖에.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돌을 던진다.


"왜 던졌어?"

"순서를 안 지키잖아요."


내가 있을 때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말로 아이를 타이르고, 그는 아이를 데리고 자신의 병원에 간다. 그런데 검사 두 명이 로메오를 만나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슨 '블라이'가 직권남용으로 불법을 저질렀다는 것, 그를 수사할 수 있게 협조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메오는 거절한다. 그러자 검사는 이미 도청을 했다며, 당신과의 커넥션도 알고 있다고 은근히 압력을 넣는다. 그래도 로메오는 거절한다. 


아이를 산드라에게 보낸 후, 로메오는 딸 엘리자를 만난다. 시험을 봤다고만 말하고, 시험지에 표시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말하지 않는 엘리자. 로메오는 만났던 교사의 집에 찾아가는데, 그는 시험지에 표시가 없었다며, 다시는 집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일은 꼬여만 가고, 자신은 딸에게 유학을 강요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못난 아빠이기에 로메오는 반쯤 자포자기한다. 엘리자가 유학을 간다고 하면 보낼 것이고, 가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다시 엘리자를 만난 로메오, 대화에 강요하는 기미가 없자 그제야 엘리자는 말한다. 


"시험 시간이 끝나고 나서 울었어요. 시간이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시간을 더 줬어요. 그래서 끝까지 다 풀었어요. 잘 된 거 아니에요?"


그리고 유학도 가겠다, 가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고, 생각을 해보겠다고. 졸업식 때 아빠가 와도 좋다고 활짝 웃으며 말한다. 



엘리자의 졸업식에 참여한 후 병원에 오니, 블라이가 심장마비로 사망을 했고, 검사는 로메오에게 수사를 받아야 할 거라고 말한다. 로메오는 수사를 받겠다고, 하지만 아이들만큼은 개입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검사는 그렇게 해보겠다고 답한다. 




영화는 로메오의 집 창문에 누군가 돌을 던져 창이 깨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영화 중반부에 한 번 더 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끝까지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왜 이 일이 일어났는지 마지막에 산드라의 아이의 입을 통해 영화는 분명하게 알려준다. '순서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엘리자가 폭행을 당한 이후부터 로메오의 삶이 어떻게 무너져 내려가는 지를 보여주지만, 그는 이미 1년 전부터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연녀를 만나기 위해 엘리자를 학교까지 바래다주지 않은 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순서를 지키지 않음'은 영화의 중심 사건인 '학사 비리'로 시작된 것이 아닌 것이다. 자신은 윤리적인 인간(의사)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삶의 다른 부분에서는 확실하게 비윤리적이었다. 비윤리적임에도 윤리적이라고 믿었던 그 틈 사이로 그가 얼마나 많은 '순서를 지키지 않는 행위'를 했을지 모를 일이다. 


로메오 역시 젊은 시절 희망을 가지고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투신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허무했다. '자신의 딸만큼은 자신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다'가 입만 열면 하는 말이었다. 그만큼 그는 조국을 불신하고 환멸하고 있다. 외동딸을 위한 유학 계획을 꼼꼼히 세우고, 그 계획이 성사되도록 아이를 가르치고 이끌었다. 골인 지점 직전까지 아이가 잘 따라와 주었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예상대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된 것 같은 그때, 마지막 관문만 통과하면 된다고 생각한 그때, 사고는 생기고 계획은 틀어진다. 


로메오는 '오직 유학'만이 이 시궁창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가 세운 계획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괜찮았어도 오늘 괜찮지 않을 수 있다. 사건 사고라는 것은 별안간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사건'이 발생할만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조금조금씩 틈을 준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나의 불륜과 아이의 유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 그렇게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란 모든 부분이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고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미 조금씩 금이 가고 있지만 무너질 때까지는, 적어도 구멍이 나고 한 구석이 부서질 때까지 우리는 인지하지 못한다. 



나의 계획이 틀어지고 무너졌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의 계획이란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목도한다.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믿었던 것이 무너졌을 때, 인생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를 위한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한 것이 무너졌을 때, 오히려 내 아이가 담담하고 지혜롭게 자기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을 스스로의 판단으로 거부하는 것, 그것이 곧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로를 마련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동시에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으며 또한 자신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발판이 된다. 그리고 스스로 잘 판단했다고 생각한 아이는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미소를  보여준다.


로메오는 엘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엘리자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바라고 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엘리자의 내일은, 엘리자가 아니고서는 결정할 수 없다. 바로 그 내일의 주인이 엘리자이기 때문이다. 결과를 차치하고라도, 자신의 내일에 대해 스스로 결정한 아이는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단단한 아이로 자라날 것이다. 자신을 향해, 부모를 향해 미소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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