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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Nov 18. 2022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2014)

- 잔인함은 괜찮고, 고통은 수용할 수 없는 당신에게

감독 : 올리비에 아사야스

출연 : 줄리엣 비노쉬, 크리스틴 스튜어트, 클로이 모레츠, 라르스 아이딩어


프랑스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2014년 작품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보았다. <퍼스널 쇼퍼>를 넘 재밌게 봤어서 바로 다운로드하였는데, 이 영화도 정말 재밌게 잘 보았다. (한 번 봤을 때 느낌) 그리고 리뷰를 쓰려는데 잘 정리가 안되어서 한 번을 더 봤다. 그러면 뭔가 명확하게 보여야 하는데 더 복잡하고 어렵다. 잘난척하기 위해 일부러 복잡하게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감독님이 워낙에 똑똑한 분 같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자체가 심플하지가 않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내용이 그러한데 형식도 실재와 판타지를 교묘하게 섞어 놓아서 되게 재밌게 보긴 봤는데 막상 영화에 대한 글을 쓰려니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달까? 그럼에도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님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은 매우 아쉽다. 이제야 알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사실, 이 영화 개봉 당시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내 기억으론 중년의 여배우가 과거에 누렸던 영광,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 자신이 맡을 수 없는 역할에 대한 향수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내용으로 소개했었다. 그런데 그 내용 자체가 내게 너무 진부하게 들려서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보지 않았던 것인데, 이번에 보면서 영화 소개도 진짜 잘해야지, 잘못 소개하면 좋은 영화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게 만드는구나 싶었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그가 만들어 선 보일 영화들을 분명히 좋아하게 될 것이다.


<퍼스널 쇼퍼>도 그랬지만, 이 영화도 진짜와 가짜, 현실과 극, 현실과 판타지 사이를 모호하게 넘나 든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영화 비평가 출신이라 그런지 '영화'가 소재로 많이 쓰이는 듯하다. 그리고 그 자신이 영화를 만들면서 현실과 극의 경계에서 느끼는 모호함과 어지러움이 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고,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일 테다. 이 영화가 <퍼스널 쇼퍼> 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많은 것들을 함의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다른 매력, 나름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공들인 느낌은 이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더 있다. 그런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퍼스널 쇼퍼> 쪽이 더 좋다. 그리고 줄리엣 비노쉬. 연기를 잘하는 명배우들, 연기만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배우들도 많지만, 나는 이 영화 속 줄리엣 비노쉬를 보면서 이 사람은 '영화'라는 것에 헌신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일을 잘 하는 것 이상의 무엇. 진정으로 '영화'라는 것을 사랑하고 그래서 거기에 자신을 걸고 희생이 필요하면 기꺼이 희생도 하는.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졌달까.




마리아 앤더슨(줄리엣 비노쉬)은 세계적인 배우로, 자신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각본가이자 연출가인 빌렘 멜키오르를 대신해 상을 받으러 스위스에 가고 있다. 그녀는 이혼 소송 중이며 그녀의 곁에는 젊고 아름다운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이 동행하고 있다. 가는 도중 그녀는 빌렘의 부고를 듣는다. 하지만 프로답게 이미 약속된 스케줄을 넉넉히 소화한다. 빌렘 멜키오르의 페르소나는 마리아가 아닌 헨릭 발트라는 남자 배우인데, 마리아는 그와 두 작품을 함께 찍었었고, 그를 싫어한다. (애정의 문제, 성격의 문제 등으로)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와 헨릭의 '연기 스타일'이다. 마리아는 대본을 받으면 캐릭터를 심도 깊게 분석하고 이해한 후, 그 캐릭터에 동화되어 연기를 한다면 헨릭은 (빌렘의 말 - 빌렘의 부인이 전한-에 의하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대본 속 캐릭터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여 연기하는 것이다. 좀 더 얘기하자면 마리아는 마리아식으로 캐릭터를 해석해서 연기를 한다면 헨릭은 자신은 없고 캐릭터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파고들지 않지만, 맨 마지막에 대본에 없던 새 씬을 준비하면서 보이는 마리아의 말과 행동을 보면 중요한 지점이다)



영화의 핵심 사건은 실력 있는 연출가 클라우스(라르스 아이딩어)가 마리아에게 지금의 마리아가 있게 한 빌렘의 작품 <말로야 스네이크>헬레나 역할을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을 수락한 후 대본 연습을 하며 그 과정에서 분노와 수치심을 느끼는 마리아 그녀 자신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알프스의 '실스 마리아'에 '말로야 고개'가 있는데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져 그 고개로 넘어 들어오는,  안개처럼 보이다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는, 움직임이 마치 뱀과 같은 구름을 가리키는 말이다. 빌렘은 자신의 최대 역작인 <말로야 스네이크>의 영감을 받은 이곳에 은둔자처럼 살고 있었고,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외부에 알리기 싫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쓴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는 자신의 타고난 매력으로 동성(여성) 직장 상사 '헬레나'를 사로잡고, 그녀에게 잔인하게 굴며 속박하고 갑자기 떠남으로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시그리드'와 시그리드로 인해 고통받는 헬레나의 이야기이다. 마리아는 '시그리드' 역으로 스타가 되었는데, 클라우스는 이제 마리아에게 '헬레나'역을 맡아달라고 하는 것이다. 영원히 '시그리드'로 남고 싶은 마리아는 클라우스의 제안을 거절하지만 헬레나는 20년 후의 시그리드라는 그의 말에 설득되어 결국 헬레나 역을 맡는다. 그리고 시그리드는 헐리웃의 악동 조앤(클로이 모레츠)이 맡는데, 마리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앤의 행동을 믿고 의지하는 발렌틴이 추켜세우자 신경이 쓰인다. 


작품을 할 때 항상 캐릭터에 동화되는 마리아는 헬레나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 너무나 괴롭다. 마치 자신이 장악당하고, 멸시당하고 버림받는 것 같아 견디기가 힘들다. 그러다 보니 이해하고 싶지가 않다. 대본 속 대사들이 비현실적인 것 같다. 발렌틴은 헬레나라는 캐릭터가 시그리드에게는 없는 성숙함과 인간미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헬레나를 준비하면서도 여전히 시그리드에게만 매력을 느끼며 평생 시그리드로 남고 싶다는 마리아를 이해하기 힘들다. 


"잔인함은 멋지고, 고통은 짜증 난다니..."



조앤은 유부남과 사귀고 있었는데, 그 유부남이 유명한 소설가라는 것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조앤이 이 작품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연인 크리스가 런던에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마리아 앤더슨을 존경하기 때문에 기꺼이 이 연극에 참여하겠다고 한 것이다. 조앤은 크리스를 대동하고 마리아를 만나고 그녀를 한껏 추앙한다. 만나기 전에는 너무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는데 만났는데 자기한테 좋은 말만 해주니까 또 애가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헬레나'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지지 않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발렌틴에게 신경질을 부리게 된다. 발렌틴은 자신의 작품 해석은 다 틀리다며 너는 모른다고 막말하는 마리아와 같이 일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다. 마리아와 발렌틴은 빌렘 부부가 살던 실스 마리아의 별장에서 대본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등산 후 잠이 들었다가 해가 질 무렵에야 내려오게 되었는데, 그때 마리아는 지름길을 안다며 자신이 앞장서서 내려오는데, 사실 잘 알지도 못한 상태로 고집을 피웠던 것이다. 발렌틴은 분노와 짜증을 자신에게 풀면서 자신이 하는 말마다 딴지를 거는 마리아에게 내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함께 일하기 힘들다고 말하고 마리아는 네가 필요하다며 발렌틴을 붙잡는다. 얼마 후 '말로야 스네이크'를 볼 수 있을 거란 현지인의 제보로 발렌틴과 마리아는 산에 오르는데, 날이 선 마리아는 이 길이 맞느냐, 정말 볼 수 있느냐, 그런 건 봐서 뭐하냐며 신경을 긁고, (마리아가 앞장선 길은 잘못된 길이었고, 발렌틴이 앞장선 길은 맞는 길이었다) 도착한 그곳에서 말로야 스네이크인 것 같은 안개구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리아는 말로야 스네이크의 풍광에 압도되어 발렌틴을 부르지만 발렌틴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흘러, 공연 날짜는 다가오고 마리아는 새로운 비서를 두었다. 클라우스는 빌렘이 <말로야 스네이크>의 속편을 쓰고 있었다며 빌렘 부인에게 전해 들은 속편의 내용을 바탕으로 새 씬을 만들었다고 마리아에게 읽어보라고 전하고, 겨우 헬레나를 준비했는데 새로운 씬이라니 마리아는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비서는 클라우스가 새 대본에 대한 마리아의 답을 듣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지만 마리아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지금 읽으면 생각만 복잡해진다고, 막판에 알아야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온다고. 시그리드 할 때 그렇게 했다고. 헬레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지만 아니다. 마리아는 새 대본을 읽었고, 그걸 붙잡고 있었다. 


리허설 전 날, 클라우스와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이 지나도 그가 오지 않는다. 이유는 크리스의 아내가 자살시도를 했고 위중한 상태라 이 일을 수습하느라 그런 것이다. 클라우스와 마리아는 조앤과 크리스의 불륜을 의심하는 기사들, 그리고 냄새를 맡고 따라붙은 파파라치 때문에 정신이 없다. 이제 마리아는 이슈의 중심이 아니라 이슈를 만드는 조앤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지경인 것이다. 

리허설 당일, 리허설 전 잠깐 대기실에서 '나이를 초월한 돌연변이' 역할을 들고 마리아를 찾아온 젊은 감독을 만난다. '나는 당신네 세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 세대가 그리려는 것에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하지만 예상과 달리 자기 나이가 젊다고 해서 이 세대에 속한 건 아니라고, 난 이 세대 문화를 싫어하고, 전혀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마리아는 뭔가를 생각한다.

리허설이 시작되고, 마리아는 조앤의 시그리드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헬레나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몇 초간의 말미도 주지 않고 뒤돌아 나가는 시그리드(조앤)를 보며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지는 것이다. 마리아는 조앤에게 잠시라도 머물다가 나가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하지만 조앤은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딱 잘라 거절한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는 리뷰를 쓰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영화다.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영화가 아니어서 그렇다. '지나간 시절에 대한 미련'을 표현한 영화라고 하기에는 많이 아깝고, 하지만 그 부분이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워 그렇다. 일단 마리아가 헬레나를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젊음에 대한 향수보다는 잔인하고 오만하게 군림하는 것에 대한 향수가 더 강해 보인다. 마리아는 '자유'라는 말로 그 모든 것을 포장하지만 확실히 오만했고, 제멋대로였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버림받고 고통받는 것,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 그녀가 작품에 임하는 스타일의 문제가 있다. 마리아는 캐릭터를 캐릭터로 받고, 지나치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이입시키지 않는, 그런 유형의 연기자가 아니다. 캐릭터를 붙들고 씨름하고 가장 깊은 곳까지 이해한 후, 자신을 완전히 쏟아부어 자신의 캐릭터로 만들어 연기를 한다. 물론 시그리드를 연기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는 순수하게 캐릭터를 캐릭터로 표현했다. 


배우로 인정을 받고, 수많은 작품들을 경험하면서 마리아 자신이 작품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생겼을 것이고 그래서 캐릭터를 분석하고 파고들고 그에 동화되어 자신만의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스타일을 구축한 것일 테다. 하지만 시그리드를 연기하면서 느꼈던 쾌감. 타인을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는 위치에 서는 것.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감정적 지위의 우위에 서서 느꼈던 쾌감이 아마도 마리아에게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진짜 시그리드인 것 마냥. 시그리드처럼 노골적으로 우월감을 표출하며 사회생활을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아마도 마리아는 자신의 경력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세련된 자세로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위치를 즐기고, 겸손하고 소탈한 태도를 견지함으로 마음속 본질적 욕망을 숨기고 그 위치를 유지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었다고 헬레나라니. 고통받고 버림받는 헬레나라니. 



실스마리아는 실재하는 지명이다. 말로야 스네이크도 마찬가지이다. 올리비에 감독은 실재하는 것을 가져다가 실재하지 않는 대본, 연극을 만든다.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구름은 실재하지만 빌렘 멜키오르가 집필한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극 속 헬레나와 시그리드는 현실의 마리아와 발렌틴으로 치환된다. 헬레나와 시그리드가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헬레나의 일면이, 발렌틴에게서 시그리드의 일면이 보인다. 마리아가 빌미를 제공했지만 발렌틴이 홀연히 마리아를 떠나는 결말도 <말로야 스네이크>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의 제목도 범상치 않다. 물론 말로야 스네이크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가 맞다. 실스마리아에서 볼 수 있는 구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 속 연출가의 이름이 '클라우스'인 것과 주인공의 이름이 '마리아'인 것이 아무 관련이 없을까? 그럴 리가 없다. 제목은 실스마리아의 클라우즈이지만 영화에서는 클라우스의 마리아로 보인다. 항상 본인이 우위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마리아이지만 실은 클라우스의 말에, 발렌틴의 말에 영향을 받으며 휘둘린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말로야 스네이크'는 '악천후의 징조'다. (영화 속 삽입되어 있는 다큐 속 내레이션의 일부)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보기 힘든 대자연의 풍광에 사람들은 마음을 빼앗기지만 이 구름이 지나간 후에는 몹시 나쁜 날씨가 따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악천후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영원히 악천후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악천후 너머를 볼 수 있고 또 알고 있다. 태풍이 지나간 후 열린 맑은 하늘과 시원한 공기를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다. 그래서 절망하지 않는다. 

마리아는 다시 <말로야 스네이크>를 경험하면서 그야말로 마음속 악천후를 지난다. 잠재워지지 않는 욕망과 지나간 날들에 대한 향수와 미련, 사회적 위신과 체면과 현실적인 문제들이 서로 뒤엉켜 싸우며 마리아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말로야 스네이크가 말로야 고개를 지나가듯이, 결국 공연은 시작되고 약속된 날짜에 끝날 것이다. 그러면서 복잡하고 널뛰는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을 것이다.

발렌틴, 조앤, 클라우스, 젊은 감독의 말들. 무엇보다 연습 과정을 지나며 마리아가 보게 된 자기 내면의 연약함과 추함은 마리아를 건드리고 생각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변화시킨다. 이제 자신은 시그리드가 아닌 헬레나를 연기해야 하는 나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의 시그리드와 조앤의 시그리드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연기하는 배우들의 스타일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만든다. 헬레나를 연기하면서 시그리드에게는 없는 헬레나만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고, 조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클라우스에게 주도권을 내어줬어도 맡은 것을,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마리아에게 고통받으나 성숙하고 순수하고 인간미 있는 헬레나의 모습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고 해도 최선을 다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다.

헬레나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고, 나만의 시그리드를 타인에게 내어준 마리아는 고통을 알고, 내려옴과 내어줌을 배운 인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지금은 조앤에게 매달리고 거절당하는 형국이어도 연극이 끝난 후의 마리아는 결코 초라한 모습이 아닐 것이다. 악천후가 끝이 아니듯, 악천후가 지나간 후에 더없이 맑은 하늘이 찾아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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