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고독한 이유는 사랑한다고 말할 대상이 없어서이다
감독 : 찰리 카우프만
출연 :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사만다 모튼, 미셸 윌리엄스, 캐서린 키너
BBC가 선정한 21세기 위대한 영화 20위에 랭크된 찰리 카우프만 감독의 <시네도키, 뉴욕>을 보았다. <존 말코비치 되기>,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가라고 하는데, <존 말코비치 되기>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HER>를 넘 좋아해서 감독의 다른 작품도 보고 싶어 본 것인데, 아이디어는 정말 기발하지만 내 취향과는 그다지 맞지 않는 영화였다. <이터널 선샤인>은 정말 오래전에 본 영화라, 본 당시에는 내 개인적인 상황과도 겹쳐서 참 인상 깊어 리뷰도 썼었는데 지금 다시 보면 어떨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영화는 검증된 각본가의 데뷔작인데 BBC리스트 20위에 랭크될 만큼 많은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은 작품이다.
시네도키(synecdoche)가 무슨 뜻인가 찾아보니
Synecdoche : 제유(提喩: 사물의 한 부분으로써 그 사물 전체를 가리키거나, 그 반대로 전체로써 부분을 가리켜 비유하는 것. 예를 들어 ‘Australia lost by two goals (오스트레일리아가 두 골 차이로 졌다)’에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오스트레일리아 팀’을 가리킨다.)
라고 네이버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영화의 중반부부터 연극 연출가인 주인공 케이든 코타드(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가 거대한 창고를 빌려 '뉴욕'이란 것을 사실적으로 구현해보겠다고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연극을 준비하는 내용이 주가 되는데, 그것을 보면 영화의 제목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뉴욕'을 표현한다는 것은 도시 그 자체를 그린다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삶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찰리 카우프만 감독이 그리는 삶이 참 우울하고 염세적이다. 코엔 형제의 그것처럼 완전히 꽉 막힌 염세는 아니지만 삶에는 그래도 밝은 부분이 있고, 희망이라는 것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기에 (세상과 인생에 대한 기대가 없음에도) 영화의 주제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케이든에게는 아델(캐서린 키너)이라는 아내 사이에 4살 된 딸 올리브가 있다. 아델은 아이를 돌보고, 케이든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받아내며, 집안일을 하고 동시에 화가로서 자기 일을 하고 있다. 케이든에게는 건강염려증이 있어 자기 몸의 작은 변화만 있어도 아델에게 시시콜콜 보고하며 어리광을 피운다. 물론 실제로 케이든의 몸에는 어떤 문제가 생긴다. 이마가 찢어서 병원을 간 건데, 의사는 안과를 가보라고 하고, 안과에 가니 신경외과에 가라고 한다. 결국 뇌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침샘도 마르고, 울 수도 없게 되지만 사는 데에 지장이 있는 병은 아니다.
케이든이 가정이 있는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연극 공연장 매표소 직원인 헤이즐(사만다 모튼)은 그를 유혹한다. 케이든은 칼 같이 잘라내 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넘어가지도 않는 애매한 자세를 취하는데, 가정을 깨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든의 연극이 공연되는 첫날, 아델은 해야 할 작업이 있어 공연장에 가지 못한다고 말하고, 케이든은 많이 섭섭하다. 그 섭섭함이 가시기도 전에 아델은 딸 올리브만 데리고 베를린으로 가겠다고 한다. 전시가 있어서 케이든과 다 함께 가기로 약속되었던 건데, 떨어져 지낼 시간이 필요하다며 그렇게 그의 곁을 떠나 수 해 동안 연락을 하지 않는다.
영화는 시간을 순차적으로 하나하나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몇 해, 혹은 십여 년을 건너뛴다. 시간은 분명하게 흘러갔지만 케이든이 그걸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7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올리브를 4살로 알고 있고, 그의 차기작은 17년째 준비 중인데, 배우들의 입을 통해서 그것을 인지한다.
아델과 올리브가 떠나고 헤이즐과 다시 잘해보려고 하는 케이든. 하지만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 (섹스를 시도했으나 실패) 실패하고, 크게 실망한 헤이즐은 케이든에 대한 마음을 접고 데릭이라는 다른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낳는다. 헤이즐은 집을 하나 샀는데, 그 집은 불에 타는 집이었다. 연기가 자욱한 집. (불이 붙어 있지만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적이다) 그 집에서 데릭과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오랫동안 케이든과 일해 온 배우 클레어(미셸 윌리엄스)가 있는데, 클레어가 케이든을 좋아하면서 케이든은 새 가정을 꾸리게 된다. 하지만 케이든은 클레어나 그 사이에서 낳은 딸에게나 정을 붙이지 못한다.
연극은 클레어의 역할을 클레어가 맡고, 케이든도 극 속에 필요하다는 배우(새미)의 조언으로 새미(톰 누넌)가 케이든의 역을 맡게 되면서 변곡점을 만난다. 주객이 전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새미는 이런저런 첨언을 하는데 그의 말을 따라 헤이즐 역할이 생기고, 새미는 진짜 헤이즐을 좋아한다. (헤이즐은 직장을 잃고 케이든에게 일자리를 부탁해서 그의 비서일을 하고 있었다) 헤이즐도 새미에게 호감을 보이자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케이든은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헤이즐이 다시 케이든에게 갈 것 같은 기미가 보이자 새미는 공연장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그 사이에, 케이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암이 온몸에 전이된지도 모른 채 갑자기 죽은 것이다. 또 이제 이십 대가 된 딸 올리브가 위독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델에게는 마리아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아델과 올리브는 마리아에게서 케이든이 주지 못한 짜릿함과 자유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마리아는 악한 의도를 갖고 아델과 올리브를 케이든에게서 떼어내고 다시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어린 올리브는 마리아의 말들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져 그녀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그녀에게 종속되어 버린다. 온몸에 장미 문신을 한 올리브는 그것 때문에 감염이 되어 이른 나이에 죽게 된 것이다. 마리아는 케이든이 게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그래서 올리브는 아빠가 엄마와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던 것이기에 생애 마지막 순간에 용서를 구하러 찾아온 아빠 케이든을 끝내 외면한다. 그리고 새미의 장례식을 치른 후 처음으로 케이든은 헤이즐의 집에서 밤을 보낸다. 항상 자기 옆에 있었던 헤이즐을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고백하고, 이제 서로의 마음이 통했으니 된 거라며 두 사람은 희망을 말하고 사랑을 나누지만 다음 날 헤이즐은 연기 때문에 질식사한 상태로 발견된다.
헤이즐이 그렇게 갑자기 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든은 어머니의 부고까지 듣는다. 무단 가택침입으로 살해된 것이다. 연극에서 헤이즐 역을 맡았던 배우 타미(에밀리 왓슨)가 그와 동행함으로 그를 위로한다. 장례식이 끝난 후 들른 어머니의 집은 어머니가 흘린 피가 낭자한 채 그때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서 케이든과 타미는 섹스를 하지만 큰 의미는 없다.
새미의 죽음으로 케이든 역할이 공석이 되고, 엘렌 역할을 했던 배우(여자) - 실제 엘렌은 등장하지 않는데 엘렌은 아델의 집 가사 도우미이다 - 가 자신이 케이든의 역할을 맡겠다고 한다. 그녀는 케이든이 시키는 대로 케이든을 연기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 케이든의 역할인 연출가의 영역을 조금씩 점령해간다. 케이든은 엘렌의 지시대로 엘렌의 역을 맡게 되고, 그녀가 하나하나 불러주는 대사를 그대로 옮기는 꼭두각시 연기자로 전락한다.
연극은 끝을 향해 가고, 이것이 연습인지 리허설인지 실제 공연인지도 모를 상황에서 그는 마지막 장면을 엘렌의 디렉션에 따라 연기한다. 그는 주검이 널브러져 있는 폐허가 된 뉴욕 한복판에서 홀로 천천히 걷다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벤치에 앉고, 한 여자가 나타나 그 옆에 앉는다. 그 여인은 엘렌의 꿈속에 등장했던 엘렌의 엄마 역을 맡았던 배우다. 이 세상에 홀로 남은 케이든은 어디서 본 것 같지만 실제로 처음 보는 알지 못하는 이 여자의 어깨에 기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사랑해요."
줄거리를 보면 어렵지 않을 것 같지만 영화가 꽤 난해하다. 대사들이 평소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아니고 감독이자 작가인 찰리 카우프만이 공들여 만든 대사들이라 보면서 의미를 바로바로 이해하는 게 쉽지 않고, 곱씹어야 한다. 그리고 형식도 굉장히 실험적이다. 시간의 표현, 공간의 표현 모두 일종의 판타지를 활용한다. 17년의 세월을 케이든이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이고, 딸 올리브를 만나기 위해 베를린에 가지만 여전히 아이가 4살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 또한 뉴욕의 모든 것을 담아낼만한 거대한 창고가 존재할 리도 없고, 불에 타고 있는 집이 형체를 유지한다는 것, 그런 집을 팔고 산다는 것, 그 집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모두 말이 되지 않는다.
또 17년간 연극을 준비하면서 배우들이 자리를 지킨다는 것, 그 시간을 충당해 낼 돈을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가 없고, 돋보기를 통해서만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현실적이지는 않다. 마리아라는 친구가 딸 올리브를 장악해가는 모습을 아델이 보고만 있었다는 것도 믿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되어 있는 구조 속에서 영화가 말하는 것은 심플하다. 인간은 죽는다는 것, 특별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삶은 고독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모든 인간은 고독하고, 먹고 자고 살고 죽는다는 점에서 모두 동일하며 결국에는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삶을 삶 되게 하는 것들 역시 존재한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웃음과 눈물을 나누고,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자면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며, 삶의 어려움을 배우자와 함께 나누고 짊어지면서, 일로 인정받고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또 몸이 쇠약해질 때 돌보아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으로, 치료받을 수 있음에, 나의 아픔에 함께 마음 아파해줄 친구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래도 삶을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삶을 삶 되게 하는 것들은 쏙 빠져있다. 한 때 그런 것을 누리고 느꼈을지언정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그런 것들을 되찾을 수는 없다고 못을 박는다.
이 영화의 많지 않은 감상들을 보면서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영화 속 대사에 여운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찰리 카우프만이라는 이미 인정받는 글쟁이(각본가)가 인고의 노력을 통해 얻어낸 통찰이 가득한 명대사들이 실로 이 영화에는 넘쳐난다. 하지만 대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제를 뒷받치는 것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멋진 대사로 표현할 때 영화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이 배가된다. 그러나 케이든이 한없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 안에 그런 대사들이 있으니 크게 와닿지가 않는다. 대사가 영화를 살려준다기보다 따로 자기 혼자 멋지달까.
그래도 완전히 입구를 막아놓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곁을 오래 지킨 사람에게만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 실제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한다'라고 말함으로써, 누군가 나의 사랑고백을 들어줄 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래도 죽음보다는 삶이 더 낫다고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랑을 하길 원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길 원하는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길 원한다.
내 안에 고여서 썩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말 한디.
"사랑해요."
그 말을 내뱉는 것 만으로 나는 숨을 쉴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비록 내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