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만남의 끝엔 이별이, 이별 뒤엔 새로운 만남이.
감독 : 파블로 베르헤르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의 2023년 영화 <로봇 드림>을 봤다. 개봉 후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이 영화에 대한 좋은 소문들을 들어서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는데 멀지 않은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어서 아끼는 사람과 함께 보고 왔다.
로봇과의 우정이라고 해서 sf적인, 혹은 ai와 인간과의 관계를 떠올리면 영화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인연'에 관한 영화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형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도그,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웃이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지내는 모습을 보며 친구가 되어준다는 로봇 광고를 보고 구매하게 된다. 집으로 배달된 커다란 박스에는 아직 친구라고 부를 수 없는 분해된 상태, 조립이 필요한 로봇 부품들이 들어있다. 쉽진 않지만 이렇게 저렇게 해 보면서 로봇을 완전한 모습으로 조립하는 데 성공한다. 이 로봇이 얼마나 성능이 좋은지, 자기가 하는 행동을 금방 따라 하고, 자기가 먹는 것을 같이 먹을 수 있고, 대화도 된다.(이 영화에선 대사가 나오지 않지만) 데리고 공원에 나갔는데, 좋아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자 로봇은 완벽한 파트너가 되어 도그의 춤을 맞춰준다. 도그는 충만한 합일감을 느낀다.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로봇. 그 경험들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그가 자신을 소중히 대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로봇도 도그에 대한 마음이 깊어진다.
로봇과 즐거운 나날을 보내는 도그. 여름엔 해수욕장이지, 하며 신나게 물놀이 용품을 챙겨서 로봇과 함께 해수욕장에 간다. 종일 물놀이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신나게 놀았는데, 돌아갈 때가 되어 집에 가려니 로봇이 움직이지 않는다. 뭐든 다 가능한 줄 알았지만 물에는 취약했던 것.
어떻게든 데려가려고 하지만 도그 혼자 데려가기엔 로봇이 너무 크고 무겁다. 내일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널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지만 야속하게도 이들이 방문했던 그날은 해수욕장 개방 마지막날이었던 것이다. 커다란 자물쇠에 걸려 꽁꽁 닫혀버린 문을 경비원 몰래 뺀치까지 동원에 문을 열려고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경찰서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다음 해 다시 개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달력에 크게 표시해 놓고 그날만이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혼자서 그날이 오기까지 기다린다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꿈을 꾼다. 너와 함께 하는 꿈. 혹은 너와 다시 함께 할 수 있는 내가 된 꿈. 꿈에서는 조력자가 나타나기도 하고, 너 아닌 다른 사람이 등장했지만 결국 너의 얼굴로 바뀐다. 너와 함께 있다면 나는 마치 꽃밭에서 꽃과 함께 춤추는 것과 같은 기분일 것이다. 너는 아니지만 친구가 될 수 있는 누군가(새들)가 내게 오기도 한다. 나는 누워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그들은 나를 둥지 삼아 알을 낳고, 안식을 취하고, 자녀를 키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정해져 있다. 계절이 바뀌면, 모두 잘 날게 되면 더 이상 이곳에서만 머무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를 만나고 또 떠나보낸 후에 난 여전히 너를 기다린다. 너와 함께 있어 행복할 수 있음을 꿈꾸며. 하지만 현실은 조력자인 줄 알았던 누군가가 나의 다리 한쪽을 잘라가고, 도그가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한 그날이 아직 안되었을 때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 버린다. 그리고 소중히 여겨주기는커녕 고물상에 팔아버리고, 고물상은 또 나를 내동댕이 쳐서 팔다리가 여기저기 떨어져 나갈 뿐이다. 네가 없어도 일상을 즐겁게 보내고 싶어 스키장을 가고, 핼러윈 축제에 적극 참여하지만 나를 괴롭히거나, 내 맘을 몰라주는 존재들만 맞닥뜨린다.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때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준 덕(오리 아가씨)을 만나 로봇과 나눴던 우정과는 조금 다른 미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 그녀에게서 받은 엽서에는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식이 적혀 있다. 나는 그렇게 혼자 널 데리러 갈 날만을 기다린다.
로봇을 데려올 생각에 설렘을 안고 달려 해수욕장에 도착하지만 이미 그곳에는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로봇이 있었던 자리를 겨우 찾았지만 어디에도 로봇은 보이지 않는다. 주변 모래를 파다가, 그의 다리 한쪽만 발견할 뿐이다.
이렇게 고물상에서 분해된 채로 사는 거구나 했던 로봇은 부품을 사러 고물상에 온 라스칼(라쿤)의 집에 가게 된다. 몸통은 찾을 수 없어 머리와 한쪽 다리와 양팔을 사가지고 와서 원래 몸통 대신 라디오로 대신하고 한쪽 다리는 청소기 헤드로 대신해서 걸어 다닐만한 로봇의 몸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이제 라스칼이라는 새 반려자와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라스칼은 로봇을 잘 대해준다. 확실히 도그와는 다른 존재이지만 자신을 친구로 존중한단은 것은 알 수 있다. 로봇을 찾을 수 없었던 도그는 새로운 로봇을 장만한다. 로봇과 어디든 함께 다녔던 것처럼 똑같이 새 로봇과 거리를 다니며 일상을 즐긴다. 라스칼의 집 옥상에서 새로운 로봇과 함께 걷고 있는 도그를 발견한 로봇. 그를 발견하자마자 뛰어 내려가 그의 어깨를 잡지만 그것은 로봇의 상상일 뿐이다. 로봇은 라스칼의 옥상에서 둘의 추억 그 자체인 september를 틀어놓고 그와 함께 추었던 춤을 홀로 춘다. 어디선가 들리는 september에 도그가 휙 돌아보지만 로봇은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숨는다.
도그는 도그의 새 로봇과 가던 길을 가고, 로봇은 라스칼과 바비큐를 즐긴다.
주로 영화를 혼자 보는데, 이 영화는 자식 뻘되는 어린 제자와 함께 봤다. 함께 보자고 제안했을 때, 이 아이가 덜 외로웠으면, 그래도 나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그 아이의 무료함을 달래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이 아이의 미래가 밝기를, 이 아이가 마음에 품고 있는 소망들이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아끼는 아이와 함께 봐서 그런가. 엔딩부터,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기까지 나는 그 아이 옆에서 울었다. 우는 날 보며 아이는 웃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우리가 함께 영화를 보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헤어지겠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날들도 끝날 때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이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면서 애틋함이 생겼다.
이 세상에 내 힘이 닿지 않는 수많은 것들 중에 '만남'이야말로 내 힘 저 너머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연은 소중한 운명이다. 만남이 곧 창조이며 역사이다.
그러나 어떤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 그 존재를 향한 나의 태도는 내가 결정한다. 생명이 없는 로봇이니까 함부로 대해도 된다. 나에게 찾아온 소중한 친구니까 잘해주자.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다. 함께 있을 때 소중히 여겼다면, 후회 없이 사랑했다면 이별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너와 나의 잘못 때문이 아니니까. 나는 지금 내 옆에 있는 또 다른 존재에게 상처 주고 너에게 달려가는 대신 이 마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지금 여기에 있기로 선택한다. 지금 나와 함께 있어 행복을 느끼는 이 옆에.
함께 있어 행복한 우리 모두에게 이별은 찾아온다.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다면 갑자기 찾아온 이별을 누굴 탓하지 않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 새롭게 찾아온 인연을 누구 대신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내 삶의 역사는 새로운 창조들로 이어진다.
이 영화를 평소처럼 혼자 봤다면 아마 이 정도의 감정적 동요는 없었을 것이다. 함께 이 영화를 본 시기, 우리의 마음 상태, 처한 상황, 서로를 향한 마음, 그리고 영화의 내용. 이 모든 것이 한순간 하나의 사건으로 응집되어 내 인생의 역사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 삶이 더 신비롭고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 하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나의 태도에 대해서 더 신중하고 사려 깊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영화를 본 아이는 결코 지금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너의 역사에서 내가 어떻게 그려지는지는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네가 소중히 여겨진다고 느끼길 바란다.
모든 만남의 끝엔 이별이 있다. 그리고 모든 이별 뒤에 또 다른 만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