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르슬라 Nov 22. 2021

백인의 것 (2009)

-무엇을 위한 사투인가

감독 : 클레어 드니

출연 : 이자벨 위페르, 크리스토퍼 램버트, 니콜라스 뒤보셸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97위에 랭크된 프랑스의 클레어 드니 감독의 영화이다. 포스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이자벨 위페르라는 세계적인 배우가 출연했으나, 나는 클레어 드니 감독의 영화로서는 처음 만나는 작품이다. 영화를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어느 나라인지, 어떤 시대인지,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 아무것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영화 초반에는 현재와 과거(그리 오래되지 않은)를 교차 편집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더 정신이 없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아티스트를 알게 됐다는 점,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영화를 구현해내는 감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수확이다. 보고 나서 이 영화에 대해 검색을 해보며 알게 된 사실인데, 클레어 드니 감독이 유년시절을 아프리카에서 보냈고, 그녀의 영화에서는 그런 유년에의 기억이 많이 드러나있다고 한다. 기억들이 나를 만들어가고, 그렇게 만들어진 내가 기억을 재료 삼아 또 다른 것을 만든다.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를 만들어 가고, 그것으로 내가 외부에 뭔가를 내놓으며 영향을 주는 순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프랑스 본토에 국적을 두고 있지만 어떤 아프리카 땅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농장 일을 하는 사람은 여자 마리아다. 이 가족의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시아버지(인 것 같은), 남편(혹은 전남편), 아들, 마리아 4명이 살고 있는데 나중에 흑인 남자아이를 전남편의 아이라며 데려오는데 관계도 사실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는 무기력 하지만 장성한 아들 마누엘이 이 가족의 모습을 어느 정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별 일만 없다면 농장은 굴러갈 것이고, 그런대로 그들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역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여기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진다. 마리아는 계속 이곳에서 자기의 것을 지키려고 하고 남편 안드레는 그녀를 설득할 수가 없어 괴롭다. 마리아가 자신의 삶의 터전을 무기력하게 내주지 않고 끝까지 싸워 지키려고 하는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농장을 지킨다는 것은 외부인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물리적으로 지키는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수확해서 팔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기에 혼자서 고군분투 하지만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가 없는 곳에서 그녀의 아들 마누엘은 자신의 땅을 침범해 들어온 반군 소년들에 의해 큰 수치를 당한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발가 벗겨진 채 농장 한복판에서 망연자실 서 있는 아들을 아빠 안드레가 발견해 데려오지만 마누엘은 그 사건 이후로 완전히 달라져 우스꽝스러운 테러리스트가 되어 버린다. 머리를 밀고, 총을 메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반군을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비축해둔 식량을 다 줘버린다. 마리아의 집에는 또 하나의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반군 지도자인 복서가 부상을 당한 채 숨어 들어와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그저 자신의 농장을 지키고 싶을 뿐 정부군이든, 반군이든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자신이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없다. 다쳐서 들어온 사람이니 잘 보살피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런 태도는 필히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리아가 어렵게 끌어 모은 농장 일꾼들은 더 이상 이곳에서 일할 수 없다며 자신의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한다. 그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데려다주는 일조차 이제는 불가능해진다. 중간에 차를 빼앗기고,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단골 약국에 가보니 약사들 모두 총에 맞아 숨진 상태다. 거리낌 없이 약국을 약탈한 아무것도 모르는 반군 소년들은 공짜니까 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어렵게 차를 얻어 타고, 내려 걷다가 시장의 도움으로 집에 되돌아오긴 하지만, 스스로 불을 지른 아들 마누엘은 새까만 주검이 되어 집 안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사람이 시아버지라고 오해한 마리아는 충동적으로 그를 죽여버린다. 


내전이란 상황은 마리아가 만든 것도 아니고, 그녀 역시 그 속에서 처절한 피해자로 서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녀와 그녀의 가정이 최종적으로 맞게 된 결말에 내전과, 마리아의 선택 중에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섣불리 어느 한쪽을 고르는 것이 어렵다. 비극의 원천은 내전에 있으나 마리아가 고집부리지 않았다면 가족의 생명만큼은 구해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 맞닥뜨려 도망가지 않고 싸우기로 결심했으나 그 끝이 너무나 비극이어서 "나도 싸울 줄 아는 사람이에요"라는 말이 무색해져 버린 것이다. 


영화는 되어가는 상황을 느리고 진득하게 보여주는 대신 이미지들을 이어 붙인 쪽에 가깝게 그것을 표현한다.  안에서 불이 나 연기가 펄펄 나는 상황에서도 총을 멘 군인들은 밖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서 있다. 돈이 없어서 약국도 가지 못했던 사람들이 약탈 후 좋아서 아무 약이나 입에 털어 넣는다. 자기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으려는 반군과, 뒤에서 교묘하게 가져가려는 정부군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그 속에서 자기의 것=백인의 것을 지키려는 한 여자는 지독하게 약하고 심지어 어리석어 보인다.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사투한 결과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 

완벽하게 불합리한 상황에서 때때로 도망치는 것은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내가 그것을 지킬 능력이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무모한 싸움보다 지혜롭고 따뜻하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