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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Dec 14. 2021

시리어스 맨 (2009)

- 나는 진지한데 세상은 가볍기만 하다.

감독 : 조엘 코엔, 에단 코엔

출연 : 마이클 스털버그, 리차드 카인드, 아론 울프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82위에 랭크된 코엔 형제의 영화 <시리어스 맨>을 보았다. 전에 개괄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코엔 형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에 한(?) 분이다. 자기 분야에서 최절정의 기량을 선보인다면 이런 게 아닌가 싶은 사람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일관되게 암울하지만 각각의 작품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너무나 다채로워서 진짜로 동경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분들이다. 이 리스트에서 가장 높은 순위에 랭크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10위>는 범죄 스릴러물, 11위의 <인사이드 르윈>은 가난한 뮤지션의 삶을 그려낸 드라마 장르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세상은 정말로 더럽게 암울해!'를 블랙 코미디로 풀어냈다. 

이 영화는 너무 편안한 상태로 보면 다 보고 나서 엥? 하게 되는 영화다. (내가 그랬음) 그래서 리뷰를 쓰기 위해서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보면서 "아,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구나, 이게 이런 뜻이구나." 하게 된 게 너무 많다는. 그래서 볼 때 집중을 뽝하고 봐야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다. 두 번 보고 나서야 단 하나의 씬도 의미 없는 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장면이 의미가 있다. 모든 장면이 하나의 작품으로 연결이 되고 호환이 된다. (진짜 대단, 대단..) 구조적으로 너무 촘촘하게 짜여 있다. 블랙 코미디라서 내용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이 사건에 들어가서 공감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봐야 이 사건이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보다 보면 영화가 얼마나 정밀하게 만들어졌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의 삶을 피곤하고 지루하다고 느꼈던 래리 고프닉(마이클 스털버그)의 인생에 어느 날부터 사건이 빵빵 터진다. 아내는 자기 친구와 바람이 나서 이혼을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래리더러 집을 나가라는 것이다. (심지어 래리는 아직까지 집 대출금을 갚고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이혼에 관심이 없고, 아들은 TV가 잘 안 나오니 그거나 해결해달라고 한다. 이웃은 아무렇지도 않게 래리네 집 마당을 침범하는데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고, 이 일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오직 래리만 인식할 뿐이다. 래리의 동생 아서는 평범하게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려가기에는 어딘가 부족해서 형한테 얹혀살고 있다. 가르치는 학생 하나가 낙제만은 면하게 해 달라며 돈봉투를 던지고 가는데 그의 아버지가 래리에게 찾아와 이것은 자기네 관습이기 때문에 이걸 문제 삼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하고 받고서 점수를 고쳐달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상할 정도로 불행한 일은 래리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아내 주디스의 내연남이자 래리의 친구 싸이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아들 대니는 친구에게서 마리화나를 사고서 값을 치르지 못해 쫓겨다니고 있다. 아서는 도박 혐의로 체포되는데, 말이 도박이지 카드놀이에 불과한 것도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견딜 수 없는 래리(독실한 유태인이다)는 랍비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고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그 답을 듣고 싶지만 단 한 사람도 그 답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래리의 이런 고통을 너무 가볍게만 여긴다. 

그러나 그런 래리의 삶 속에도 감사할만한 일들도 있다. 아들 대니가 성공적으로 성인식을 치르게 되고(경전 암송에 성공), 재직 중인 학교에서 종신 재직권을 얻게 될 것이라는 소식도 듣는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의 삶에는 토네이도 경보가 울리는 것이다. 

성인식을 마치고 압수당했던 라디오를 돌려받으며 친구에게 돈도 갚을 수 있게 된 대니, 그러나 아직 20달러를 친구에게 주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을 때 저기에서 검은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향해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목도한다. 영화 맨 첫 장면에 래리가 받았던 건강검진의 결과는 종신 재직권을 얻게 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돈이 궁해져 낙제점 F를 C-로 고쳐 쓰고 떨고 있는 그때에 듣게 된다. 확실하게 나쁜 소식은 아니어도 아마 그럴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 세계에 동의하는 편이다. 세상엔 희망이 없고, 악을 이기기엔 인간은 너무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영화 <시리어스 맨>에서 그리는 세상은 그보다 훨씬 내 숨통을 죈다고 느껴졌다. 블랙코미디라 과장되게 그려져서 그런 것도 있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인간 자체보다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필두로 내세웠기 때문에 내가 그 세상에 속해있다는 체감은 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평범하고 진지하게 살고자 한 남자가 겪는 일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인간관계가 너무 엉망이어서 이 영화에서 그리는 세상에는 온전히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코엔 형제가 말하고 싶은 얘기는 궁극적으로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주인공 래리가 믿는 신, 그 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래리가 아무리 랍비(신의 대리자)를 찾아가도 그들은 그의 삶의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도 않는다. 삶의 불행에 대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면 견디련만 그것 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하루하루 살며 견뎌가려는 그들을 덮치는 것은 토네이도와, 토네이도 같은 불행이다. 래리가 지금까지 믿어 온 선한 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영화의 오프닝으로 (정확한 시대는 모르겠으나, 옛날) 추운 겨울 오두막집 문을 두드리며 찾아온 랍비를 그 집 아내가 악령이라며 내어 쫓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 여자가 그 랍비를 악령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미 3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같이 있는 남편은 모른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면서 


믿었던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네 안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사랑할 사람을 원하겠지

사랑할 사람이 필요하겠지


이런 노래의 가사로 래리가 사는 세상을 오픈한다.



전 진지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거든요.

올바로 살려고 했고

공동체 일원이 되고자 했고

.

.

제발 도와주세요.


이런 외침에도 랍비 마르샥은 그를 만나주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는 처음부터 못을 박는 것이다.

네가 필요한 건 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야. 사람이라고.



영화는 피곤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래리의 일상이 아닌, 그 일상 다음에 폭풍 같은 사건들이 일어난 2-3주를 담아낸다. (후에 그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래리는 울먹이며 잘 모르겠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너의 고통을 네가 믿는 신은 해결해주지 않으며 네 삶은 계속 불행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정말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래리에게 일어난 일들은 신이 잘못한 것인가, 사람이 잘못한 것인가? 그에게 상처를 준 직접적인 존재는 사람이다. 신이 나타나서 불행을 떨어트리고 간 것이 아니란 말이다. 신이 부재하다면 사람은 신의 손아귀 안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래리를 고통 속에 몰아넣은 존재도 온전한 사람일 뿐이다. 

신은 존재하지만 선한 신이 아니라면,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더 나아가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는 신이라면, 그래서 신이 아닌 사람에게만 의지한다면.

토네이도를 막을 수 있을까? 내 인생에 어떤 불행도 일어나지 않을까? 바람난 아내 루디스도 한 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지 않은가. 그럼 계속 새로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가?


자연재해 같은 큰 불행은 인간의 손을 벗어난 것이지만 '인간의 악'으로 야기된 불행을 모두 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야비한 일이다. 살아보니 그렇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얻고 또 상처도 받는다. 위로만 받을 수도 없고 상처만 입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생 또한 그렇다. 세상은 험하고 악해도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 또 우리는 노력한 대로 대가를 얻기도 하고, 필요한 것을 얻으며 사람들과 어울려서 하하호호 웃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그 속에도 갈등과 반목이 있다. 그것이 사람이고 세상이다. 

이 영화 <시리어스 맨>이 그리는 세계관에 갇히면 결국 "그래서 어쩌자고, 다 죽자고?"가 될 수밖에 없다. 불행한 중에 감사할 것들을 기억하고, 삶이란 고통과 기쁨이 공존(비록 어느 한쪽으로 부등호가 열릴지라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어떤 존재(신)를 원망하지 않더라도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신은 인간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지만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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