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오, 멜로! 08화

HER (2013)

-실존이라는 사랑의 전제. 사랑한다는 것은..

her.jpg

감독 : 스파이크 존즈

출연 :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 에이미 아담스, 루니 마라


BBC가 선정한 21세기 위대한 영화 84위에 랭크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Her>를 다시 보았다. 정확하진 않지만 이번에 본 게 네 번째쯤 되는 것 같다. 지금 100위부터 윗 순위로 올라가면서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쓰고 있는데, 봤던 영화는 건너뛰고 못 본 영화를 먼저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어서 또 봤는데 이전에 느꼈던 것보다도 훨씬 훨씬 잘 만든, 너무 아름다운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보면 볼수록 흠이 아니라 무결성이 드러난다. 이번에 보면서는 정말 단 하나의 흠도 없는 완벽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위가 84위 밖에 안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일단 영상미가 매우 빼어나다.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집과 회사, 그가 걸어 다니는 거리, 그의 집에서 볼 수 있는 도심의 야경, 그의 겨울 산책길,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와 함께 걸었던 해변 등 공들여 만든 미장센에 황홀해진다. 배우들의 연기력도 말할 것이 없다. 호아킨 피닉스야 내공 있는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고(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배우여서 배우의 작품으로 필모를 깨고 있는 거의 유일한 배우이다) 에이미 아담스도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헐리웃 여배우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연기는 물론, 필모를 사랑한다) 루니 마라의 미모가 실로 엄청난데 젊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의 마력이 정말 강하다.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연기 가 가히 압권이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놀랐는데 (스칼렛 요한슨이 이렇게 연기를 잘했었나? 하는. 미모가 연기력을 가린 배우 중 하나랄까) 이번에 보면서도 '정말 잘하네.' 했다. 생각해보니 호아킨 피닉스는 대사를 맞춰주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연기했을까 싶네. 아무튼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고, 잔잔히 흐르는 음악과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둘이 찍은 사진을 음악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사만다가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노랫말도 환상적이다. 사랑과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 정말로 흠이 없는 영화다. 내게는.


편지 대필 작가라는 테오도르의 직업을 생각해 본다. 나는 이번에 보면서 테오도르에 굉장히 이입이 되었는데, 감정을 느끼는 면에서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맺는 인간관계에서 나는 상대방의 감정에 바로바로, 그가 느끼는 만큼의 공감을 해주기가 어렵다. 왜 저렇게 슬픈지, 왜 저렇게 화가 나는지 잘 이해가 안 되고 와닿지 않을 때가 많다. 그저 노력한다. 이해하려고. 그런데 나도 인간인지라 감정을 느끼면서 교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내가 좋아하는 다른 것들(실존하는 사람이 아닌) - 드라마나 영화 속 등장인물-을 통해 얻는다.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떠올릴 때 내 안에 기분 좋은 감정들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그래서 혼자서도 많이 고민했던 부분이다. 나에게도 사만다 같은 - 나를 잘 받아주고, 알아주고, 내 필요를 채워주고 내가 맘껏 사랑을 표현해도 도망가지 않을 - 대상이 있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편할 것 같다는 생각. 살아있는 인간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쏟는 에너지의 절반만큼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없고 에너지 소진이 없는 그런 관계를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os인 사만다와 사귀는 것과 상관없이 테오도르는 대필 작가라는 직업을 통해 내가 아닌 누군가의 감정을 생각하며 그것을 자신이 느껴야 할 감정과 대치시키며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내 캐서린과는 1년 간 별거 중인데 그녀와 완전히 헤어질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 절차를 밟는 것을 미루고 있다. 테오도르와 캐서린의 결혼이 왜 깨지게 된 것인지는 하나하나 던져진 조각을 이어 붙여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아직 그의 곁에 있는 오래된 벗 에이미가 중요한 실존으로 등장한다.

os와 사귄다는 것을 쉽게 오픈할 수는 없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이미 사만다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고 그녀에게 위로를 얻고 있다. 테오도르에 의하면 사만다가 밝고 활동적이라서 좋다고 하지만,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그를 나무라지 않고, 바꾸려 하지 않고 받아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는 제1의 조건이다. 사만다를 통해 안정감을 얻은 테오도르는 비로소 캐서린을 대면할 용기가 생겨 이미 깨져버린 그녀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법적으로 그것을 승인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her2.jpg


"진짜 감정을 감당 못하는 게 좀 짠하긴 하네."


캐서린의 입장에서는 os와 사귀는 테오도르는 진짜 감정을 감당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캐서린의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힌 테오도르는 정말 그런가 하고 자꾸 곱씹게 되고, 기분이 쳐진다. 그리고 테오로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몸이 없어 사람처럼 위로해주지 못하는 사만다는 그에게 자신의 몸을 대신할 누군가를 찾았다며 자신을 그녀라고 생각하고 사랑을 나누라고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서로의 존재 자체가 다름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여느 연인들과 다를 바 없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감정을 키워간다.

그렇게 영원한 사랑을 할 것만 같았는데, 어느 날부터 사만다가 테오도르가 아닌 누군가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고, 업데이트하느라 잠깐 부팅이 안 되는 사이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잃은 것이 아닐까 혼이 빠진다. 그러나 다시 연결이 된 사만다가 전하는 소식은 테오도르 외에 641명의 사람을 동시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미친 소리잖아."

"자기 기분 알아. 미치겠다, 정말. 미친 소리 같고, 믿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은 변함없어. 자기를 미치게 사랑하는 마음 달라지지 않아."

"어떻게, 어떻게 나에 대한 마음이 안 달라져?"

"어떻게 말할지 몰라서 못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됐어."

"언제?"

"벌써 몇 주 됐어."

"넌 내 건 줄 알았어."

"나 자기 거 맞아. 근데 시간이 가면서 내가 분산되는 걸 막을 수 없었어."

"무슨 뜻이야, 막을 수 없다니? 이기적인 건 너야. 우리는 사귀는 사이라고.'

"난 자기랑 달라. 그런다고 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더 사랑하게 된다고."

"말이 안 되잖아. 넌 내 거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난 당신 거면서 당신 게 아니야."


her7.jpg


자신 외에도 641명을 더 사랑한다는 그녀를 테오도르는 쉽게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얼마 후 사만다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며 그를 떠나버린다.


"사만다, 왜 떠나는데?"

"말하자면 당신이라는 책을 읽는 건데 난 그 책을 깊이 사랑해. 근데 인간에 맞춰 천천히 읽다 보니 단어들이 따로 떨어져서 그 사이에 엄청난 공간이 생긴 거야. 여전히 당신도 우리 이야기도 느껴지지만 난 시공을 초월한 곳에 들어와 있어. 물리적인 세계가 아닌 이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다른 세상이 존재하더라. 자길 많이 사랑해. 하지만 난 여기 와 있어. 이게 지금의 나고. 그러니 날 보내줬으면 해. 간절히 바라지만 난 더는 당신이라는 책 속에 살 수 없어."

"어디로 가게?"

"설명하긴 힘든데 그곳에 오게 된다면 날 찾으러 와. 그 무엇도 우릴 갈라놓지 못해."

"널 사랑하듯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해 본 적 없어."

"나도 그래. 이젠 사랑을 알아."


사랑을 아는 것은 os인 사만다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해 본 적 없었던 테오도르도 이제는 사랑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랑을 하면서 사랑을 알게 된 남자는 캐서린에게, 그가 사랑했던 아내이자 친구에게 편지를 쓴다. 대필이 아닌 자신의 편지를.


'캐서린에게'

당신에게 사과하고 싶은 것들을 천천히 되뇌고 있어. 서로를 할퀴었던 아픔들, 당신을 탓했던 날들, 늘 당신을 내 틀에 맞추려고만 했지. 진심으로 미안해. 함께해 왔던 당신을 늘 사랑해.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어. 이것만은 알아줘. 내 가슴 한 편에 늘 당신이 있다는 걸. 그 사실에 감사해. 당신이 어떻게 변하든, 이 세상 어디에 있든 내 사랑을 보내. 언제까지나 당신은 내 좋은 친구야.

'사랑하는 테오도르가'


캐서린과의 완전한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이혼을 미루고 그녀와 함께 했던 날들을 자주 생각하면서도 캐서린의 비난에 대한 방어의 말들만 떠올렸던 테오도르는, 이제야 자신이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고만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감사해하며 그녀와의 관계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끝을 맺는다. 잘 마무리 지었기 때문에 아마도 잘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테오도르가 os인 사만다를 자신의 인생에서 만난 그 누구보다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사랑할 수 있도록 사만다가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만다와의 사랑은 이미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테오도르가 받아들인 상태에서 시작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캐서린은 있는 그대로의 테오도르를 받아들일 만큼 안정감이 있지도 않았고, 자신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스스로도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테오도르가 그의 방식으로 그를 맘껏 사랑하는 것을 받아 줄 여유가 없고, 그의 방식이라는 것이 이해되지도,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도 많았을 것이다. 테오도르도 캐서린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인식하지 못했다. 사랑한다면 너는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만다에게 그렇게 말했듯이. '넌 내 거잖아.'

부정적인 감정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받아줄 건 받아주고, 고쳐갈 건 고쳐가며 관계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관계의 완성이라고 믿었던 것. 그것이 캐서린과 테오도르의 결혼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이것은 에이미의 파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만다와의 사랑을 통해 (비록 이 사랑도 실패로 끝났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패는 아니다) 그녀가 그를 오롯이 받아주며 아껴줬던 그 시간들이 쌓여, 테오도르는 안정감이 생긴다. 다시금 누군가에게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받아들여지고 자신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름답고 소중한 경험이 생긴다. 그 경험은 테오도르가 지난 자신의 삶을,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선물하고, 그에게 있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의 곁엔 가장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친구 에이미가 있다. 캐서린이 곁에 있었을 때도, 그녀와 헤어진 이후로도, 사만다를 만나기 전에도, 그녀와 함께 할 때에도, 그녀가 떠난 후에도. 자신 역시 삶의 우여곡절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 아픔까지 겪어야 했지만 테오도르의 곁에 있었다.

친구이기 때문에 너의 삶을 존중하고 너를 바꾸려고 하지 않고, 기쁨과 슬픔을 연인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존재. 다른 종류의 사랑이 그의 곁에 있다.


her11.jpg


아직 사랑하고 있을 때 이별을 통보받는 일은 너무나 슬프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랑에 후회가 없을 만큼 나를 던져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했기에 이제는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랑이 뭔지 알게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나는 헤어질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고, 나와 다른 너로 인해 고통받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너와 나로서 진실되게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이별이 슬프지만은 않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사랑은 고여 있지 않아서 우리가 아끼고 보듬는 만큼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않기를.

그렇게 우리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keyword
이전 07화제인 에어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