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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사이드 스토리 (2021)

- 새로운 삶을 위해 정말 필요한 건, 사랑이 아니라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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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 안셀 엘고트, 레이첼 지글러, 아리아나 데보스, 데이비드 알바즈, 마이크 파이스트


소문이 나쁘지 않았고, 유명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리메이크작이라 궁금하기도 했고,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도 믿을만해서 기대를 갖고 보았다. 영화의 중반까지는 너무 재밌어서 막 박수까지 쳤다는. (극장 안에 나 포함 둘 뿐이어서 내 집인양 편하게 보았는데, 보면서 와, 이렇게 공들여서 잘 만든 영화를 고작 두 명이 보다니.. 하면서 막 안타까워하기까지 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 따위-라고 생각하는 1인이지만 두 주인공의 나이가 워낙 어려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보면서 '낭만적일 수도 있겠다'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종반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흔들렸던 신념이 제 자리로 돌아가다 못해 콘크리트 다지듯 다져졌다는 후문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엣> 스토리를 시대만 바꿔서 (신분도 바꿨구나)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 왜 더 때려주고 싶지? ㅋㅋ 어휴어휴~ 정신 차려 이것들아! 이 말이 절로 나오는 주인공들이다. 심지어 감정 말살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이퀼리브리엄>의 세계의 탄생이 이해가 될 정도.


뮤지컬 영화이고, 음악도 워낙 유명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들 다 너무 황홀해서 진짜 박수를 몇 번을 쳤다. 특히 아니타(아리아나 데보스) 춤 너무 잘 추더라. 그리고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자기 생각 분명하고, 남한테 휘둘리지 않는 캐릭터라 그나마 봐줄만했다는.


물론 영화(뮤지컬)의 배경을 생각하면 '사랑'하는 청춘들의 연애스토리로만 볼 수 없는 지점들도 있다.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그 불빛을 받지 못하는 그늘진 슬럼가 어퍼 웨스트사이드. 앵글로 색슨도 아닌, 폴란드계와 푸에르토리코에서 이민 온 젊은이들이 모여 만든 갱단 간의 갈등, 자유와 꿈의 상징인 미국이지만 기회란 것이 소외된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그 시대의 현실. 새 삶을 살고 싶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새로운 삶인지 가르쳐 주는 이도 없고, 엇나갈 때 잡아줄 어른도 없는 희망이 없는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의 역량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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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워서 이기고 싶은 이들과,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각자의 삶을 살고 싶은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한 가족으로 형제 같은 친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행은 필연적이다. 토니는 폴란드계 제트파의 일원으로 유일하게 감옥까지 갔다 온 장본인이다.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때리면서 그가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모습을 보며 느낀 공포, 그로 인한 감옥에서의 생활. 그런 경험들로 인해 토니는 출소 후 이제 예전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러나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 리프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이민자들에게 계속 시비를 걸면서 자신의 권역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싸워야만 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푸에르토리코를 떠나 꿈의 땅, 미국으로 건너오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겠지 믿었던 베르나르도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가난과 차별이라는 본질적 차이는 떠나온 고국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미국에서의 삶에 회의를 품고 있다. 그리고 복서이기도 한 베르나르도가 리프가 거는 시비를 마다할 이유도 없다.

베르나르도의 오랜 연인 아니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에서는 땀 흘린 만큼 가질 수 있다고 믿기에 고국으로 돌아가자는 베르나르도의 말을 듣지 않고, 그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호라는 명목 아래 자신의 삶을 대신 결정해주려는 오빠 베르나르도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리아도 이곳 미국에서의 새 삶에 대한 희망이 있다. 그리고 토니와 마리아는 서로 한눈에 반해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청춘은 하루아침에 영원을 약속한다. 이제 서로는 연인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로서 살아가기로 다짐한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애절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싸움을 막아야 한다고 토니에게 호소한다. 샤크파(푸에르토리토계)와의 일전을 앞두고 약속한 것과 달리 총이며 칼을 준비하는 리프. 싸움을 말리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간 토니는 마리아를 절대 줄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면서 주먹을 휘두르는 베르나르도를 참아주다가 인내심이 바닥이 나 그를 때려눕히고, 급기야 칼을 꺼내 든 양 쪽 진영에서 대장인 리프가 먼저 베르나르도의 손에 의해 칼에 찔려 죽자 분노한 토니가 베르나르도의 가슴에 칼을 내리꽂아 죽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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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하기 전 마리아를 찾은 토니, 마리아는 그가 오빠를 죽였다는 사실에 괴롭지만, 그를 다시 감옥에 보내고 혼자 지낼 날들이 더 두려워, 그를 붙잡는다. (오빠를 죽이고 온 자신의 애인과 첫날밤을 치르는 마리아.....) 그리고 그를 숨겨뒀다가 둘이 도망칠 계획을 세우는데, 방금 베르나르도의 시신을 확인하고 온 아니타는 오빠를 죽인 남자를 사랑한다며 (만난 지 1일임) 그 없이는 못 산다며 그와 도망쳐 살겠다는 마리아를 이해할 수 없고.. (당연한 거 아니냐) 앞으로의 계획을 토니에게 전해 달라는 마리아.. 그가 있는 곳에 도착했지만 아니타가 전한 얘기는 마리아가 말한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베르나르도의 죽음에 분노한 치노가 마리아를 죽여버렸다고 거짓말한 것. (그 사이에 정신 나간 제트파 놈들은 베르나르도를 잃은 아니타를 집단 강간하려고 한다) 세상 모든 것을 잃은 것만 같은 토니는 잡혀가거나 말거나 이제 중요하지가 않고 거리에 뛰쳐나와 하염없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토니를 죽이려고 숨어 있던 치노와 맞은편에서 토니를 만나기 위해 걸어오는 마리아 사이에서 토니는 치노가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영화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그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라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새로운 삶이다. (내가 가난에서 벗어나서 크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꿈이므로) 그것 자체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전과 다르게 살기 위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일지는 생각해 보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 다른 삶을 위한 제 일의 선행조건은 이전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달라져야 하고,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하며, 그래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삶을 꿈꾼다면서 예전과 변함없이 생각하고 있다면 단언컨대 꿈꾸는 새 삶은 오지 않을 것이다. 토니는 분명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아를 만나고 나서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 굳건해졌다. 그러나 익숙함이란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충동적으로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마리아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본 것이 처음이다. 세상살이를 분별하기엔 너무 어리다. 사랑만이 인생의 전부이기에 오빠의 죽음이 너무 가볍고 오빠의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아니타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한다. 푸에르토리코인을 경멸하고, 싸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리트와 그를 따르는 제트파, 여기 미국도 별반 다를 것 없으니 아무 대책도 없이 돌아가자고 하는 베르나르도와 그를 따르는 샤크파도 너무 비이성적이다. 패싸움을 하고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하고, '이기면 다 내꺼' 이런 식의 유치하고 얄팍한 판단으로 모든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나는 개인이 중요하고, 사회란 사실상 개인의 모임 그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개인의 변화가 없이는 사회의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내 생각이 달라지지 않으니, 내 삶도 당연히 달라지지 않고, 내 삶이 달라지지 않는데, 그들이 모여 이룬 사회가,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고 새로워질 수 있겠는가?

새로운 삶을 향한 열망, 즉 감정 혹은 사랑이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움이 결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원동력만으로는 안된다. 어떻게 구현해갈 것인가에 대한 실천 가능한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고, 차근히 이루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야 하며, 그걸 해낼만한 의지와 능력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이성이라는 영역에 속해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행복'이란 말의 실체가 감정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에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도 그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 어떻게 해야 이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새로운 삶을 향한 열망을 품은 이유도 결국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행복은 사실, 감정보다 이성에 더 많이 기대어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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