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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Mar 02. 2022

피쉬 탱크 (2009)

- 밖으로 나가려면 피쉬 탱크 안에서 자라날 시간이 필요하다

감독 : 안드리아 아놀드

출연 : 케이티 자비스, 마이클 패스벤더, 키어스턴 워레잉, 해리 트레더웨이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65위에 랭크된 안드리아 아놀드 감독의 <피쉬 탱크>를 보았다. 이 영화로 안드리아 아놀드 감독이란 이름도 처음 접했고, 당연히 감독의 영화로는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이 영화로 2009년 칸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함께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칸은 황금종려상보다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이 찐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보면 마음이 너무 괴롭지만, 참 잘 만든 영화인 것은 확실하다. 이 영화에 대한 정보가 웹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럼에도 어떤 블로그에서 안드리아 아놀드 감독은 여자 켄 로치로 불린다고 하는 글을 봤다. 내가 이 감독님 다른 영화를 보지 않아서 단언하며 말할 수는 없지만 켄 로치가 시스템을 비판하는 영화(내 알기론 우파정권일 때만)를 만드는 것과 비교해 보면 안드리아 아놀드 감독이 여자 켄 로치로 불리는 것은 맞지 않단 생각이 든다. 이 영화 <피쉬 탱크>는 시스템이 아닌 개인에게 포커스를 맞춰서 찍었기 때문이다. 


검색해 보니 화면 비율이 1.33 : 1의 풀 스크린이라고 하는데 노트북 화면 상에서는 풀이 아니다. 양 옆이 짧다. 그리고 시종일관 핸드헬드 기법으로 주인공 미아(케이티 자비스)를 담는데, 이 영화에서 미아가 등장하지 않는 씬은 단 하나도 없다.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미아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주인공 없는 씬이 하나도 없는 영화는 처음 본 것 같다) 이 영화는 오직 미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주인공 미아는 15살이고, 엄마와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산다. 그리고 엄마의 남자 친구가 자주 집에 들러 자고 간다. 물론 코너 아저씨(마이클 패스벤더- 엄마 남친)는 현재의 엄마의 남친일 뿐이다. 

영화는 미아가 친구 케이티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미 미아는 케이티를 화나게 만들었고, 케이티는 미아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으며 케이티를 찾아간 미아에게 케이티는 더 이상 우리는 친구가 아니라는 태도를 분명히 한다. 그렇게 하나뿐인 친구마저도 잃고 미아는 온전히 외톨이가 된다. 엄마가 미아에게 내뱉는 말은 '내뱉는'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말들이다. 아이에게 관심이 없고, 어쩌면 아이가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말만 그렇게 골라서 할 수 있는지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늘 술에 취해 있으면서 오늘 밤에도 파티를 할 거라며 두 딸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엄마가 지금 만나는 이 아저씨는 여느 아저씨들과 좀 다르다. TV에서 나오는 Ja rule(영화 보다가 말고 Ja rule인가 하고 유튜브를 뒤졌다는, 맞춰서 기분 좋아지고..)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미아를 보고 이 아저씨가 말한다. 


"흑인처럼 추더라. 칭찬이야."


무슨 상관이냐며 화를 버럭 내고 못된 망아지처럼 못된 말만 하는 미아지만,  차를 마시려고 했다는 미아의 말을 듣고 아저씨는 세 잔을 만들어서 한 잔을 두고 간다. 그때부터 미아는 이 아저씨에게 관심이 생긴다. 아저씨의 지갑을 뒤져보고 그의 직장과 사는 곳을 알아내고 돈도 얼마 가져간다. 미아의 동생 타일러에게 다정하게 장난치는 모습도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는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미아의 마음에 들어온다. 

아저씨는 세 모녀를 데리고 드라이브도 가고, 함께 물고기도 잡는다. 춤을 좋아하고, 잘 추는 미아는 댄서 모집 공고를 보고 아저씨(코너)를 찾아가 공고 전단지를 보여준다. 코너는 너는 분명히 될 거라면서 캠코더까지 빌려주겠다고 한다. 미아가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관심도 없고, 늘 무시만 하는 엄마와는 너무나 다르다. 

한편 미아는 케이티와 완전히 틀어지고 나서, 캠핑카에 사는 세 형제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이유는 캠핑카 앞에 하얀 말 한 마리가 묶여 있기 때문이다. 앞뒤 재지 않고 미아는 그 말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말의 주인인 형제들과 만나게 되고 싸우고 험한 일을 당할 뻔하는데 막내 빌리(해리 트레더웨이)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미아는 그(빌리)도 마음에 담는다. 

그럼에도 현재 미아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사람은 코너 아저씨이다. 그의 목소리 하나에도 반응하고 지금 그가 뭘 하고 있는지 항상 궁금하다. 특히 엄마와 둘이 있을 때 아저씨는 뭘 할지. 그녀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또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엄마와의 섹스 장면을 본 후에는 그를 예전처럼 대할 수가 없다. 미아는 우연히 만난 빌리를 데리고 도발하듯 코너의 직장을 찾는다. 그 둘을 바라보는 코너의 눈빛에도 일종의 살기가 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코너는 술에 취했고, 미아는 혼자서 TV를 보는 그의 곁으로 가고, 코너는 오디션에서 보여줄 춤을 춰보라고 하고, 쑥스러워하면서도 미아는 그 앞에서 춤을 춘다. 코너는 미아를 자기 옆에 앉히고,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입을 맞춘다. 그리고 사랑을 나눈다. 


충동적으로 미아와 섹스를 해버리고 이건 아니다 싶은 코너는 다음날 아침 짐을 싸서 그 집을 나간다. 코너가 떠나자 엄마는 울고, 둘만의 비밀이 생긴 미아는 이대로 그를 보낼 수 없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뒤쫓아가지만 그는 차를 몰고 급히 사라진다. 전화기는 꺼져있고, 직장에 전화를 걸어보지만 휴가를 냈다는 소식만 듣는다. 그가 어디 사는지 알고 있는 미아는 급기야 그의 집까지 찾아가 벨을 누른다. 기함한 코너는 미아를 데리고 기차역에 데려다주면서 '잘못 건드렸구나' 싶어서 '나도 네가 좋아'라는 말로 달래지만, 미아는 집에 돌아가는 대신 다시 그의 집으로 와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안에는 인기척이 없고, 담을 넘어 창문을 통해 그의 집 안에 들어가는 미아. 그녀에게 빌려줬던 캠코더를 발견하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 어린 여자아이가 노는 모습이 담겨 있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즉 캠코더를 들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코너인 것을 알게 되고, 너무 놀라 충격을 받은 미아는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방 안에다가..

사람이 돌아오는 소리에 얼른 도망 나왔지만 성큼 돌아서 지지가 않는다. 코너의 집 근처에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몰래 지켜보다가 어린 딸의 이름이 키이라인 것을 알아내고 부모가 보지 않는 사이 아이를 꾀어 집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데려간다. (와.. 진짜 이때부터 미치겠다는 소리만 계속하면서 봤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를 다시 집에 데려다주고, 다음 날 오디션을 보러 가지만 이곳은 자기가 생각했던 곳이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빌리에게 들르는데, 말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열여섯 살이 된 말은 병이 들었고, 그래서 안락사시켰다는 빌리의 말에 미아는 울음을 터뜨린다. 



말의 죽음이 슬펐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그 남자가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고(그는 애초에 거짓말쟁이였던 것이다) 댄서로서의 꿈을 이룰까 싶어 찾은 오디션장에서는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를 채워주기 위한 선정적인 춤을 추라는 요구를 받는다. 늘 굶주려 보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말의 죽음은 마치 미아 자신의 죽음처럼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살아있지만 산 것 같지 않은 나.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나는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빌리는 미아에게 '떠나자'라고 한다. 

'떠나!'가 아니라 '떠나자.' '나와 함께 가자'


그 누구도 자신과 함께 뭘 하려고 하지 않았다. 네가 필요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미아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처음 들은 그 말에 미아는 움직이게 된다. 그와 함께 이곳을 떠나기로 한다. 



세 모녀의 작별 인사는 '함께 춤을 추는 것'이다. 

'집을 떠나겠다'는 말과, '가라'는 말만 오갈 뿐. 이 '떠남'과 '이별'에 대한 마음은 말로 전하지 않는다. 미아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엄마는 춤을 춘다. 미아도 엄마와 마주 보며 춤을 춘다. 동생 타일러도 떠나는 언니를 붙잡고 함께 춤을 춘다. 

춤을 좋아하고, 춤을 잘 추는 미아, 춤추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미아는 이별의 기로에서 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춤을 추는 것이다. 


제목이 <피쉬 탱크>여서 나는 영화에서 상징적으로 수조나 어항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코너가 데려간 호숫가에서 함께 물고기를 잡을 때만 해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잡은 물고기는 미아가 키우는 개의 밥이 된다. 어항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제목이 피쉬 탱크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아이에게는 보호받을 수 있는 피쉬 탱크가 필요한 것이라고.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다가 제목 '피쉬 탱크'가 의미하는 바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변할 수 없는 미아의 갇혀 있는 삶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생각한다. 아이는 물고기가 아니라서 보호받을 울타리가 필요하다. 물고기가 아니라서 태어나서부터 바다를 제 집마냥 헤엄치며 다닐 수 없다. 아이가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기 위해서는 피쉬 탱크와 같은 안전한 울타리에서 먹고 자고 자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의 처음부터 그랬다. 미아는 자신을 좋아하는, 아니 자기에게 조금의 관심만 보여줘도 그 사람이 각인된다. 그 사람에게 집착한다. 친구 케이티에게 그랬고, 코너에게 그랬다. 누군가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하며 날 지탱해주길 간절히 원했다. 그들을 울타리 삼아 자신의 꿈을 펼쳐가고 싶었다. 피를 나눈 가족이 전혀 울타리가 되어주지 않으니 눈길 한 번에, 따뜻한 말 한마디에, 작은 도움 한 번에 혹하고 자신의 마음을 줘버린다. 그러나 사랑받지 못한 미아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감정이 상하면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가 자기감정이 풀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내가 좋아하면 상대방도 나처럼 좋아할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그게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면 분노한다. 허락 없이 찾아가고, 소리를 지른다. 상대방이 난처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케이티나 코너도 사실 울타리가 되어 주기에는 너무 연약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제멋대로 구는 미아의 울타리가 되어줄 리 없다. 


빌리가 과연 미아의 피쉬 탱크가 되어줄 수 있을까? 집을 떠나 웨일스로 가면 댄서라는 미아의 꿈을 이룰 기회가 생길까?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처음으로 미아에게 '함께 가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생겼고, 미아의 가족은 '함께 춤을 추며' 이별했다. 감독은 그래도 우리가 이 아이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보자고 작은 틈새로 속삭이며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피쉬 탱크가 필요한 '때'가 있다. 사람은 물고기와 달라서 그 안에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면서 따뜻하게 안아주면 쑥쑥 자라서 저절로 '피쉬 탱크'를 떠난다. 더 이상 그 안에서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우리도 누군가의 '피쉬 탱크'가 되어주자. 그때까지는.


*난 이 영화가 '켄 로치' 보다는 나딘 라바키의 '가버나움'에 더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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