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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Mar 04. 2022

그레이트 뷰티 (2013)

-삶이라는 그레이트 뷰티

감독 : 파올로 소렌티노

출연 : 토니 세르빌로, 사브리나 페릴리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64위에 랭크된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그레이트 뷰티>를 보았다. 이 영화는 2015년 EBS에서 세계의 명화에서 방영해줄 때 보고 그 당시에도 굉장히 인상 깊어서 정성 들여 쓴 리뷰가 있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봐야 할 것 같아 보았고, 곁가지를 쳐내고 리뷰도 다시 쓰려고 한다. (처음 봤을 때와 보이는 바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 영화를 본 이후로 소렌티노 감독의 <유스>, <그때 그들> 모두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았고, 얼마 전 넷플릭스에 올라온 <신의 손>도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유스>를 가장 좋아한다. (이번에 보니 엔딩을 <유스>와 같은 방식으로 찍었더라)

사실, 소렌티노 감독의 작품들이 갖는 내러티브는 아주 단순한 편이다. 하나의 심플하고 보편적인 주제를 다룬다. 다만 다양한 이미지를 배치해서 (특히 영화 초반) 작품의 전체적인 틀을 잡기 때문에 이미지들이 뜻하는 바가 뭘까에 집착하다 보면 큰 흐름을 놓치게 되고 그래서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갖고 있는 하나의 문제가 끝에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보면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토니 세르빌로는 이 영화와, <그때 그들>, <신의 손>에 모두 출연했는데 상류층의 삶을 즐기나 중요한 알맹이는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노년의 작가 역할을 참 잘 연기했다. 


젭 감바르델라(토니 세르빌로)는 창문을 열면 콜로세움이 보이는 고급 주택에 살면서 이탈리아의 각 분야의 상류층들과 좋은 인맥을 쌓아가며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영화 속 파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연령층과 외양이 어찌나 다양한지 도대체 이 파티는 무슨 파티인가, 누가 주최했는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파티는 젭의 생일 파티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젭은 젊어서(20대) 소설 한 편을 썼는데, 그것이 빅히트를 치면서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지금까지 군림해왔다. 그러나 그 이후 60이 훌쩍 넘은 나이가 되도록 다시 소설을 쓰지 않는다. 대신 예술계 인사를 인터뷰해 기고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고 있다.  콜로세움이 보이는 널찍한 그의 집 발코니에 젭의 오랜 친구들이 종종 모여 수다를 떤다. 잡지사 편집장, 작가, 장난감 회사 사장, 부유한 귀족 미망인, 시인, 희곡작가 등 모두 유명 인사들이다. 물질적인 여유를 누리며 명망 있는 삶을 사는 그들에게도 고충은 있게 마련이다.

젭은 자신이 남다른 감수성을 가졌고, 그래서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노라고 고백한다. 오랫동안 로마에서 살았지만 그는 날마다 멋지게 차려입고 로마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걷는다. 걸으면서 보고, 본 것을 생각하고 느낀다. 결혼도 하지 않고, 진지한 연애를 하지도 않고, 소설가임에도 소설을 쓰지 않는 삶, 그래서 남들 눈에는 가볍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젭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 다만 아는 척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누군가가 찾아와 엘리자의 죽음을 알려준다. '엘리자'는 젭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죽음을 전하며 아내가 평생 사랑한 사람은 당신 '젭'이었다, 그러니 장례식에 참여해달라고 말한다. 그녀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그녀의 남편을 그녀가 살던 집에 바래다주며 나눈 몇 마디 대화가 젭을 지금까지는 잊고 있었던 어떤 감정, 회한에 젖게 한다. 그리고 젭은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게 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스트리퍼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친구의 딸 라모나(사브리나 페릴리)를 알게 된다. 젭의 친구는 딸이 돈을 버는 대로 다 써버리는데 도대체 어디에 쓰는지 알 수가 없고, 알려주지도 않는다며 딸과 대화 좀 해달라고 하고, 젭은 그런 라모나에게 관심이 생긴다. 한편 젭의 친구 비올라의 아들 안드레아는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가 자살 기도를 할까 봐 늘 노심초사하는 비올라. 젭이 라모나와 함께 식사하는 레스토랑에 안드레아가 나타나 젭에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말을 한다. 작가 '프루스트'와 '투르게네프'가 작품에서 언급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멀끔하게 차려입고 엄마 비올라와 함께 식사를 하러 외출한 안드레아를 보고 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안드레아는 얼마지 않아 자살을 한다. 라모나에게 장례식에 입고 갈 옷을 사주면서 안드레아의 죽음에 대한 애도보다 장례식 에티켓, 장례식에서도 돋보이는 모습 등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는 젭. 그러나 안드레아의 장례식에서 그의 관을 들고 나오며 그는 운다. (라모나에게는 울지 말라고 했다. 유족의 슬픔을 빼앗을 수 없다며) 라모나와 우정과 사랑 사이의 경계에서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던 젭에게 라모나는 전에 젭이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한다. '버는 돈을 다 어디다 쓰는 거야?'


"병 치유하느라 돈을 다 썼어요."


라모나의 장례식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곧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제 당신은 누가 챙겨주죠?"


젭은 이 나이 되니, 하기 싫은 일은 안 해도 되어서 좋다고 여겼다. 라모나와의 만남은 젭 본인이 원했던 일이었다. 그녀를 돌보고, 그녀와 교감을 나누는 일은 그 자신이 행복을 느꼈던 일이었다. 그런데 라모나도 갑자기 그의 곁을 떠난다. 그는 친구와 대화하면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자기보다 젊은 사람들이 갑자는 죽는 것을 보니 마음이 이상하다고. 그러다가 누군가의 결혼식장에서 '성녀 마리아'가 로마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100세가 넘은 파파 할머니 성녀 마리아는 어째서인지 젭의 집에서 저녁 만찬을 갖기로 한다. 그러나 여전히 젭은 사람들이 추앙하는 성녀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젭이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는 항상 이랬다)



그렇다. 젭은 평생 '진정한 아름다움' 'The Great Beauty'를 찾아 헤맸다.  그가 엘리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는 글을 쓰고 싶은 열정에도 사로잡혔었다. 젊음, 아름다운 여인, 둘만의 특별한 사랑. 이 모든 것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충만하게 느끼게 했고, 그는 자신 안에 용솟음치는 생명력을 자신이 가진 재능, 즉 글을 쓰는 것으로 마음껏 표출했다. 그러나 이유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은 채 엘리자가 그의 곁을 떠나자 그 안에 있던 생명력도 힘을 잃고, 아름답게 보이던 세상도 빛을 잃었다. 부와 명예를 누리며 평생 화려하게 살았지만, 다시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힘도 생기지 않았다. 자신을 멋지게 꾸며보고, 멋진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아름다운 로마 곳곳을 매일 다니며 눈에 담아도 진정으로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가슴 저 깊이 묻어둔 이름 엘리자의 장례식에 가고, 친구의 아들의 자살을 곁에서 보게 되고, 사랑하는 라모나가 죽자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일부러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00세가 넘었는데도 '뿌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식물의 뿌리만 먹으며 사는 성녀 마리아를 만난 후 살아있는 자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라모나의 죽음 이후 마술사 친구를 찾아갔을 때, 그는 내일 있을 마술쇼에서 '기린 사라지다'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젭은 '나도 사라지게 해 줘'라고 말한다. 그러나 친구는 말한다. 모든 것은 '속임수'라고.


엘리자와의 추억이 있는 나폴리에서 젭은 새 소설의 첫 구절을 떠올린다.


늘 이렇게 끝난다

죽음으로

죽음 이전에 삶이 먼저 있었다.

..... 밑에 숨겨진 채 온갖 잡담과 소음 밑에 자리하고 있다.

침묵과 감성, 감정과 공포.

길들지 않은, 변덕스럽게 반짝이는 아름다움

그리곤 끔찍한 더러움과 처참한 인간성이 세상의 골칫덩이라는 덮개 아래 모두 묻혔다.

.....

저 너머엔 저 너머의 것이 있다.

난 저 너머의 있는 건 다루지 않으련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시작된다. 결국 다 '속임수다. 그래 다 속임수다.'


젭은 자신의 삶에서 사라진 모든 아름다운 것들 때문에 그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살아서 끊임없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 헤맸다. 나로 하여금 다시 글을 쓰게 만들 무언가를. 그가 유일하게 소설을 썼던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그곳에서 그는 오래전 그의 곁에서 사라진 엘리자를,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새 소설의 첫 구절이 떠오른다.


그의 곁에서 사라진,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 그 사라짐이 '속임수'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육신은 사라졌어도 그들의 흔적은 남아 있기에 이 사라짐을 '속임수'라고 여기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여기 아직도 이렇게 살아있는 내가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삶을 포기하지 못하고 목적 없이 표류하는 듯 보였어도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할 그 무언가를 계속 찾아 헤맨 내가, 나의 삶이 'The Great beauty'라는 것을 깨닫는다. 깨닫자 그는 다시 글을 쓰게 된다.


엔딩에 The Great Beauty라는 자막이 올라가고도 영화는 10여분을 로마 한가운데에 있는 강을 따라 움직이는 배의 시선으로 평범한 로마의 일상을 보여준다.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 새들, 그들과 함께 하는 도시를. (<유스>도 제목이 자막으로 올라가도 조수미가 마이클 케인의 지휘에 맞춰 노래하는 모습이 한참이나 나온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철학적으로,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풀어낸 잘 만든 영화다. 나는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 영화가 좋다. 살아있어서 다시 자신의 일을 시작한 주인공이 좋다. '사는 게 버거워도' 이 말도 참 진부한데, 그래도 '살아있는 것 그 자체로 이미 Great Beauty라고 오늘은 나 스스로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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