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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Mar 09. 2022

토리노의 말 (2011)

- 이유도 예고도 없이 시작된 파멸

감독 : 벨라 타르

출연 : 야노스 데르즈시, 에리카 보크, 미할리 코모스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63위에 랭크된 헝가리의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을 보았다. 

영화를 볼 때 정보 없이 보려고 하는데, 가능한 한 편견이나 주입된 생각 없이 작품 그 자체로 이해하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한 1시간쯤 보다가 멈추고 검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도대체 뭔데?' 싶어서.

포스터에 타르코프스키를 잇는 감독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내가 타르코프스키 감독 작품을 세 편 보았는데, 진짜 이 벨라 타르 감독님은 해도 너무 하신다. (이 리스트에 한 편이 더 있는데 벌써부터 걱정) 불면증 있으신 분들은 그냥 요거 틀어놓으면 꿈나라 가실듯하다.

바로 지난 리뷰에 지루한 영화를 본다면 보는 편인데,라고 말했는데 어머나, 그 말이 완전히 무색해진다. 146분. 2시간 반짜리 영화인데, 숏이 30개다. (내가 센 건 아니고 검색하다 알게 됨) 물론 <버드맨>이나 <1917> 같은 영화도 있지만 롱테이크라는 게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늙은 마부(야노스 데르즈시)와 딸(에리카 보크) 둘이 사는 낡은 집안에서 카메라는 거의 움직임 없이 그들의 일상을 관찰한다. 그런데 그 일상이 약간의 변형을 두고 6일간 반복된다. 이 6일의 일상이 2시간 반에 걸쳐 표현되는 것이다. 게다가 흑백 화면에 집 안 내부는 어두컴컴하고, 대사도 일체 없다. (거의라는 말도 부족함) 바람이 휭휭 부는 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들리고 음악도 테마가 하나뿐인 곡이 반복해서 나올 뿐이다. 


느린 템포의 영화(드라마)를 좋아하지만 이런 나도 보는 게 쉽지 않은 감독님이 두 분 계신데 한 분은 언급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님이시고, 한 분은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이시다. 나는 영화를 보다가 타르코프스키 보다는 허우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가 떠올랐다. 개봉 당시 오즈 야스지로에게 바치는 헌정 영화라고 해서 더 기대를 갖고 봤다가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소리가 절로 나왔다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이 벨라 타르 감독님 영화를 이제 이 <토리노의 말> 한 편을 본 것뿐이니 타르코프스키를 잇는다는 그 말에 감히 토를 달 수 있을까 싶지마는 '철학적'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고 싶다. (한때 철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관념적인 주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철학적'이라면 응당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하고 그 감정이 사색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질문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 답을 찾아가게 하는 과정을 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만난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붙들고 씨름하고 고뇌하고 느껴보는 시간이 저절로 따라오게 해야 나는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온전히 '철학적'인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고, 이 영화보다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들이 내게는 더 철학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작품에 대한 소개를 좀 더 한 후에 뒤에 이어서 말해보겠다.



영화는 실존했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일화를 소개함으로 시작된다. 


산책을 하거나 우편물을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마부가 말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말은 움직일 줄 몰랐다. 마부 이름이 뭐였더라? 주세페, 카를로, 에토레? 하여간 마부는 참다못해 채찍을 휘두르고 만다. 니체는 인파로 다가가서 분노로 미쳐 날뛰는 마부의 잔혹한 행동을 말리려고 한다. 건장한 체구의 니체가 갑자기 마차로 뛰어들어 말의 목에 팔을 두르더니 흐느낀다. 이웃이 그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는 침대에서 이틀을 꼬박 조용히 누워있다가 비로소 몇 마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린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그 후로 10년 동안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얌전하게 정신 나간 상태로 누워있는다. 그 토리노의 말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늙은 마부가 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에 한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몰로 산길을 달린다. 한참을 달리다 보면 집에 도착하는데 딸이 나와 말을 마구간에 들여놓는 것, 여러 짐을 정리하는 것 등 아버지를 돕는다. 아버지는 한쪽 손이 불편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돕고, 식사를 준비한다. "식사하세요"라고 딸이 말하면 누워 쉬던 아버지가 일어나 식탁에 앉는다. 식사라고 해야 삶은 감자 한 알이다. (1인 1알) 밤이 되고 자고 일어나면 딸은 물통을 들고 우물에 가 물을 긷는다. 길어온 물을 말에게도 먹이고, 그 물로 세수도 한다. 그러면 아버지가 일하러 나갈 채비를 도와야 한다. 즉 옷을 갈아입힌다. 나가는 아버지를 도와 수레에 짐을 싣고 말을 수레에 연결한다. 그다음부터는 앞에 말한 일들이 반복된다. 그런데 6일 동안 이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그 일상이 변형되는데, 물론 좋지 않은 쪽으로 변형된다. 



이 영화에서 첫째 날 밤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 영화 화면이다) 58년간 들리던 소리가 어느 날 갑자기 들리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상하지만 별 일 아니겠거니 하고 잠든 부녀. 둘째 날 말을 끌고 일하러 가려고 하는데 말이 통 움직이질 않는다.



어떻게 해도 움직이지 않으니 일을 하러 갈 수가 없다. 부녀는 포기하고 말을 다시 마구간에 들여보낸다. 그리고 이웃집 남자가 술이 떨어졌다며 (왜 마을로 가지 않았냐는 마부의 질문에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갈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 술을 구하기 위해 마부의 집에 방문한다. 그리고는 뭔가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듯이 얘기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영화에서 가장 대사가 많은 사람이 이 사람이다)



감독은 이 이웃집 남자의 입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에서 설정한 6일이라는 시간도 신이 세상을 창조한 6일을 차용해서 창조가 아닌 파멸의 시간으로 대치했다고 한다. 세상을 끌고 가는 권력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나쁘게 만들어 손에 넣거나, 손에 넣어 나쁘게 만든다. 그러니 고귀하고 위대하고 탁월한 자들은 존재감 없이 멈춰 서서 지켜보며 소멸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자처한 일이지만 신도 한몫했다. 그들이 원하는 진정한 의미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날은 집시들이 와서 허락도 없이 우물물을 가져가려고 하자 딸이 먼저 '가라!' 고 하고 통하지 않자 아버지가 욕을 하면서 내쫓는다. 말은 이제는 물조차 넘기지 않는다.



집시를 내쫓고 감자로 끼니를 때우고 잠든 부녀. 다음 날 딸은 일어나서 늘 그랬듯이 물통을 들고 우물로 간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물이 완전히 말라 버린 것이다.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말의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언제라도 마실 수 있는 물을 제공했던 우물은 하루 밤새 말라버렸다. 아버지는 결심을 하고 딸에게 짐을 싸라고 한다. 여길 떠나자고.



아버지는 떠날 때 거듭 말한다. "술도 가져가야 해. 술 꼭 챙겨."

이들은 짐을 꾸려 떠났다. 그러나 언덕 너머 사라졌던 그들은 시종일관 부는 강한 바람과 함께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떠났지만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물이 없으니 술도 담글 수 없다. 남은 술이라고는 병에 남아있는 저게 다다. 그렇게 네 번째 밤을 지나 다섯째 날이 밝았다. 감자로 식사를 하고 등에 불을 밝히고 잠들려고 하는데 도무지 등에 불이 붙지 않는다. 딸과 아버지가 서서 동시에 붙여보지만 되지 않는다. 불씨를 가져와서 붙여보는데도 안 된다. 딸은 묻고 아버지는 대답한다. '왜 그러는 걸까요?'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여섯째 날, 이제는 불이 등에만 안 붙는 것이 아니라, 아궁이에도 붙지 않는다. 감자마저 삶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날 감자를 접시에 각 한 알씩 올려놓고 부녀는 마주 앉는다. 



아버지는 날감자라도 먹어야 한다며 감자를 한 입 베어 문다. 날감자가 아삭 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딸은 도무지 그것을 먹을 수가 없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에 처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니체의 '토리노의 말' 일화는 니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도대체 왜 그렇게 울어야 했는지, 그리고 왜 그 이후로 앓아누워야 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추측할 뿐이고, 또 다른 예술가들이 이 일화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작품에 차용했다. 벨라 타르 감독에게 이 일화는 어떤 영감을 주었을까? 니체는 이 사건 이후 죽기 전 10년을 병을 앓고 오직 가족의 보살핌으로 연명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앓고 있었던 마음의 병이 '말이 채찍에 맞는 모습'을 본 것을 트리거 삼아 그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58년간 들렸던 '나무좀이 갉는 소리'는 어느 날 갑자기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후로 6일간 그들의 생활을 지탱하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소멸되면서 그들의 삶도 그렇게 파멸로 치닫는다.  그래서 이 일화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파멸이 시작되는 시점과 연결되는 것이다. 


인생이 '소멸'을 향해 가는 것, 본질적으로 '소멸'이다.라고 말할 때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가고, 죽음은 적어도 이 땅에서는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나는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이 마부와 딸의 삶이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이가 드니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게 되지가 않아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그것은 내게 일어나는 '소멸' 때문이다. 육체의 건강, 열정, 속도, 기억력, 유연함. 어느 하나 그대로인 것이 없다. 어느 정도는 기능이 저하되고, 어떤 것은 사라져 버린다고 느낄 정도로 급격하게 소멸되어 간다. 그렇지만 나는 살면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 보는 것은 줄어도 보이는 것은 많아졌다. 모든 것이 정점에 있을 때 누렸던 것들보다 지금의 내가 누리는 것의 가짓수는 줄었어도 나는 오히려 가지치기하고 남은 소중한 것들. 그러니까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쏟고, 그걸 가지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일에 마음을 쏟으며 진득하게 나의 시간들을 채워가고 있다. 소멸과 채워짐이 변주하며 더 나은 쪽으로 나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맨>이나 이 영화 <토리노의 말> 수준의 염세에는 동의가 안된다)


'철학적'이라 함은, 본디 '열려있음' 이어야 한다. 그가 내놓은 것을 보고 나는 바로 알아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뒤엉킴과 떠오르는 여러 질문들로 사색하는 시간이 자연스레 뒤따를 때. 그때, 비로소 나는 나를 그렇게 이끌어 간 그것을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 <토리노의 말>은 '열려있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 누가 봐도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하나의 정답이 주어진 작품을 철학적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소멸'외에 무엇을 얘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토록 '닫혀있는' 영화가 단지 관념적인 것을 주제로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것 (게다가 흑백에 대사 없고 지나치게 지루한 대중적이지 않은 표현 방식을 사용했으니)만으로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된다. 이 영화는 그저 '관념적'인 영화일 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을 다 보지 못했지만 (<향수>, <솔라리스>, <잠입자>를 봄) 그의 영화 속 대사는 너무나 정제되어 있고, 그 의미를 두고두고 곱씹어보게 만든다. 그가 공간을 사용하는 것을 보라. 프레임 하나하나에 그의 사유가 들어가 있다. 이미 답이 정해진 사유의 결말이 아니라 '사유함'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는 이들도 사유함으로 이끌린다. 하나의 큰 주제를 담고 있어도 그 안에서 생각할 소주제들이 넘쳐난다. 그의 영화는 활짝 열려 있어 완전하게 철학적이다. 

'타르코프스키를 잇는'이라는 문구만 없었어도 아마 내가 생각하지 않을 내용들이 리뷰에 많이 들어갔다. 영화를 봤을 때는 '간단한 리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포스터의 하나의 문구가 나를 되려 사색하게 만들고 철학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이렇게까지) 만들었을 때에는 만드는 이의 신념과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벨라 타르를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선상에 놓고 얘기하는 것을 다시 보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화가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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