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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Mar 11. 2022

징후와 세기 (2006)

- 의미와 무의미, 현실성과 비현실성의 혼재

감독 :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출연 : 난타랏 사와디쿨, 자루차이 이아마람, 사크다 카에부아디, 아칸 셰어캄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60위에 랭크된 태국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영화 <징후와 세기>를 보았다. 위라세타쿤 감독은 이 리스트에 3개의 작품을 올린 감독 중 한 명으로 아시아 감독 중에서는 유일하다. 이 리스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이런 이름의 감독이. 그것도 아시아의 태국에도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편견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세 편 중 가장 높은 순위인 <엉클 분미>를 보았고, 이제 이 영화 <징후와 세기>를 본 것이다. (<토리노의 말>에 이어서 바로 이 영화를 보려니까 현타가..) <엉클 분미>를 보았을 때도 정말 쇼킹했다. 영화를 이렇게 (막) 만든다고? 보고 나서 처음에 든 생각이 솔직히 이렇다. 그래도 그 독특함에 이끌려서 그런대로 재미있게 본 것 같다. (그때는 재미없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이 영화와 비교하면 꿀잼이다) 이 영화는 솔직히 이해하기가 참 힘들다. 패턴은 발견했으나 그것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는 모르겠다. 제목을 본다. 징후와 세기? 포스터를 보니 syndromes and century이다. (세기라는 한글을 보고서는 '강도'를 뜻하는 게 아닐까 했다) 징후는 영어로 sign에 가깝고 syndrome은 증후군이다. 그런데 네이버에 <징후와 세기>로 검색하면 영어 제목은 syndromes and century가 아니라 intimacy and turbulence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친밀함과 난기류' 정도. 


검색하다 보니 이 영화를 감독은 자신의 부모님께 헌정했다는데,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부모님께 바친 걸까? (나무위키 왈, 감독의 부모님이 이싼 지방 콘깬 시 병원에서 일한 의사라고 한다.) 영화에서는 젊은 여자 의사 한 명과, 남자 의사 한 명이 나오는데, 배경은 앞에 초록색 논밭이 펼쳐져 있는 병원이니까 아마 시골일 것이고, 또 건물이 크고 깨끗한 병원이 하나 나오니까 거기는 도시일 것이다. 여의사와 남의사가 마주 보고 앉아서 인터뷰 같은 걸 하는데, 질문들이 이상하다. 그리고 승려들이 와서 진료를 받는데, 승려들도 이상하고 의사도 이상하다. 갑자기 어떤 남자가 여의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여의사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뭔가가 있을 뻔한 남자와 그의 누나 이야기가 중간에 삽입된다. 그리고 도시 병원으로 옮겨져서 똑같이 그 여의사인데 옷을 도시스럽게 입고 다른 남자를 인터뷰하는데 질문은 아까랑 거의 비슷하게 이상하다. 그리고 치과 의사도 한 명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가수라는 직업을 가진 투잡족이라서 진료 중에 콘서트를 연다. 승려들과 의사들,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시 병원에는 아줌마 의사쌤이 두 분 등장하는데 가운을 안 입고 있어서 의사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디가 아픈 젊은이가 와서 진료실도 아닌 데서 술을 마시며 진료를 받는데, 그것도 이상하다. 젊은 환자는 테니스 라켓을 갖고서 계속 공을 튕기고 남의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대화를 한다.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나오는데 여의사쌤 썸남 누나다. 남의사 여친이 병원으로 찾아오는데 여친이 멀리 떠난다고 하는데 남의사는 안 간다고 하다가 둘이 키스를 한다. 시골과 도시의 모습이 동상이나 불상의 위치나 모습을 변형하며 변주된다. 카메라가 처음에는 여의사 바스트샷 위주로 잡다가 도시로 가면서 남의사를 잡는다. 도시에서도 승려는 나오고 진료하는 의사쌤이 바뀌는데 여의사와는 달리 환자에게 맞춰주려고 한다. 병원 내 기계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기가 점점 자욱해지고 커다란 환기 장치가 그 연기를 빨아들인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의 지평을 넓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것도 영화도 만든다고? 영환데 이렇게 막 찍는다고? 이런 부조리극 같은 걸 영상으로 표현해 낸다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고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고? 싶은데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고 역설적으로 표현된 의미가 숨겨져 있다. 비슷한 것이 반복되는 것 같으나 비슷해도 완전히 같지는 않다. 중간중간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대화를 하다가도 다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 이상한 말들을 한다. 

부모님이 살고 일하시던 곳을 배경 삼아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주제적인 측면보다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한 시도였을까. 또 <엉클 분미>와 마찬가지로 불교적 색채를 과감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숏의 연결과, 대사들은 공들여 만든 게 보인다. 하나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긴밀하게 이어 붙인 숏은 아닐지라도, 그 이미지의 연결이 전달하는 느낌은 분명히 존재한다. 

징후 혹은 증후군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세기는 전생과 연결되는 걸까? 혹은 왜 친밀함과 난기류라는 영어 제목인 걸까?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가 복잡하게 뒤엉켜 표현된 걸 말하는 걸까?


감독에게 직접 답을 듣지 않는 이상에야 알 수가 없는 질문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정답과 가까운 답을 예상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하고 느꼈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라는 사람만의 시그니처가 분명하다는 것, 그리고 일면 <부조리극>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의미와 무의미, 현실성과 비현실성의 혼재. 이 말 외에는 이 영화를 표현할 다른 말을 찾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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