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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Apr 08. 2022

제로 다크 서티 (2012)

- 10년의 집착이 이뤄낸 성과, 그리고 참을 수 없는 허탈

감독 : 캐서린 비글로우

출연 : 제시카 차스테인, 제이슨 클락, 조엘 에저튼, 제니퍼 엘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57위에 랭크된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2012년 작품 <제로 다크 서티>를 보았다. 영화를 보기 전에, 여감독님인 것을 알고는 봤지만 다 보고 나서는 정말 깜짝 놀랐다. 진짜 내가 본 여자 중에 최고의 장부인 것 같다.  마지막 30분 전투씬은 진짜 내가 본 어떤 첩보 전쟁 영화보다 긴박감이 넘치면서도 스케일이 커 영상으로 압도한다. 그 부분만 몇 번을 다시 보았을 정도로 정말 잘 찍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알 카에다의 테러를 미리 저지하고, 빈 라덴을 찾아 사살하기 위해 CIA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일의 진척을 위해 유능한 요원 마야(제시카 차스테인)가 파키스탄으로 파견된다. 그곳에서 그녀가 처음 접하게 되는 것은, 알 카에다의 주요 요원 중 붙잡힌 한 놈을 고문하는 것이었다. 물론 고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빈 라덴의 거처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중요 정보를 말하지 않는다. 족장(오사마 빈 라덴)에게서 지령을 받아, 각 대원에게 임무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아부 아흐메드의 이름만 말할 뿐이다. 이름만 말할 뿐,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그때부터, 마야의 아부 아흐메드를 찾기 위한 집착이 시작된다. 마야의 관심사는 온통 아부 아흐메드를 찾는데에 쏠려 있다. 그래서 처음에 선배 댄(제이슨 클락)이 고문하는 모습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던 마야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와 똑같은 방법을 사용해서, 같은 수위로 붙잡힌 놈들을 고문한다. 그러는 와중에 그녀가 적의 타깃이 되었다. 그리고 CIA는 어떤 성과도 없이, 알 카에다의 계속된 테러를 눈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니 주변에서 자신을 돌보고 여유를 가지라는 조언을 해도 전혀 들리지가 않는 마야다.

오직 아부 아흐메드를 찾는 것만이 그녀 인생을 모조리 독차지한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시원치 않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것들도 포기한 채, 오직 아부 아흐메드에게만 집착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댄은 오랫동안 일을 했지만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고, 사람을 고문해야 하는 지독한 일에 신물을 느껴 파키스탄을 떠나 CIA 본부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마야는 파키스탄에 남아 어떻게 해서든 아부 아흐메드를 찾아서 빈 라덴의 거처를 알아내겠다는 집념을 꺾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그녀가 자신을 아끼도록 조언해주고, 마야가 일을 추진하는 방법만이 최선이 아니라고 설득하는 선배 제시카(제니퍼 엘). 마야와 제시카는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기분 전환을 하는데, 그곳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다. 다행히 둘은 무사히 살았지만, 이번에도 테러를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깊어지고 그 놈들을 향한 분노가 점점 거세진다. 그러던 어느 날, 알 카에다 쪽에 변절자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를 만나는 일을 제시카가 맡는다. (마야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데, 마야가 거절하는 것 보고, 아, 제시카는 죽겠구나 했다) 제시카는 손수 케이크를 만들어 그를 대접해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한다. 그녀의 이상하리만치 들뜬 모습이 곧 일어날 비극을 암시한다. 그리고 호의의 호의를 베풀어 경호대까지 철수시켰는데, 변절자라 믿었던 그들은 CIA 기지로 들어와 자동차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 제시카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설상가상으로 아부 아흐메드는 이미 2001년에 카불에서 사망했던 정보가 들어오고, 지금껏 아부 아흐메드만 쫓던 마야는 망연자실이다. 그런데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아부 아흐메드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던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쫓던 사람은 아부 아흐메드가 아닌 그의 형이었고, 아부 아흐메드란 이름은 가명일 뿐 그가 곧 이브라힘 사이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추적, 전화를 할 때마다 전화를 어디서 하는지 위치를 추적하는 디지털스러우면서도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파키스탄 시내를 돌고 돈 끝에, 이브라힘으로 보이는 자가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의 한 거대 저택에 들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정황상, 그리고 그 저택을 요리조리 뜯어본 결과, 알 카에다의 중요 인물이 거주하는 것은 확실하다고 보지만, 과연 빈 라덴이 그곳에 있을 것인가에 대한 확신은 얻지 못하는 CIA. 마야만이 유일하게 그곳에 빈 라덴이 있을 것이라고 100% 확신한다. (도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마야는 6개월이 넘도록 상부를 끈질기게 설득, 결국 CIA 국장이 마야와 단독으로 대화를 나눈 후, 국장은 대통령께 허락을 받으러 들어간다.




마야는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아프가니스탄 CIA 군사기지에서 작전에 투입될 군사들과 함께 한다. 작은 체구의 여자 하나가 너무나 확신에 차 있는 모습을 보고, 대원들도 그곳에 정말 빈 라덴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리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졌다는 소식. 그리고 작전 날짜는 바로 오늘 밤이다. 대원들은 두 대의 헬기에 나눠 타 빈 라덴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 저택으로 날아간다. 초저공비행으로 파키스탄의 레이더망을 피해 무사히 타깃에 도착한 대원들. 헬기 한 대가 저택 옆 마당으로 추락하긴 했지만 대원들은 모두 무사하고, 작전은 유효하다.


먼저 게스트하우스를 둘러본 후, 빈 라덴이 거할 것으로 보이는 저택으로 들어간다.


"이브라힘! 나와! 이브라힘!"


문에 가까이 다가서자 안쪽에서 총을 쏴댄다. 일제히 사격하는 대원들. 그리고 이브라힘은 사살된다.


1층을 확인하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빈 라덴의 장남인 칼리드가 후다닥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포착.

대원 하나가 속삭이듯 그의 이름을 부른다.


"칼리드, 칼리드~"


올라가다 내려오던 칼리드 사살.


그리고 이제 3층이 남았다. 그리고 아마 그곳에 오사마 빈 라덴이 있을 것이다.

칼리드를 부르던 목소리와 비슷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다.


"오사마~ 오사마~"


그리고 얼결에 오사마 사살에 성공, 아이에게 그의 이름을 확인한다.



  

그곳에서 각종 문서와 영상 파일을 입수하고, 빈 라덴의 시체를 가방에 담아 헬기에 싣는다. 파키스탄 공군이 발진했기 때문에 4분 안에 그곳을 떠나야 한다. 추락한 헬기는 폭파시킨다. 미국의 최근 기술이 집약된 헬기이기 때문에 보완을 위해서는 당연하다.

기지로 돌아온 대원들은 환호성을 지르지만 정작 마야는 얼떨떨하다. 정말로 빈 라덴이 죽은 것인지, 이제 정말 끝난 것인지. 그녀는 얼이 빠져서 시체 가방의 지퍼를 내린다. 정말 오사마 빈 라덴이다. 대통령은 전화를 통해 사실을 보고 받는다.




엄청난 일을 해낸 그녀를 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수송기가 온다. 커다란 수송기에 탈 사람은 오직 마야 한 사람이다. 그런데, 넓은 수송기에서 자리 하나를 잡고 앉은 그녀는 자기도 모를 눈물이 흐른다. 괜히 서럽고 허탈하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빈 라덴 사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한 사람 마야의 집착 때문이었다. 마야는 자기 삶이 없다. 그냥 10년 내내 빈 라덴만 쫓는 CIA 요원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마야를 보면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를린>에서의 한석규도 생각났다.

왜 이 일을 하냐는 질문에, 나도 모른다고. 하다 보니까 계속하는 거라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 쭉 CIA에서 근무해 온 마야는 능력을 인정받은 배짱 있는 여자 요원이었다. 그래서 미국 본토에서 이 험한 곳 파키스탄에까지 파견되어 온다. 그러나 살던 곳과는 다른 불편한 환경, 언제 어디에서 터질지 모르는 테러의 위험, 자기 인간성마저 상처 입히는 알카에다를 심문하는 과정, 아부 아흐메드를 찾고 또 찾고, 쫓고 또 쫓지만 언제나 허무한 그 끝, 그리고 의지하던 동료의 죽음. 이 모든 악조건에도 마야는 빈 라덴을 찾아 제거하겠다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때까지는 자신의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거대 저택에 빈 라덴이 있다고 100%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어떤 정황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믿음에 바탕을 둔 확신이다. 근거가 아닌 신념에 바탕을 둔 확신.


영화는 마야를 영웅처럼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마야의 주변 인물들이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신기루를 좇는 것 같은 기분, 빈 라덴을 잡겠다는 목표 아래 행해야만 하는 고문, 그것을 견디지 못한 댄은 파키스탄을 떠난다. 돈이면 사람을 다 살 수 있다고 믿고, 손수 만든 케이크가 변절자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믿는 제시카가 오히려 순수하다. (그래서 죽었지만) 아부 아흐메드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줄을 놓은 마야를 위로하는 동료들, 근거로 확신을 얻고자 하는, 그것이 희생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믿는 상부 임원들이 오히려 더 넓게 보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빈 라덴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 대통령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오직 마야만이 100%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100%의 확신이란 언제나 치우치기 마련인 것. 용의자를 특정하지 않고서 수사가 진행될 수 없다. 물증이 한 사람을 가리켜도 그 사람의 범행 동기와 과거 이력을 살펴야 한다. 심증이 있어야 수사가 진행되고, 물증은 심증을 뒷받침할 뿐이다. 그리고 심증이란 그렇게 보는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게 마련이므로 완전한 객관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재밌게 봤던 드라마 <오만과 편견>에서 최민수가 구동치 검사(최진혁)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한테는 개인적으로 꽂힌 대사여서 기억이 난다)


"범인을 잡을 때, 증거만으론 잡을 수 없어요. 검사의 관점이 있어야 해. 이럴 거라고 믿고 방향을 잡고 들어가야 범인을 잡을 수 있어."


우리는 실패 확률을 낮추기 위해 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따져보고, '그럴 이유'와 '그렇지 않을 이유'를 모두 생각하며 저울질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작전을 수행할 것인지, 멈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는 객관성에 무게를 실어왔다면 마지막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확신을 갖고 과단성 있게 밀어붙이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성과'라는 것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넓고 객관적으로 보는 사람, 냉정하고 차갑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좀 미쳐 있고, 치우쳐 있고, 그것밖에 모르는, 목표와 거리를 두지 않고 유착한 뜨거운 인간이 내더라는 것.


그런데 목표를 이룬 후에는 왜 서러워질까.

그래서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성과는 냈지만 급하게 우울해지고, 그래서 그 허탈감을 잊기 위해, 쉽게 타락의 길로 빠져드는 것 같다. 또 다른 목표를 찾아내 또 집착하고, 그렇게 일중독자가 되고,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그러다가 진짜 행복은 잃어버리고..


확실히 세상은 미친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끌어간다.

하나를 얻고, 열을 잃은 사람들이 만들어간다.

마지막에는 혼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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