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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Apr 11. 2022

폭력의 역사 (2005)

- 과거 청산이 실패하는 이유

감독 : 데이빗 크로넨버그

출연 : 비고 모텐슨, 마리아 벨로, 윌리엄 허트, 애쉬튼 홈즈, 에드 해리스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59위에 랭크된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2005년 작품 <폭력의 역사>를 보았다. 음.. 솔직히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모르겠다. 제목이 왜 <폭력의 역사>인지. 주인공 톰 스톨(비고 모텐슨)이 폭력 세계에 몸담았던 자신의 인생의 역사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인지, 아무리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자기 몸에 배어있는 폭력 근성은 없앨 수 없다는 것인지,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 톰의 과거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가 퍽 인위적이어서 영화가 전체적으로 뚝딱거리는 느낌이 들어 높은 점수를 주긴 어려울 듯하다.


도시 외곽 한적한 마을에서 가정을 꾸려 화목하게 살고 있는 스톨 가족. 톰과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는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을 둔 부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뜨겁게 사랑하고 있고, 어린 여동생 사라가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깨자 오빠 잭(애쉬튼 홈즈)은 한달음에 달려와 다정하게 여동생을 토닥인다. 톰의 가족이 그러니까 '참 예쁘게 산다'라는 느낌을 주기보다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어 위화감을 준다는 말이다. (감독이 일부러 연출을 이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2인조 강도단이 톰의 식당에 들이닥치고, 직원 한 명을 붙잡아 죽이려 하자 톰은 날렵하게 몸을 날려 두 명의 악당을 모두 물리치고 직원들의 목숨을 구한다. 그런데 악당을 '죽임으로써' 물리쳤다는 것, 일반 식당 사장의 몸놀림이라고 하기에는 쌔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 이 남자 톰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하는 것이다. 그냥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톰이 한 일이 사실 대단한 일이어서 방송을 타게 되고, 방송이 나간 후 어떤 남자들이 찾아와 그를 '톰'이 아닌 '조이'라고 부르며 아는 체하게 되면서 평온했던 톰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아니라고 시치미 떼고 돌려보내면 될 줄 알았는데, 이 바닥의 생리가 어디 그러했던가. 그를 찾아왔다는 것은 지금껏 숨어 살던 그를 그 사람들은 찾고 있었다는 뜻이고, 행운처럼 그를 찾았는데 '나는 그 사람 아니니 가!'라고 한들 그냥 가버릴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처음엔 톰에게 직접 왔다가, 그다음에는 아내 에디와 사라가 쇼핑하는 곳에 나타나고, 결국 아들 잭을 인질로 삼아 그 앞에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가족에게 자신은 조이가 아니라 톰이라고 저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이라고 말해왔지만 아들이 잡혀 있는 지금 물불을 가릴 상황이 아니다. 정체가 드러날 것을 각오하고 톰은 자신을 찾아온 세 명의 마피아를 단숨에 해치우고 가족을 구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잭'의 변화다.


사실 잭은 학교 친구들에게 '계집애 같은 놈'이란 말을 듣는 얌전한 아이였다. 그런데 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 친구가 계속 그를 괴롭히며 도발하자 그 친구를 때려눕혀 병원에 입원하게 만든다. (물론 아빠가 시민영웅으로 등극한 이후이다) 또 자신을 인질로 잡은 세 명의 마피아와 대치한 상황에서 톰이 위험한 상황이 되자 총을 쏴 톰을 구한 사람이 바로 잭인 것이다. '폭력의 역사' 라 함은 '폭력성의 유전'과 무관할 수 없다. 폭발하듯 드러난 잭의 이런 폭력성이 톰(조이)이 어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어찌 됐든 가족을 구했으나 아내 에디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톰 역시 아니라고 우겨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사실을 토로하지만 그 이후로 부부 사이는 파탄 나고, 지금까지 사랑으로 꾸려왔던 가정은 풍비박산 난다. 그리고 여전히 폭력 세계에 몸 담고 살고 있는 톰의 형 리치(윌리엄 허트)로부터 연락이 오고, 회피하는 것으로는 가족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한 톰은 혼자 형을 찾아간다. 암흑계 거물 칼 포카티(에드 해리스)를 죽인 것이 화근이 되어, 리치가 이어받기로 암묵적으로 약속된 차기 보스 자리가 물 건너가고, 리치는 보스 자리를 지키는 것을 넘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동생 조이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톰은 죽을 수가 없다. 죽기도 싫다. 어떻게 만든 새 삶인데, 나의 가정과 가족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데. 비록 피를 나눈 형제이지만 나에게 먼저 총을 겨눈 이상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결론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해치우고 톰은 살아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와 아이들이 식사를 하고 있고, 남편(아버지)이 자리를 비웠을 때 어떤 일을 했을지 짐작하는 아내 에디와 아들 잭은 그의 눈치만 본다. 어린 딸 사라만이 아빠의 그릇을 들고 그가 앉아야 할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톰도 눈치를 보면서 늘 자신이 앉던 자리에 천천히 앉고, 그가 앉자 잭이 그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서 담는다. 

음식이 무슨 맛인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는지 등의 가벼운 대화마저 사라진 적막 가운데서 스톨 가족은 함께 식사를 한다.




만약 강도가 톰의 가게에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톰은 끝까지 톰으로서 살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꽤 오랜 시간(결혼을 하고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조이가 아닌 톰의 삶을 시작한 후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고, 그 삶을 사랑했고 자신의 가정을 진심으로 아꼈기 때문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잘 지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디는 남편에게서 '폭력성'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가 만들어준 울타리 안에서 평안함과 행복감을 맘껏 누렸다. 그래서 나는 톰에게 일어난 이 사건이 좀 가혹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톰이 끝까지 톰으로서 살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서 무책임하게 도망쳤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다'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되었다'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졌어야 했다. '조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의 대가를 정당하게 '조이'라는 이름으로 치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이는 그렇게 책임을 지는 대신 '톰'이라는 새 인물을 만들어 자신의 과거는 기억 속에 묻고 지워버리려고 했다. 이제 앞으로 '톰'의 이름으로 착하게 살면서(그렇게 사는 것으로) 속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판단이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던 탓이다. 

한 자리에 둘러앉기는 했으나 그 자리는 '공포'로 만들어진 자리이다. '당신이 싫다', '아빠가 무섭다.'라는 말을 꺼내기도 두려운 상황. 어쩔 수 없이 그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톰의 가족들. 물론 그가 '톰'으로서 함께 했던 따뜻하고 소중한 기억들이 남아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많은 공포가 이제 이 가정을 지배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예상할 수 있다. 


과거를 청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대가를 치르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져도,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싶어도 그 방법만이 그 자신을 과거로부터 구원할 유일한 길이다. 책임지지 않는 속죄란 허풍선이일 뿐이다. 삶의 의미는 '진실성'에서 찾을 수 있고, 진실로 나아가는 길은 나의 과오를 직면하고 책임지는 길. 그 길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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